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612/1/BBSMSTR_000000010227/view.do


唐 군사력 서역에 묶인 사이, 신라 나당전쟁 결심

기사입력 2014. 06. 11   18:45 


<110> 나당전쟁 전야



669년 4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장악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는 가운데 평양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섰다. 그 원인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대부분의 병력이 빠져나갔고 평양에 있던 설인귀가 안동도호부를 서북쪽인 신성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인귀는 669년에서 67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신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직속 군대를 데리고 장안으로 갔다. 일련의 소식들은 신라의 지원을 받고자 열망하는 고구려인들을 통해 김유신의 귀에 들어갔다. 김유신과 신라군 수뇌부는 659년에 시작돼 668년까지 진행된 토번의 서역 잠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 소식을 곧바로 접하지는 못했고, 장안에 둥지를 튼 김인문과 그의 외교 전문가들이 보낸 뒤늦은 제보를 들었다.


세계의 포럼, 장안 국학에서 만난 토번


당나라의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왕족과 귀족 자제들이 유학을 와 있었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9년 5월 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640년) 여름 5월에 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태종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으로 삼고 (국학의) 학사(學舍)를 1200칸으로 늘려지었으며, 학생을 늘려 3260명에 차게 하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경사(장안)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고구려·백제·고창·토번(吐蕃) 역시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641년 당태종을 만난 김춘추는 아들의 국학 입학을 부탁했다. 직후 김인문이 국학에 들어갔다.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인 국학은 세계적인 인재의 보고요, 포럼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김인문이 촉각을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약소국인 신라에서 태어난 그의 숙명이었다. 그는 국학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이고 실크로드 오아시스 국가인 고창, 티베트고원에서 온 토번의 자제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고, 그들을 통해 동아시아와 서역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축적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인문의 주목을 끈 나라 가운데 토번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세계 최대의 강국 당나라였지만 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김인문은 토번이 당의 한반도전쟁 개입을 자국의 영토 팽창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을 인지했으리라.


669년에는 신라 조정도 이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낸 이래 10년 동안 서역의 상황은 악화돼 있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토번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당제국이란 육식성 동물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 설인귀가 책임자로 있던 안동도호부가 중심을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고, 그가 병력을 데리고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669년 4월 이전부터 토번이 실크로드에 있는 구자(龜玆)·언기(焉耆)·발환성(撥換城) 등 당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첩보가 아니라 해도 안동도호부의 신성 이전과 설인귀의 귀국을 보고 ‘감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신라군부의 백제지역 점령 실행


한반도에 미치는 당의 힘이 약화된 것을 직감한 신라 수뇌부는 부흥운동을 꾀하는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지원하기로 했고, 당이 지배하고 있는 백제의 영토와 사람들을 차지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신라는 군이 국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국가와 군대의 구분선이 거의 없었고 과감한 결정을 신속히 내릴 수 있는 구조였다. 당시 신라의 최고사령관은 문무왕이었고, 그의 외삼촌인 김유신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 저항군을 지원하고 웅진도독부 관할의 백제를 차지하는 것은 최강국 당을 자극하는 아주 위험한 군사행동이었다. 예상대로 당고종이 진노했다. 669년 5월 신라는 곧바로 사죄사를 파견해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혀야 했다. 각간 김흠순이 사절단장으로 임명됐고 파진찬 양도가 그를 따랐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가 백제 점령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몇 달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신라는 백제 지역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당의 괴뢰정부가 들어선 백제가 다시 힘을 가진다면 신라의 지금까지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김유신은 당나라에 간 동생 일행의 안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김흠순 등이 황제에게 사죄하는 순간에도 신라군부의 장군들은 백제의 영토와 인민을 차지하는 데 열중했다. 그것은 즉각 당고종의 귀에 들어갔고, 더 이상 사죄사의 할 일은 없었다. 김흠순은 신라의 고승 의상스님을 불렀다.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丞相) 김흠순(欽純 또는 仁問)·양도 등이 당나라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은 몰래 의상에 권하여 먼저 돌아가게 해 함형(咸亨) 원년(元年 670) 경오(庚午)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당나라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나오는 기록이다.


669년 말 당고종은 신라의 왕제 김인문을 연금했고, 흠순과 양도 등을 투옥했다. 670년 정월 김인문은 당에 남았고 흠순은 석방됐다. 양도는 감옥에 남겨졌고, 결국 그곳에 뼈를 묻을 터였다. 흠순을 석방시킨 것은 그의 형이 지배하는 신라군부에 당고종이 자신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당나라와 전쟁 가능성이 높아져 갔다. 신라의 수뇌부 대부분은 신라가 당나라와 싸워서 이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당나라에 가장 오랫동안 체류했던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은 당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계제국 당의 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내부에서도 당의 압박을 어떻게든 외교 방법으로 회피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김유신의 신라군부 입장에서 봤을 때는 당이 한반도에 백제라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었다.


승산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전쟁


만일 당이 백제를 영구적으로 가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나라의 무력은 강하다. 그 강렬한 팽창의 욕망은 당나라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습성이었다. 틀림없이 자나깨나 군대를 백제 땅에서 동진시켜 신라를 병합하려고 할 것이다. 신라는 옛날 백제와 대치하던 것과 똑같이 방어전을 연출해야 한다. 그것도 백제보다 훨씬 강력한 당나라의 공격으로부터 말이다. 백제에도 밀렸던 신라가 당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훨씬 힘들 것이다. 결국 신라 자체가 당나라의 팽창운동에 먹힐 것이다. “당나라와 전쟁은 피할 수 없어”라는 것이 김유신과 신라군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세계 초유의 강대국인 당나라는 약소국 신라가 돌아버리지 않는 한 전쟁 따위를 결심할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고종은 “신라가 감히 우리 대당제국과 전쟁을 어떻게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와 당의 국력을 비교해 봤을 때 아주 상식적인 관측이었다. 신라군부의 대부분 인사들도 승산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태를 계속 방관만 한다면 당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할 것이고, 그들의 침공은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 신라로 번질 것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신라의 승리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 당제국의 힘이 서역에 묶여 있는 현재 전쟁을 결행해야 한다. 이미 성공이냐 실패냐를 논하고 있을 여유 따위가 없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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