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626/1/BBSMSTR_000000010227/view.do
고구려부흥군 동원‘唐 축출’ 의기투합
기사입력 2014.06.25 18:40
<112> 약자가 선택한 전쟁
당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시야가 넓어야 했다. 시력이 밝지 않아 멀리 보지 못하면 생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이 서역에서 처한 상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당나라가 서역과 한반도 양측에서 윈윈을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보였다. 약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려였다. 지금은 결판이 난 사실이지만 당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군의 만주진입
국운을 건 전쟁을 수행하려는 신라인들에게 사실 확인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670년 3월 신라의 장군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거느린 신라군 1만이 고구려 영내에 들어갔다. 당시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장악이 현격히 떨어져 있었고, 당나라의 군사와 그 핵심지휘부가 사라진 고구려 땅에 반당적인 폭동의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을 취합하여 조직화시킨 자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연무(高延武)였다.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있었던 그는 신라와 정보를 주고받았다. 당나라의 통치하에 들어간 이상 그는 여기서 벗어나야 하고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반당적인 적개심에 가득 찬 신라군부밖에 없었다.
사찬 설오유가 이끄는 1만의 신라군이 고연무의 정예병 1만의 안내를 받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신라인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강이었고, 산지에 익숙해 있던 신라군들이 보지 못했던 광활한 땅이 그 너머에 있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옥골’은 압록강 건너에 위치한 오골성이 거의 확실하다. 현재 행정구역상 요령성 봉황시에 위치한 이 산성의 규모는 고구려에서도 가장 거대했다. 최근 현지 전문가들이 측량한 오골성의 둘레는 16㎞에 가깝다. 명나라 ‘요동지’에 오골성은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고구려 역사에서 오골성의 역할은 매우 뚜렷하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고,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압록강가의 박작성에 쳐들어가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과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 남짓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이처럼 오골성이 그 당시에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을 지원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이곳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경략하는 센터로 삼아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돌궐 주력 서역이동 확인
신라와 고구려 연합군은 일단 오골성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군사들과 전마가 쉴 수 있고, 식량과 군수물자 등을 재보급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에 소속된 말갈족 군대가 그곳과 멀지 않은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곳에 돌궐 기병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신라가 두려워했던 상대는 말갈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향후 신라가 맞서야 할 주요한 적이 돌궐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정보였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돌궐계 군대를 대규모로 동원했고, 신라군은 그들의 지원을 받고 고구려군과 전투를 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돌궐 기병의 주력이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의 아들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함께 서역으로 이동했다. 중국 최대의 염호(鹽湖)인 청해호(靑海湖) 부근에서 토번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처라가한(處羅可汗)의 아들이었던 아사나사이는 돌궐왕족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645년 이후부터 집실사력(執失思力)과 함께 동돌궐군단을 이끌었고, 647년에도 그들을 거느리고 구자(玆)를 정복한 바 있다.
670년 초여름 4월 4일에 신라ㆍ고구려 연합군과 말갈군대 사이에 전투가 만주에서 벌어졌다. 전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 결과만 알 수 있다. 신라ㆍ고구려 연합군은 말갈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죽은 말갈군대의 시체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장군 고간이 이끄는 후발대가 전선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신라군은 백성(白城)으로 일단 후퇴를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670년 4월) 수령 검모잠이 반하여 안승(安舜)을 군주로 세우자,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670년 7월 당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이 신라에 도착했다. 그는 당고종이 제시한 한반도 영토획정에 대한 지도를 가지고 왔다. 지도를 펴 보았을 때 신라의 장군들은 경악했다.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신라 상층의 여론이 들끓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3·4년 사이에 당은 백제를 신라에게 한 번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려고 한다.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희망을 잃었다.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니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다. 백년 후에는 신라의 자손들이 그들에게 먹혀 없어질 것이다!”
고구려 인적자원 수혈받아 당과 결전 태세
지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해 3·4월에 나당전쟁이 이미 개전되었다. 그렇다 해도 당고종은 그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준다면 신라군의 만주북상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조건은 너무나 턱도 없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맹약을 뒤집어엎어버리는 신의상(信義上) 상습 범죄자들인 중국인들과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김유신과 그의 군부의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동돌궐 군대가 서역으로 간 상황에서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670년 8월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에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투항한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안승을 맞아들였고, 보덕국 국왕으로 책봉했다. 안승의 존재는 그와 함께 신라에 내려온 고구려인들을 대당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고구려인들에게 그들의 고국이 신라를 도우면 다시 부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안승은 고구려 땅에 있는 사람들이 신라로 몰려들게 하는 자석 역할을 했다. 고구려인들은 신라에 대거 몰려왔다. 투항 고구려 정예병력 1만을 유지할 수 있는 두터운 인간 층이 형성되었다.
그때조차도 신라의 내부에 반전을 주장하는 세력도 존재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당이 토번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도 있고, 당군이 토번과의 결전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동돌궐의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신라를 덮칠 것이고, 대책이 없어진다. 전쟁중지의 목소리는 청해호 부근 대비천에서 당 토번 전쟁의 결과가 신라에 전해질 때까지 계속 나왔을 것이다.
670년 4월 (670) 토번이 서역으로 진격하여 백주(白州) 등 18주를 함락시키고, 또 우전(于 :호탄)과 연합하여 구자(龜玆)의 발환성(撥換城)을 함락시켰다. 당조정은 천산남로의 구자ㆍ우전ㆍ언기(焉耆)ㆍ소륵(疏勒:카쉬가르) 등 안서 4진을 폐지하였다. 토번이 실크로드의 천산남로를 장악했다. 그러자 당고종은 토번과의 전쟁을 수행할 장군들이 임명했다. 8월에 가서 그들은 병력을 이끌고 청해에 도착했다. 주력은 동돌궐 군대 11만이었다. 아사나충이 이끄는 동돌궐군대 일부는 이전에도 토번과 전쟁에 동원되었다.
당과 토번 두 강국이 정면 승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 전투 결과에 따라 신라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관련글
오골성 목록 https://tadream.tistory.com/5597
'한국사 >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4> 신라, 대동강서 唐 군량선 격침적의 숨통을 죄다 - 국방 (0) | 2019.10.15 |
---|---|
<113> 티베트, 실크로드 장악하고 唐의 11만 울부짖는 망령들 그 목소리 흑~흑 울고 있다 - 국방 (0) | 2019.10.15 |
<111> 70여 년 이어진 삼국통일전쟁기 백성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 - 국방 (0) | 2019.10.15 |
<110> 唐 군사력 서역에 묶인 사이, 신라 나당전쟁 결심 - 국방 (0) | 2019.10.15 |
[게릴라칼럼] 신라 말기 임금 헌강왕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 오마이뉴스 (0) | 2019.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