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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실크로드 장악하고 唐의 11만 울부짖는 망령들 그 목소리 흑~흑 울고 있다
기사입력 2014. 07. 02 18:24
<113> 대비천 전투
청해호를 바라보고 서 있는 문성공주 像. 641년 그녀는 당나라 토번 사이의 평화를 보증하는 화번공주로 토번왕에게 시집을 갔다. 하지만, 남편 송짼감포가 죽고 말년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사진제공: 정순태 작가
당군 11만 청해호 부근 진지 구축 초반 승리 불구 지원시기 놓쳐 궤멸
당, 숨고르기… 신라는 인적자원 한계
670년 7월께 당나라 군대 11만이 청해호 부근에 도착했다. 이 염호(鹽湖)의 면적은 4340㎢로 서울의 7배다. 북쪽에서 여러 하천이 흘러드나 배출 하천이 없다. 당군은 토번을 이곳에서 몰아내야 서역의 실크로드를 탈환할 수 있고, 서역의 길목인 하서회랑을 지켜낼 수 있다. 설인귀가 총사령관이었고, 그 아래에 곽대봉(郭待封)과 돌궐 왕족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이 있었다. 곽대봉은 설인귀와 같은 반열에 있었는데 전쟁에 투입될 당시에는 설인귀의 부하가 됐다. 설인귀의 명령을 받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는 청해호의 남쪽에 있는 대비천(大非川)에 이르렀다. 그곳은 지금의 공화현(共和縣) 서남쪽 절길(切吉)평원으로 그 부근에서 고도가 낮은 지역이었다. 설인귀는 이보다 고도가 높은 대비령(大非嶺) 고개에 목책을 설치하고 중간 캠프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작전목표 지역은 오해(烏海: 청해성 다마현)였다. 대비령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었다. 그래서 중장비와 군수품, 치중(輜重)을 모두 가져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넓고 평평한 대비령 위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그 안에 물건을 남겨두고 병사 2만이 이를 지키게 했다. 경무장 정예병을 인솔하고 빠른 속도로 철야행군해 토번군이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타서 습격하려 했다.
●대비천에서 당군 11만 전멸
설인귀는 선발대를 이끌고 가서 하구(河口: 積石)에서 토번군을 쳤다. 토번군은 당군이 그렇게 빨리 올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토번군은 무너졌고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살아남은 자들은 흩어져 달아났다. 설인귀는 소와 양 1만 여두(頭)를 거둬들였으며, 북을 치며 서쪽으로 이동해 곧장 오해성(烏海城)을 점령했다. 그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전투는 타이밍이다. 곽대봉은 치중을 대비령에 있는 목책에 두지 않고, 그것을 병사들에게 모두 짊어지게 했다. 행군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토번군 20만과 마주쳤다. 토번군은 질서 있고 기강이 잡힌 군대였다. 병력도 많았고 고산에 적응해 있는데다 충분히 휴식까지 취한 상태였다. 고산지대에서 치중을 가지고 오느라 지친 곽대봉의 당군은 토번군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궤멸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치중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장비와 인력을 모두 상실한 설인귀의 선발대는 암울했다. 일단 오해에서 대비천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토번 군부의 수장 친링(論欽陵)이 이끄는 토번의 주력군대 40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인귀는 중과부적을 실감했다. 당군은 토번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설인귀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구당서’ 진자앙전(陳子昻傳)은 그 패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국가가 이전에 설인귀와 곽대봉을 토벌의 장수로 삼았으나 11만이 대비천에서 도살돼 한 명의 병사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설인귀 등은 토번의 친링에게 치욕적인 화해를 청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극소수 병사들의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해를 바꿔 가면서 청해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계속 벌어졌고, 병사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여기서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슬픔을 당의 시인 두보(杜甫)는 이렇게 읊었다.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가! 저 청해 부근에서는 예로부터 백골을 치우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망령은 한이 맺혀 몸부림치고, 오래된 망령은 울부짖으며, 하늘이 구름비로 축축해질 때 그 목소리는 흑- 흑- 울고 있다. 그 목소리는 흑- 흑- 울고 있다.”
패장들은 죄인이 됐다. 당 조정에서 대사헌 악언위(彦瑋)가 진상을 조사했다. 설인귀와 두 명의 패장은 결박돼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군들을 태운 수레가 나타나자 당나라 군대가 패배했고 실크로드가 토번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토번의 등장에 당의 독무대 사라져
당고종에게 패전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었다. 아버지 당태종이 이뤄놓았던 실크로드 경영권을 아들이 상실했다. 정관(貞觀)의 치로 칭송받던 위대한 황제의 권좌가 그 같은 능력이 결여된 자식에게 계승됐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된 것이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 동로마제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이 길을 거쳐서 중국을 왕래했으며, 필연적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장악과 경영은 그야말로 당의 대외정책 우선순위에 있었다. 향후 당은 주력을 서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비천의 전투는 통상로인 실크로드를 놓고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 벌어진 150년 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이 시장을 지향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670년 토번의 실크로드 장악은 당시 세계체제에서 당이 누렸던 독무대의 막이 내려졌음을 입증했다. 힘의 축이 당에서 토번으로 옮겨갔고, 토번의 향배에 따라 당시의 상황이 좌우될 터였다. 당과의 전쟁을 결정했던 신라 수뇌부의 상황 논리를 도식화해 보자. 신라는 당태종이 약속한 평양 이남의 땅을 당으로부터 획득해야 한다는 선명한 목적이 있었다. 신라 수뇌부는 서역에서 당과 토번의 전쟁이 격화되는 유리한 상황에서 당과 전쟁을 해야 신라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역의 정세 변화는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여기서 국제정세의 판을 읽고 당과 전쟁을 결정했던 신라인들의 결단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숨기면서 기상의 변화를 기다리는 능력은 그들의 본성이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전쟁 초기부터 당은 부당한 처사를 계속 자행했다. 663년 4월에 신라 영토에 계림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고, 664년에 부여륭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해 그 이듬해 신라에 백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회맹할 것을 강요했다. 신라는 당에 책 잡히지 않고 여기에 철저히 순응했으며, 모욕에도 인내하고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응시하던 신라인들은 폭풍이 서역 상공에 떠있고, 토번이 그 폭풍의 눈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당에 순종적이었던 신라는 단숨에 태도를 바꿨다. 당의 힘이 한반도에 미치지 못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덤벼들었던 것이다. 가장 힘 있고 노련한 세계제국 당조차도 기만할 수 있는 인내의 탁월함은 무서울 정도다.
●신라 병력 보충에 골몰
당나라는 직후 토번에 대해 미봉적 자세로 돌아섰다. 같은 해 9월 좌상(左相) 강각(姜恪)을 양주도행군총관(?州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해 토번을 방어(御)하게 했고, 더 이상의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또 그해와 그 이듬해 전반까지 한반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한반도와 토번 두 전선을 동시에 대응하는 데 따른 군사적 부담을 감안한 숨고르기를 해야 했다. 당이 충격을 받고 비틀거릴 때 신라는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인적자원의 고갈이 한계에 달했다. 그것은 대당전쟁 수행에 중대한 위협이요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됐다. 징발하거나 동원할 인적자원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은 더 이상 어려워질 수도 없는 상황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평왕 25년(602) 이후부터 고구려·백제의 양면공격을 본격적으로 받으면서 수많은 전사자가 나왔고, 인적자원의 정선도가 하강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통일전쟁은 그것을 심화시켰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 조에 있는 ‘답설인귀서’에서 인력이 소모됐음을 고백하고 있다. “신라 군사들이 모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정벌을 시작한 지 9년이 이미 지나 인력은 소진되었다.” 투항해 온 고구려인들이 있었지만 부족했다. 신라는 대당전쟁에 동원할 인적자원을 보충하는 데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고, 별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자 신라에 가장 적대적이던 백제인들에게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간사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 알림 지면 관계상 본 기획물을 9면에 옮겨 게재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화요일자 12면에 게재되며, 이달 마주막 주 화요일에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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