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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전투 강한 唐에 참패 석문에서 쓴 눈물 삼키다

기사입력 2014.07.14 18:03 

 

<115> 신라 전면전 첫 패배


671년 10월 대동강에서 당 보급선을 격침시킨 결과 얻어낸 근 1년간의 전쟁 소강 상태는 신라가 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제적 상황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이 절호의 기회가 되고 가뭄에 단비일 수도 있었지만 치명적일 때도 있었다.


674년 나당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시기에 신라 문무왕이 조성한 안압지. 전쟁으로 청춘을 보낸 문무왕은 지친 마음을 안압지를 바라보며 달랬을 것이다. 필자 제공 


토번ㆍ당의 평화사절 교환


672년 4월 9일 토번 섭정 친링(欽陵)이 평화사절단을 장안에 보냈다. 당 고종은 토번 사절 중종(仲琮)을 만났다. 황제는 자제심을 잃고 그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황상이 (토번은) 토욕혼을 삼켜 없애고, 설인귀(11만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서역으로 가는 길목인 하서회랑의) 양주(凉州)를 침략해 압박한 일을 힐난(詰難)했다. (그러자 토번의 사절이 대답했다) 신은 명령을 받고 공물을 바칠 뿐이며, 군사에 관한 일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토번의 사절은 노련했다. 당 고종은 병력 11만을 잃고 당장 토번과 정면 대결을 할 마음이 없었다. 토번이 평화의 손짓을 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나았다. 동쪽 한반도에서 신라와 전쟁 중이었다. 황제는 토번에 평화사절을 파견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황상이 그(토번 사절)에게 후하게 주어서 보냈다. (7월 22일) 황인소(黃仁素)를 파견하여 토번에 사자로 가게 하였다.”


672년 7월에 당의 군대가 평양 지역으로 밀려왔다.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 이근행이 3만 명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했다. 그 군대는 중국인 보병 1만과 말갈 기병 3만이 결합된 무서운 군대였다. 먼저 고구려인들이 지키고 있는 평양 부근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함락시키고 점령했다. 그리고 황해도로 전진했다. 하지만 신라군이 장창보병 사단을 만들어 조련시켜 놓은 줄은 몰랐다. 황해도 들판 석문에서 신라 군대는 당군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신라 석문전투 참패


첫 전투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전한다. “당군이 석문들에 주둔하니 신라는 대방들에 군영을 설치하여 방어했는데 이때 장창당만이 따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나라 군사 3000명을 만나 그들을 잡아서 장군의 군영으로 보냈다.” 최초의 승리는 신라군에 돌아갔다. 신라의 장창당이 선전해 당군 3000명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가 그 존재를 인지하고부터 달라졌다.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평양 부근의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군영(軍營)을 설치했다. 백수성에 주둔한 고구려인들이 당군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몰려 있었다. 신라군이 이를 구원하러 왔다. 신라군은 백수성과 500보 떨어진 지점에 군영을 설치하고 있는 당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수천을 참수했다. 이 승리로 신라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고간이 후퇴하자 신라군은 석문까지 추격했다. 신라 원군이 백수성 안의 고구려 병력과 합쳐지면 전력이 강해지며 당의 백수성 함락은 어려워진다. 고간은 672년 8월 신라군을 석문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전투를 이렇게 전한다. “고간이 철수하자 (신라군이) 석문까지 뒤쫓아가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해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ㆍ산세, 아찬 능신ㆍ두선, 일길찬 아나함ㆍ양신 등이 죽었다.” 당군은 신라군이 진(陣)을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동요한 신라군을 살육했다. 그 장면은 다음과 같이 상상된다. “신라군은 혼란에 빠진 짐승 무리와 같았고, 당군은 그들을 양 떼처럼 몰고 다녔다. 당군은 신라군을 다루기 쉬운 구역 안으로 몰아넣었고, 돌아쳐서 도망치게 했으며, 신라군의 주력을 고립시키고 그중 우두머리를 정확히 찾아내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효천을 비롯한 6명의 장군들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신라는 짧은 순간에 대규모의 병력을 잃었다. 당군과 평지에서 정면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음이 증명됐다.


진법을 훈련받은 중국인과 기마술에 뛰어난 말갈인이 절묘하게 결합된 막강한 당군을 정규전에서 당해낼 수 없었다. 당의 수뇌부는 일찍이 북방 유목민족과 농경민 한족의 확연히 다른 습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에 연유하는 군사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전투에 있어 각자가 지닌 특징을 살려냈다. ‘삼국사기’ 권43, 김유신전에는 672년의 패배 후 수심에 찬 신문왕과 김유신의 대화가 보인다. “군사의 실패가 이러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기 요소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


신라군도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한반도 내부에서였다. 나당동맹 이후 양국이 연합작전을 함으로써 당군에 대한 정보가 축적됐다고 하더라도 평지전투에서 진법 운영기술은 상대가 되지 못한다. 기병이 수적ㆍ질적으로 월등했던 당군의 전술은 확실히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석문전투 패전으로 초유의 강대국 당과 전쟁을 치르는 데 대한 신라인들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천산북로의 전운과 한반도 전쟁 소강


수많은 전사자를 낸 석문전투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 전체가 불안감에 휩싸였고,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더 큰 재앙이 닥쳐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신라인들의 머리를 짓눌렀고, 이미 죽은 줄로 알았던 소수의 패잔병들이 귀향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으리라. ‘삼국사기’는 패잔병들 속에 자신의 아들 원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굴욕을 느끼는 김유신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은 평생 부하들에게 죽음을 강요했는데 아들이 살아왔다.


석문의 패전은 신라에게 자기 변신을 강요했다. 하지만 당장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치통감’ 672년 12월 조는 이렇게 전한다. “고간이 고려의 남은 무리들과 백수산에서 싸워서 이들을 격파했다. 신라에서 군사를 파견해 고려를 구원하니 고간이 이를 쳐서 깨뜨렸다.” ‘자치통감’ 673년 5월 조를 보면 말갈군 대장 이근행이 호로하(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을 격파했다. 그해 겨울 당군이 황해도 금천의 우장성을 함락시켰고, 말갈ㆍ거란군이 강원도 금강군 현리의 대양성과 김포의 동자성을 함락시켰다. 아무런 구원의 손길을 받아 보지 못하고 성들은 무너져 갔다.


그런데 673년 말 신라가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자 674년 1월 당 고종은 신라 침공을 중단했다. 이는 전년인 672년 9월에 사죄사를 파견해 막대한 공물을 바쳤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과 상반된다. 도대체 당 고종의 심경 변화는 어디서 기인했다는 말인가. 당시 당 고종의 관심은 온통 서역에 가 있었다. 673년 12월부터 토번이 다시 실크로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670년 토번에 천산남로를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타림분지를 경유하지 않는 천산산맥 이북의 루트를 개발했다. 장안-옥문-하미-우루무치-준가리아 분지와 발하시호 부근의 일리(Ili)계곡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천산 지역에서의 전쟁 발발은 당에 토번의 위협을 피해 북으로 돌아가는 가늘게 연결된 길마저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를 주었다. 천산북로의 단절은 당에 치명적이다.


천산 지역의 전운(戰雲)은 당의 대신라전쟁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674년의 전쟁 소강은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에 반영돼 있다. “(문무왕 14년) 2월에 (문무왕이)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전쟁 중에 문무왕이 궁궐에 호화판 정원 연못 안압지(雁鴨池)를 만드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신라는 당시 당 고종이 당면한 천산북로 방어 문제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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