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722/1/BBSMSTR_000000010227/view.do
唐 보급선단 격침 ‘천성해전’ 승리가 매초성에선 말갈군대 말 버리며 퇴각
기사입력 2014.07.21 16:27
<116> 천성전투와 매초성전투
매초성 부근 세 번 패배… 겨울 오자 열여덟 번 싸움 모두 이겨
천성전투서 보급로 차단 성공, 굶주림 불안감에 저항 없이 철수
파주 오도성산성(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우측이 임진강이고 좌측이 한강이다. 675년 9월 두 개의 수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서 신라는 당 보급선단을 격침시켰다. 이는 매초성에서 당군이 물러나게 하는 결정타가 됐다.
강자인 당은 선택권이 있었다. 전쟁을 지속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전쟁의 승패도 당의 국가 존속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반대로 신라인들에게 패배는 국가의 종말을 의미했다. 나당전쟁은 쉼 없이 지속된 것이 아니었다. 강자인 당이 처한 형편에 따라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고 재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가 전쟁을 잠시 중단시키는 독립변수가 된 적은 있었다. 671년 10월 신라가 대동강 입구에서 당의 보급선단을 격침시키면서 당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 10개월의 짧은 소강이 찾아왔다. 짧은 평화는 약자인 신라인들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실크로드를 놓고 당과 토번(吐蕃) 사이에 전운이 감돌 때도 그러했다. 674년 1년 동안 신라는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토번과 당의 평화협정과 당군의 남하
675년 1월 토번의 사절단이 장안에 도착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봄 정월에 토번에서 그 대신(其大臣)인 논토혼미(論吐渾彌)를 보내와서 화의하기를 청하였다.” 토번이 장안에서 평화회담을 진행시키려 하니 서역에 한시적인 평화가 도래할 터였다. 그러자 당고종은 요서에 있는 당군대에 신라 출병을 명하였다.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남하해 칠중성을 장악하였다. 칠중성은 배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지점과 인접해 있다. 칠중성에서 임진강 건너 맞은편에 있는 호로고루성 부근의 고랑포(高浪浦)는 일제시대까지도 서해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수로와 임진강을 도하하는 육로가 만나는 요충지였다.
‘자치통감’ 675년 2월 조는 이렇게 전한다. “2월 유인궤가 신라군을 칠중성에서 대파했다. 또 말갈(靺鞨)을 시켜 바다를 통해 신라의 남경(南境)을 공략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신라 무리(衆)가 많았다.” 임진강 유역은 전쟁터가 됐다. 유인궤가 이끄는 병력이 육로로 남하했다면 말갈 군대는 배를 타고 왔다. 이때 말갈 수군이 경략한 ‘신라남경’은 당군의 입장에서 신라와 전선을 접한 최남단 임진강 유역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말갈 수군은 북에서 비스듬히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 하류의 양안을 장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에 안전한 길을 열어 바다에서 칠중성으로 인력과 물자를 이동시키기 위한 전투를 했다.
●말갈군 양주의 매초성 장악
말갈군을 이끈 자는 돌지계(突地稽)의 아들 이근행(李勤行)이었다. 이근행의 부(父)는 수나라 때 투항해 당초(唐初) 영주(營州)에 자리 잡은 속말말갈의 추장이었다. 이근행은 칠중성에 상륙했고, 그곳에서 병력을 출동시켜 남쪽 양주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매초성(買肖城)을 장악했다. 요서와 만주에서 말갈·거란의 기병 후속 병력이 계속 남하해 왔고, 그 병력은 가을에 가서는 20만에 달했다. 이근행은 향후 한강 하류 유역을 향해 군대를 움직이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신라는 주장성(晝長城·남한산성)에 본부를 두고 한강 이북의 병력을 지휘해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672년 신라는 중앙군이 대거 참전한 황해도 석문전투의 재앙적인 패배 후 당군이 임진강 선을 돌파해 한강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준비로 현 남한산성 자리에 주장성을 신축했다.
이근행이 매초성을 장악하고 남하 준비를 마친 직후 유인궤는 중국인 병력을 이끌고 귀국했다.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에 임명된 이근행이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이 됐고, 그의 말갈군대가 신라와 전쟁을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인궤(仁軌)는 (중국인)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황제가) 조(詔)를 내려 이근행으로 하여금 안동진무대사로 삼고 매초성에 주둔해 신라를 경략(經略)하게 했다.”
대규모 신라군이 양주분지로 밀려왔고, 매초성 부근에서 세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신당서’ 신라전은 그 결과를 이렇게 전한다. “(당)고종이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소성에 주둔시켰는데, 세 번을 싸워 그때마다 신라군()을 패배시켰다.” 신라군은 매초성을 함락하는 데 세 번 실패했다. 하지만 신라군은 양주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밀리면 말갈·거란 기병이 의정부~상계동~하계동~광장동을 지나 한강을 도하할 터였다.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리라. 전투는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신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을 벌여 모두 이겼는데 6047명의 목을 베었고 말 200필을 얻었다.”
●천성에서 당보급함대 격침
675년 9월 당나라의 함대가 보급을 위해 김포북부의 바다로 들어왔다. 그해 겨울을 넘기기 위해서는 말갈군은 물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천성(泉城)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한성백제기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 도미(都彌)전을 보면 개로왕은 도미를 봉사로 만들어 한성(漢城)에서 배를 태워 보냈고, 그는 천성도(泉城島)에 도착했다고 한다. 경기 파주의 교하는 옛 지명이 ‘천정구(泉井口)’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여기에 ‘오도성산성(烏島城山城)’이 있는데 천성(泉城)은 바로 이곳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천성을 함락시키지 않고서는 원활한 보급을 할 수 없었고, 향후 한강하류로 진출하기도 어려웠다.
오도성산성(천성)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곡릉천(曲陵川)’이 있다. 김포반도를 정서(正西)로 바라보고 흐르는 그곳에서 신라함대가 당나라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675년 9월 어느 날 천성(오도산성)에서 적함대가 관측됐다는 신호가 왔고, 신라함대가 출동을 했다. 서해를 횡단한 당 함대에는 물자와 전마(戰馬)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육중한 함대에 가볍고 빠른 신라의 작은 배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신라군이 당나라 배들의 갑판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올라갔다.
워낙 숫자가 많고 동시다발적이라 당군은 기어 올라오는 신라군을 막지 못했다. 징발돼 신라에 온 당나라 수군과 자신의 조국과 가족을 위해 싸우는 신라인들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당나라 선발 함대의 여러 배에 불길이 치솟았다. 1400명의 당나라군이 여기서 전사했다. 불타지 않은 배 40척이 신라 수군의 손에 들어갔고, 배에 실려있던 전마 1000필을 노획했다. 살아남은 당나라 배들은 도주했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9월 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군이) 천성(泉城)을 쳐들어 왔다. 우리 장군 문훈(文訓) 등이 맞아 싸워 이겨서 1400명을 목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감에 따라 말 1000필을 얻었다.”
천성에서 설인귀의 보급선단이 격침됐다는 소식이 매소성에 전해졌다. 겨울이 다가왔는데 차후 보급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굶어야 한다는 불안감은 말갈군단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매초성의 20만 말갈군대를 무너지게 했다. 그들은 저항도 없이 말을 버리고 퇴각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75년) 9월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해 쫓고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그밖에 병기도 이만큼 됐다.” 이 중요한 전투에서 신라군이 말갈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전사자에 대한 기록도 없다. 말도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고, 병력이 많을수록 보급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천성해전 승리가 매초성에서 이근행의 말갈군대를 물러나게 했다.
그런데 ‘구당서’ 말갈전을 보면 “(이근행이)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가 되었고, … 상원 3년(676)에 또 토번 수만군대(吐蕃數萬衆)를 청해에서(於靑海) 격파했다”라고 한다. 676년 이근행이 청해에서 토번군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갈군대가 한반도에서 청해로 이동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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