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40729/1/BBSMSTR_000000010227/view.do


<117·끝> 나당전쟁의 여진(餘震)


나당 전쟁 후 25년간 양국 신경전, 신문왕에게 사신 보낸 당고종  태종무열왕 추존명 개칭하라 협박

‘당의 재침’이라는 공포감 술렁, 전쟁 재발 두려워하는 진골귀족 하나로 모아 결사항전의 길 선택


신라궁정인 반월성 계림 앞의 건물터. 이곳이 신라의 종묘였다고 보는 설대로라면 태종무열왕도 이곳에 모셔졌을 수 있다. 신라의 왕들은 매일 이곳에 들려 기쁜 일은 알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위로를 구하는 등 조상과 대화를 나누고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필자 제공


나당전쟁(670∼676년)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전쟁 이후를 평화기로 상정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놓고 본 것이다. 나당전쟁 후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후(戰後)에 바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후세의 관점만 내세우면 잘못 판단하기 쉽다. 결과에 부합하는 원인만을 찾기 때문이다. 거의 25년에 걸쳐 신라 조정과 당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세계 최강국 당이 신라 조정에 가한 압력으로 상당 시간 신라 전체가 떨었고 두려워했다. 지진(地震)은 항상 여진(餘震)을 남기며 처음보다 더 거대한 여진이 밀려올 수도 있다.


전후(戰後) 세계 최강국, 당


어느 시대든 그 당시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후세에 와서 돌이켜 보면 이미 다 결판이 난 사실들, 역사적 사실이나 역사적 현상들은 모두가 다 명쾌해진다. 후세 사람들이 보면 명백한 일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강국 당과의 전쟁,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는 공포였다. 신라가 당과 싸워 승리했고, 그 후에 신라인들이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지금의 시각이다. 전쟁 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당의 황제이지 신라의 국왕이 아니었다.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해 당고종이 총공세를 가하려 했을 때 나당전쟁은 휴전 상태로 돌입했다. 그 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서역으로 이동해 청해의 대토번전선에 투입됐다. 하지만, 토번이 평정된다면 당이 이끄는 말갈군대는 신라로 그 기수를 돌릴 수도 있다. ‘자치통감’ 678년 9월 조를 보면 당고종이 신라를 재침하려 했지만 토번과의 전쟁이 시급하기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당나라의 외압과 분열공작 679년에 가서 문성공주(文成公主)의 노력으로 당과 토번의 평화협상이 재개됐고, 681년에 당은 동돌궐의 반란을 진압했다. 당고종은 신라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문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즉위한 그해 당고종은 사신을 보내 신문왕에게 조부 태종무열왕 김춘추 추존명을 개칭하라고 협박했다. 당태종의 추존명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압력은 신라에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하나는 ‘태종’이란 추존명을 거두고 당에 굴욕적인 외교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사항쟁을 각오하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란 이름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전자를 택하자면 신라 내부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선덕여왕 폐위를 결의한 화백의 권위를 무력으로 뒤엎고 정권을 장악한 후 신라사회를 통일전쟁이란 국제전에 끌어들인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의 추존명 개칭은 중대 왕권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이는 통일전쟁에서 왕의 이름으로 사라져 간 자들의 희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살아 있는 자들의 충성을 감퇴시킨다.


후자를 택하면 세계 최강의 당과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신문왕은 자신의 왕국을 무력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당 제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에 굴복해 중대 왕실의 창건자 태종의 칭호를 개칭하고서는 진골 귀족사회 내부에서 무열왕가의 카리스마 상실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이 시기에 내분은 공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것에 대한 철저한 단속과 탄압은 자연스러운 귀착이 된다. 신문왕 원년(681)에 김군관(軍官) 등 최고위 귀족들이 연루된 장인 김흠돌(欽突)의 반란이 있었다. 당의 분열공작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돼 신속히 정리됐다. 진골귀족의 대부분은 신라 정권의 중심에 통일을 이룩한 무열계의 왕실을 지속시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그들 사이에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다. 통일 직후 당의 재침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진골 사이의 내분과 새로운 계통의 왕권 등장은 진골 귀족사회의 불확실한 미래를 의미했다.


신문왕 분산된 두려움을 하나로 압착


그렇더라도 김흠돌의 반란은 중대 무열계 왕권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불안케 하는 독소가 진골 귀족사회에 분명히 존재했음을 말해 준다. 그 독소란 아직 너무나 젊은 세계 대제국 당과의 대결에서 진골귀족들이 갖고 있던 무력감(無力感)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태종무열왕의 추존명을 개칭하라는 당고종의 칙령을 갖고 온 당의 사신이 다녀간 시점과 김흠돌의 반란이 모두 신문왕 원년(681)에 일어난 것으로 너무나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당전쟁을 직접 지휘한 문무왕의 죽음과 경험 없는 아들의 즉위, 그리고 이 시기에 밀어닥친 당고종의 외압은 신라의 조야를 당의 재침이라는 공포감에 술렁이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장인 김흠돌의 반란은 신문왕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겨 놓았지만, 그에게 내부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부여했다. 신문왕은 진골 귀족사회에 퍼져 있는 독소를 어떻게든 해독해야 했다. 독소를 인공적으로 증류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여러 가지 힘을 압착하면 치유의 힘이 생기게 된다. 신문왕은 진골귀족들이 갖고 있는 당에 대한 분산된 두려움을 하나로 모아 결사항쟁의 구호를 내걸어야 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패전은 모든 진골귀족들이 당에 끌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항복한다고 해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다. 당에 대한 공포와 의심의 범위를 넓혀야 하고 당의 재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켜 당과 전쟁을 경험한 대부분의 고위직 진골귀족들에게 불안감과 압박감을 가중시켜야 한다.


사실 패전 후 백제와 고구려 귀족들이 당에 끌려가 모든 것을 잃고 당태종의 소릉에 승전의 제물로 바쳐지는 불운한 말로를 진골귀족들은 목도하거나 들은 바 있다. 신문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 재발에 대한 우려를 하나의 의지로 모아 압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 당의 압력에 의한 태종무열왕 칭호의 개칭은 무열왕가의 간판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신문왕은 당고종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당과 결사항전의 길을 택했다.


신라사회 전쟁의 여진(餘震)에 몸살


신문왕대에 이뤄진 급진적인 군비 확장은 이를 말하고 있다. 적금무당·황금무당을 중앙에 설치하고 삼변수 3개 부대를 조직해 북변의 방어를 강화했으며, 대기병 방어체제의 보강을 위한 개지극당을 창설했다. 무엇보다 중앙군단 구서당(九誓幢)의 완성은 거대한 군비 증강이었다. 신문왕 당대 5년간 백제인·고구려인·말갈인으로 구성된 5개 부대(黃衿·黑衿·赤衿·碧衿·靑衿誓幢)의 증설은 군관 숫자만을 놓고 보더라도 신라의 주력이었던 육정(六停) 군단과 맞먹는 규모다.


직후 녹읍 혁파가 단행됐다. 귀족들에게 지급된 토지와 인간조직을 해체해 국가 주도의 토지·인력 수취 시스템을 확립했던 것이다. 구서당의 경우 그 병력의 3분의 2가 왕경에 전혀 연고지가 없는 비신라인이다. 그 부양에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 확실하다. 대외적인 위기감이 없는 상태에서 거대한 군대를 운영하기 위한 진골귀족의 경제적 희생 감수란 상상할 수 없다. 676년 이후 25년간 지속된 당과의 군사적 긴장감은 신라에 전쟁을 대비케 했고, 앞서 전시에 가동된 시스템을 전후(戰後)에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통일을 달성한 후 무열왕권의 권위가 상승했고 왕권이 강화됐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을 했다기보다는 전쟁 재발에 대한 전 신라사회의 우려가 무열왕권에게 힘을 실어 줬던 것이다. 나당전쟁의 여진(餘震)은 권력이 진골집단지도 체제인 화백(和白)에서 왕권(王權)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묵직한 저울추가 됐다. 현대 한국의 모체인 통일신라 탄생기에 국가는 종교였고 군인들은 그 제단을 지키는 사제였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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