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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연구가]“출세를 위해 아부 ·아첨은 안한다”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박종평 이순신 이야기34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48호] 승인 2014.06.02 12:00:45
조선 중기의 문신 최유해(崔有海)가 쓴 <충무공 이순신 행장(行狀)>에는 출세(出世), 즉 세상에서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순신의 마음을 전하는 글귀가 있다. “丈夫生世(장부생세), 用則效死以忠(용즉효사이충), 不用則耕野足矣(불용즉경야족의), 若媚要人竊浮榮(약미요인절부영), 吾恥也(오치야).” 그 뜻은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 일을 위해 쓰여지게 되면 자신의 일에 죽을 힘을 다해 충심을 다할 것이고, 쓰여지지 않는다면 들판을 갈며 살아도 만족할 것이다. 세상의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뜬 구름같은 부귀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수치”라는 것이다.
이순신의 출세(出世)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출세, 즉 부귀영화와 높은 자리를 뜻하지 않는다. 세상 일을 제대로, 진심을 다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출세를 위해 아부하고 아첨하지는 않는다. 인재를 몰라주는 세상에서 출세는 결국 아부와 아첨 밖에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방식의 출세는 결국 세상 일이나 세상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위해 일할 수밖에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살려고 했다.
이순신의 출세관은 다른 한편으로 아첨꾼을 극도로 비판하는 이유도 된다. 그의 일기에는 아부로 출세한 사람들, 무능하고 무책임한 높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한탄이 나온다.
1597년 8월 12일. 맑았다. 배설(경상 우수사)이 겁내고 피하려던 모습을 들으니 더욱 더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권력가에게 알랑거려 감당할 수도 없으면서 분에 넘치는 자리까지 차지해 나랏일을 크게 잘못되게 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를 반성하여 살피지도 않는다. 어찌 하겠는가.
이 날 일기는 7월에 있었던 칠천량 전투과 관련된다.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일본군과의 전투중 도망쳤다. 불가피한 전투였지만 경계에 실패했고, 최고 지도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조선 수군은 그 12척 외에 전부 바다에 가라앉았다. 배설도 최고 지도부의 한 명이었다. 배설은 전투중 도망쳤다. 자신과 함께 했던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를 남겨두고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하며 결국 전투중 몰래 도망쳤다. 그런 겁쟁이 지도자였지만, 조정에서는 그를 경상 우수사에 임명했었다. 인재인지 아닌지도 판단하지 않은 채 조정에서는 아첨꾼을 리더로 임명했다. 최악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배설을 임명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눈 먼 조정의 리더들을 “어찌 하겠는가”라며 한탄했다.
아첨꾼에 놀아난 선조
또 얼마 후인 9월에는 패전한 수군을 재정비하던 이순신에게 기막힌 일이 일어난다.
1597년 9월 8일. 맑았다.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萬戶) 정도 수준이라 수사(水師)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 그런데도 좌의정 김응남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함부로 임명해 보냈다. 이래서 어디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만 한탄할 뿐이다(可謂朝廷有人乎 只恨時之不遭也).
능력에 걸맞지 않는 자리에 김억추가 임명되었다. 김억추는 이순신의 일기 기록처럼 좌의정 김응남과 친밀한 관게였다. 김응남이 체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그 막하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선조실록》에는 김억추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몇 차례 나온다. 1592년 8월3일 기록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일본군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후퇴해 도망쳤고 헛말로 장황하게 거짓 보고를 하고 군대의 인심을 요동시켜 멀고 가까운 곳을 매우 놀라게 했다”고 한다.
1594년 3월7일의 기록에는 “더구나 김억추가 범한 것은 소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사가 혹은 추문하여 사실을 알아내고 혹은 현장을 잡아 알아낸지라, 의심할 것이 없으니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며 사헌부와 사간원이 김억추의 파직을 건의했다. 1594년 8월 4일의 기록에는 사간원에서 “만포 첨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탐오해서 전에 수령이 되었을 때 오로지 사욕을 채우기만을 일삼았습니다”라며 해직을 건의했다.
1595년 7월4일 기록에는 사헌부가 “진주 목사 김억추는 학식도 없고 또한 재간도 없으니 이 사람에게 번거로운 일을 다스리고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라고 했다. 1596년 5월25일 기록에는 사간원이 고령 첨사 김억추의 파직을 건의했다. 1592년부터 1596년의 실록 기록에서는 사헌부․사간원에서 김억추의 무능 혹은 탐욕 등을 끊임없이 문제제기한 모습이다. 그러나 어찌된 이유인지 김억추는 다양한 관직을 끊임없이 받았다. 부정적인 평가로 파직되었지만, 새로운 관직에 계속 임명되었다.
게다가 칠천량에서 수군이 전멸한 그 때, 조정은 또 다시 그런 김억추를 칠천량에서 전사한 이억기 장군 대신 전라 우수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으로서는 황당한 임명이었다. 무능해도, 자격이 없어도, 백성들의 고혈을 짜도,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여 있어도, 높은 사람들과 친하면 그만이 인사정책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래서 어디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만 한탄할 뿐이다”라며 가슴을 쳤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
이순신의 말이 맞다. “조정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사람을 다스렸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선발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존(至尊)인 임금 선조이다. 그 선조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도망쳤던 인물이다. 도망치던 선조는 의주에 도착한 뒤 <누가 곽자의와 이광필처럼 충성할까(誰能郭李忠)>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에는 당나라의 충신 곽자의와 이광필과 같은 충신이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신하여! 오늘 이후에도 또 다시 서인(西)․동인(東)으로 나뉘어 여전히 싸우려느냐!”고 신하들을 비판했다.
선조는 남의 나라의 먼 옛날 충신을 그리워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발 밑에서는 간신과 아첨꾼에 속아 충신을 멀리하고, 심지어 김덕령과 같은 의병장을 의심하며 죽였고, 이순신을 죽이려 했다. 또 서인과 동인의 당파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리더 선조는 자신의 탓보다 남 탓, 신하 탓만 했다.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나라가 망해가도 그는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불의한 인사 정책에 이순신은 “조정의 일과 명나라 군사들이 하는 짓을 들으니 가슴이 찢어졌다(1593년 5월 14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세상에 나온 이상, 나라가 부른 이상 그는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 한탄하고 분노했지만,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나라였고, 경각에 달린 백성의 목숨이 눈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이 칼럼은 <그느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9스타북스,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 보완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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