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절치부심은 목숨을 던지는 것”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38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52호] 승인 2014.06.30 15:44:48
절치부심의 결과물 ‘거북선’
창으로 베개를 삼고 잔다
베이비 붐 세대의 퇴직 시점이 다가오면서 불가피하게 창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러나 작은 가게든 규모 있는 회사든 창업은 가시밭길의 시작이다. 게다가 기존에 이미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경제위기로 어렵긴 마찬가지다. 누군나 창업을 할 수 있지만, 수성을 하며 살아남는 것은 더 어렵다. 창업 이후의 생존율이 이를 증명한다. 중소기업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에 창업한 중소기업의 6년 생존율은 31%였다. KDI 조사에서도 중소기업의 10년 이상 생존율은 13%였다. 또 생존한 중소기업이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는 1만 개 중 한 곳에 불과했다. 재벌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1백대 기업의 생존율도 16%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의 신화를 쓴 사례도 많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쫓겨난 뒤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다시 도전해 아이팟ㆍ아이패드·아이폰을 만들어내 세계사를 바꿨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이다.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후 10년 동안 내우외환속에서 절치부심했고, 그 결과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절치부심은 “이를 갈고 마음을 썩였다”는 뜻의 고사성이다.
1999년 3월 취임한 정몽구회장은 “현대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발전시키겠다”고 취임 일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시 세계 자동차 업계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살아남을 자동차 기업이 5개 정도라는 전망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정 회장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10년을 준비했다. 그 후의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 경제잡지 《포춘》이 ‘속도위반 딱지를 떼야 한다’고 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5개 밖에 살아날 수 없다는 전망속의 살아남을 5개 자동차 기업의 하나가 되었다. 잡스와 정몽구 회장 모두 고통의 시간을 겪으면서 생존과 재도약을 위해 절치부심을 했기에 이룬 결실이다.
《난중일기》와 그의 보고서 모음집인 《임진장초》를 보면, 이순신이 절치부심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출전 계획을 보고한 장계에서는 일본군 침략에 대해 “몹시 원통해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다(憤膽如裂)며, 자신은 ”마음과 힘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씻겠다(竭心力 擬雪國家之恥)다고 했다.
유비무환은 절치부심에서
두 번째 올린 장계에서는 “분노가 가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에 사무쳤다(怒膽輪痛入骨髓)”며,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마음이 자나 깨나 간절합니다(一犯賊窟 忘身效力之衷 寤寐益切)”라고 했다.
계속된 조선군의 패전 소식과 일본군의 서울 점령 소식을 듣고는,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不堪垂淚 撫劍嗟)”하면서, “원하옵건대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합니다(願以一死爲期 直虎穴 掃盡妖欲雪國恥之萬一)”라고 했다. 그의 “오내(五內, 오장)가 찢어지는 듯 했고”, 심지어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 있다(心死形存)”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의 그런 고통과 슬픔, 분노와 한탄의 세월 동안 언제나 승리를 준비했다. 그 스스로도 “이를 갈고 마음을 썩였다”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을 이야기했다. 이순신의 절치부심의 결과는 불패로 나타났다.
절치부심은 본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자객열전〉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시황의 침략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즈음 진시황에게 죄를 짓고 수배된 진나라 장군 번어기(樊於期)가 연나라로 도망쳐 왔다. 진시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번어기의 망명을 불편해 했다. 그러나 태자 단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여 머물 수 있게 했다.
그럼에도 진나라의 위협은 현실이었기에 태자는 전전긍긍해야 했다. 때마침 위(衛)나라 사람인 자객 형가(荊軻)가 나타났다. 형가는 진시황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태자는 형가에게 진시황의 천하 통일을 막을 방법을 제안했다. 진시황에게 자객을 보내 협박해 진시황의 야심을 꺾되, 진시황이 협박에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죽이자는 것이다. 진시황을 미워하는 형가는 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문제는 진시황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형가에게는 진시황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진시황이 인정할 수 있는 제물이 필요했다. 형가는 진시황의 환심을 얻기 위해 진나라에서 도망쳐온 번어기의 목을 가져가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태자는 망명한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반대했다. 형가는 결국 직접 번여기를 만나 그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 때 번어기가 형가에게 말했다.
“이는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마음을 썩이고 벼르는 것이었소(切齒腐心).”
그 말을 마친 뒤 번어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갖고 진시황을 만났지만, 진시황을 협박하거나 죽이는 것 모두 실패했다. 번어기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고사성어인 절치부심이다. 그 후로 역사속의 많은 인물들이 시련을 겪거나 실패한 뒤 재도전을 할 때, 그들의 ‘절치부심’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며 하며 재기했다.
이순신 전승·불패 절치부심 결과
그러나 번어기의 절치부심과 이순신의 절치부심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번어기의 절치부심은 일이 벌어진 뒤에 생겨난 것이다. 역사속에서 절치부심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많은 이들도 실패와 패배 뒤에 절치부심을 한 사례이다. 반면에 이순신의 절치부심은 전쟁 전부터 가슴속에 담아둔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그는 절치부심하면서,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본군의 침략을 절치부심하면서 대비했다. 그가 전쟁대비를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거북선이 대표적인 절치부심의 결과물이다. 그가 절치부심하지 않았다면, 거북선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이 혹시라도 일어나랄까’가 아니라 ‘전쟁은 확실히 일어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라는 생각을 갖고 준비하는 사람과 ‘확실히’라는 생각을 갖고 대비하는 사람의 차이이다. ‘확실히’라는 생각을 했기에 절치부심할 수 있었고, ‘확실하게’ 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의 절치부심하는 모습은 그가 말했듯, “창으로 베개를 삼고 잔다(枕戈, 침과)”는 그의 표현에서도 만날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창을 베게로 삼아 잠을 잘 정도였다. 리더가 창을 베게로 삼고 살았기에 그의 부하들도 그의 모습을 본받아 일본군의 기습을 항상 격퇴했다. 이순신의 전승(全勝)·불패(不敗)는 절치부심의 자세와 침과의 자세가 만든 것이다.
※ 본란 내용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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