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53182


고려 망하게 한 공민왕, 선택 서둘렀더라면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짝패>, 네 번째 이야기

11.04.18 14:00 l 최종 업데이트 11.04.18 17:51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짝패>에서 '아래'의 수장인 강 포수(권오중 분)와 달이(서현진 분). ⓒ MBC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MBC 드라마 <짝패>에는 '아래'라는 반체제 지하조직이 등장한다. 부패 관료와 조폭들을 혼내주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서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뒤, 거리에 대자보를 내걸어 자신들의 활동에 관한 '의정보고'를 하는 조직이다. 


물론 허구에 바탕을 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속 분위기만큼은 19세기 초중반 조선사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초반부터 조선왕조는 몰락을 향한 내리막길을 걸었고, 새로운 시스템을 향한 사회적 열망은 저항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대자보를 통해 불만을 표출하거나 저항조직을 만들어 민란을 일으키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1811년 홍경래의 민란은 그 같은 새로운 움직임의 신호탄이었다. 


1862년에는 70여 개 시·군·구(당시 표현은 군·현)에서 민란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했으니, 19세기 서민들이 새로운 사회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갈망이 집약적으로 분출된 것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정부군 단독으로는 동학농민군을 막아낼 길이 없어 일본군이 나서야 할 정도였으니,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서민들의 의지가 얼마나 절절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세기 초반에 형성되어, <짝패>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에 무르익고, 19세기 후반에 폭발한 조선 서민들의 혁신의지는 그처럼 강렬했다. 


그런데도 외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때문이다. '남'이 나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가 가진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우리 민족이 갖고 있었던 내부적 문제점 중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춰보자. 


▲  조선왕조의 중심부였던 서울 광화문 거리. ⓒ 김종성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차범근이 뛸 수 있나


차범근·허정무는 한국 축구의 영웅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대표선수가 되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책임질 수는 없다. 2014년에는 거기에 맞는 연령대의 선수들이 따로 있다. 적시에 이루어지는 대표팀 세대교체가 월드컵 성적을 좌우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축구대표팀뿐만 아니라 '정치대표팀' 즉 지배층에게도 세대교체는 매우 필수적이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적합한 선수들을 데리고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나갈 수 없듯이, 이미 노쇠해진 지배층을 데리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는 없다. 이를 증명하는 적절한 사례 세 가지가 있다. 


조선왕조와 관련하여 이 땅에서는 총 세 차례의 '월드컵' 즉 '격변'이 있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일어선 14세기 후반,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대 고비를 겪은 16세기 후반, 조선이 온 사방으로부터 얻어맞은 19세기 후반에 그 같은 격변이 있었다. 


14세기 후반과 19세기 후반의 월드컵은 기존 왕조의 멸망을 초래했고, 16세기 후반의 월드컵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양쪽의 차이점을 규명할 수 있는 잣대가 있다. 그것은 '대표팀 세대교체'가 적시에 이루어졌느냐 여부다. 


슈퍼파워 몽골제국의 약체화 조짐이 뚜렷해진 14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1355년에는 백련교도와 미륵교도들이 중심이 된 홍건적이 몽골제국에 대항하여 일어섰고, 1363년에는 백련파의 주원장이 미륵파의 진우량을 꺾고 명나라 건국의 기틀을 확립한 뒤 1368년에 몽골제국을 북쪽으로 내쫓고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기존 대표팀을 갖고는 이런 격변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공민왕은 즉위(1351년) 몇 년 뒤부터 대표팀 세대교체를 본격 단행했다. 공민왕에 의해 수혈된 '젊은 피'는 이성계 군단과 신진사대부 그룹이었다.


사대부란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료를 말한다. 이런 관료들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공민왕이 발탁한 사대부들은 이전의 사대부들과 명확히 구별된다는 점에서 신진사대부라 불릴 만했다. 중소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이 다수를 점했다는 점, 인맥이 아닌 실력(과거시험 합격)을 통해 중앙정계에 진입했다는 점, 사회 시스템의 혁신을 갈망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이들은 공민왕의 집중 지원 속에 이성계 군단과 더불어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했다.


그런데 고려왕조는 이들을 수용할 만한, 아니 제어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새로운 세력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늙어 버렸던 것이다. 고려 정부군이 이성계 군단을 제어하지 못한 사실, 신진사대부의 상당수가 고려왕실보다는 이성계를 지지한 사실 등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성경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말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고려왕조는 이성계 군단과 신진사대부라는 '새 포도주'를 담기에는 '너무 낡은 가죽 부대'였다. 새로운 세력을 끌어안기에는 시스템이 너무 낡아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 때의 세대교체는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동아시아가 격변에 빠져들기 직전에 세대교체를 단행했으니, 다시 말해 월드컵 개막 직전에 세대교체를 단행했으니, 그것은 너무 때늦은 일이었다. 새로운 피의 수혈이 왕조를 살리기보다는 도리어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공민왕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공민왕 신당.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의 종묘 내부에 있다. ⓒ 김종성


홍길동과 조광조... 대표팀에 '젊은 피'를 수혈하다


조선왕조가 일본·청나라·서양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19세기 후반. 조선 내부에서는 지배층 세대교체를 위한 움직임이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기득권층 내부에서 새로운 '대표선수'들이 출현한 것으로서 갑신정변(1884년) 주체세력의 등장이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또 하나는 서민층에서 새로운 대표선수들이 출현한 것으로서 동학농민전쟁(1894년) 주체세력의 등장이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 흐름 역시 '때늦은 일'이었다. 1876년 개항으로 조선이 이미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된 뒤에 기득권층과 서민층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던 것이다.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대표팀 세대교체에 성공한 것과 비교해도, 1884년과 1894년의 현상은 너무 뒤늦은 것이었다. 게다가 갑신정변과 동학전쟁은 그나마도 실패하고 말았다. 세대교체 시도가 때늦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부활의 찬스를 살릴 수 없었다. 


14세기 후반과 19세기 후반에 비해, 16세기 후반은 아주 모범적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에 도전장을 던짐으로써 동아시아가 일대 격변에 빠진 임진왜란(1592~1599). 그 사건이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조선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의 흐름 역시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다. 먼저 나온 것은, 홍길동의 민란으로 대표되는 서민층의 도전이었다. 15세기 후반부터 조선왕조의 시스템이 삐거덕거리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년 1월 18일) <연산군일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지방 유지들 사이에서 홍길동 '광팬'들이 나타날 정도로 이 민란은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방 유지들 사이에서 홍길동 지지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홍길동은 새로운 대표팀의 주장이 되지 못했다. 그의 운동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세대교체 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다. 1500년 후반에 홍길동이 체포되고 나서 15년 뒤인 1515년에 홍길동 못지않은 기대주가 조선 정계에 전격 등장했다. 


기상천외한 발상, 뛰어난 학식과 언변, 탁월한 조직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34세의 조광조가 정계에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다. 과거시험 합격 3개월 만에 정국 핵심으로 부각됐으니, 조광조의 출현은 홍길동의 출현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광조는 사림세력(유림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표팀을 구성하고자 했다. 사림세력은 신진사대부와 유사한 외형을 띠었다. 유교적 교양의 보유, 중소 규모 부동산의 소유, 실력을 통한 권력 획득, 새로운 사회의 지향 등이 그러했다. 


조광조의 시도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것이 사림세력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림세력은 1519년에 조광조가 사약을 마신 이후로도 계속해서 정치투쟁을 벌여, 선조 즉위(1567년)와 함께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이·이황의 부각은 이 같은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었다. 훗날 붕당정치의 모순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사림세력의 정권장악은 아주 신선하고 유쾌한 사건이었다. 


▲  조광조의 위패를 모셔 놓은 도봉서원.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의 도봉산 산속에 있다. ⓒ 김종성


결과적으로 볼 때, 이때의 세대교체는 아주 적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새로운 지배층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25년 뒤인 1592년에 동아시아는 일대 격변에 빠졌다. 사림세력이 중앙·지방 양쪽에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굳힌 뒤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병 활동이 구한말에도 있었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은 성공적이었지만, 구한말의 그것은 그렇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일종의 민병대 활동인 의병 활동의 핵심은 민중 장악력이다. 지방 지배층이 지역민들을 얼마나 장악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달라진다. 16세기에는 사림세력이 향약운동 등을 통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견고히 했기에, 임진왜란 중에 지역민들을 동원해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구한말의 경우에는 과중한 조세나 지방관의 착취 등으로 지배층과 서민 사이의 유대감이 파괴될 대로 파괴된 뒤라 하층민들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배층 세대교체가 적시에 이루어졌고 새로운 지배층에 대한 서민들의 신뢰감이 존재할 때 임진왜란이 발생한 탓에, 지배층과 서민이 함께 뭉쳐 외세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의 월드컵에서 조선왕조가 위기를 면한 것은, 월드컵이 열리기 오래 전에 세대교체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새로운 지배층이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외부적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던 것이다. 


지배층을 제때 바꿔주는 일은 위와 같이 국가나 왕조의 존속에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놈'이 그놈이고 '새로운 놈'도 언젠가는 썩게 되겠지만, 지배층을 적시에 교체하면 국가나 왕조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은 더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적절한 시점의 지배층 교체는 우리 사회에 혼란이 아닌 활력을 부여한다.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바꿔주지 않으면, 사회는 훨씬 더 심각하게 썩고 만다. 


물론 지배층 교체가 아무 때나 마구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표팀이 다음 월드컵에 충분히 대비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대표팀 교체가 이루어지면 된다. 공민왕 때처럼 월드컵 개막 직전에, 구한말처럼 월드컵 개막 이후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세대교체는 국가나 왕조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아무리 한국축구의 영웅이라 하더라도 차범근·허정무를 주축으로 2014년을 준비할 수는 없다. 2014년에는 2014년에 맞는 대표팀이 따로 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지배층이 따로 있다. 새로운 지배층을 거부하면 국가나 왕조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는 '세대교체 시점'을 찾는 민족이 진정 지혜로운 민족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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