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9947
전하, 용변은 반드시 궁녀 앞에서 누셔야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편 조선왕궁의 화장실
11.03.21 16:33 l 최종 업데이트 11.03.21 16:33 l 김종성(qqqkim2000)
▲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출처는 고등학교 <세계사>. ⓒ 지학사
조선왕조와 동시대의 프랑스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이나 루브르 궁전에서는 WC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미리 용변을 봐둬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히 '대비'를 한다 해도, 궐 안에서 1시간 이상 머물다 보면 자연스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궁궐 출입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신적 긴장 때문에 화장실 생각이 더 많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프랑스 왕궁에서는, 정원에 배치된 조각상에 몸을 숨기고 볼일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조각상처럼 보이고 싶은 사람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포즈라도 취해야 했을 것이다.
프랑스 궁궐에는 화장실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의 궁전에도 화장실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대궐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궁에도 과연 화장실이 없었을까?
짐이 용무가 급하니, 나인은 어서 들라
▲ 경복궁의 중문(中門)인 흥례문. 광화문을 지나면 흥례문이 나온다. '예법(사회질서)을 흥하게 한다'는 뜻인 흥례(興禮)는 요즘 말로 하면 '국가기강 확립'이란 뜻이다. ⓒ 김종성
조선의 주상(왕의 공식 명칭)은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었다. 왕은 배에서 신호가 오면 복이나인을 불렀다. 복이나인(僕伊內人)은 대궐에서 조명·난방·청소 등을 담당하는 부서인 복이처에 속한 궁녀였다. 한글로는 '나인'이라 하고 한자로는 '內人'이라 한 것은, 궁녀를 가리키는 한자 '內人'이 '나인'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종을 의미하는 복(僕)자가 들어간 데서 알 수 있듯이, 복이나인은 온갖 잡일은 물론이고 '아주 불쾌한' 사무까지 처리해야 했다. 그것은 주상의 용변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청나라 선통제 부이(푸이)의 삶을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환관(내시)이 황제의 용변을 받는 장면이 나왔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궁녀가 주상의 용변을 받아냈다.
왕의 부름을 받은 복이나인은 '매우틀'이라는 나무 그릇을 갖고 달려왔다. 다른 경우는 몰라도, 이 경우만큼은 분명 황급히 달려왔을 것이다. 그가 들고 온 매우틀은 왕의 배설물인 매우(한자로는 梅花)를 담는 그릇이란 뜻이었다. 왕의 배설물을 매화에 빗대어 고상하게 표현하기 위해 '매우'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매우틀의 바닥에는 매추(풀이나 짚을 썬 것)를 깔았다. 왕이 거기에 '매우'를 뿌리면 복이나인은 매추로 그것을 가렸다. 매추가 위아래에서 '매우'를 감싸도록 한 것이다. 그런 다음, 복이나인은 그것을 들고 돌아갔다. 이번에는 달릴 필요가 없었다.
왕의 용변은 의원들이 '맛'을 본 뒤 처리
매우를 든 복이나인은 궁중 양호실(내의원)로 갔다. 의원들이 매우를 맛보고 왕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왕의 매우를 따로 받도록 한 것이다.
주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일일이 매우를 확인하면서까지 건강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여타 사람들은 궐 밖 사람들처럼 그냥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조선의 궁전에는 충분한 숫자의 화장실이 마련됐다. 일례로, 창덕궁의 경우에는 21개의 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크기도 다양해서, 보통은 1칸 크기였지만 어떤 것은 7칸 크기였다고 한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별궁)에 붙어 있는 화령전에서 전통 화장실의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화령전은 정조 임금의 초상화를 보관한 곳이다.
▲ 화령전의 화장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소재. ⓒ 김종성
임금들 중에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데서 자유롭게 용변을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을 동경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들이 '용변의 자유'를 꿈꾸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적으로 볼 때 왕권이 신권(臣權, 신하들의 권력)에 억눌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사생활도 극도로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 출신의 관료들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왕을 견제하고 기득권을 챙겼을 뿐만 아니라, 왕의 일거일동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왕이 궤도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양반 관료들은 하루에 한두 차례 열린 궁중 세미나(경연)에서 임금에게 "홀로(獨) 계실 때도 경건함(愼)을 잃지 말아야 한다"며 신독(愼獨)의 가치를 주입시켰다. 심지어 조광조 같은 인물은 하루에 세 차례씩이나 주입식 강의를 하면서 "며칠 전 세미나 때 책 읽는 것을 힘들어 하시던데,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며 중종 임금을 혹독하게 몰아세웠다. 조광조의 발언은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8.24) <중종실록>에 나온다.
'용변의 자유'를 만끽한 조선의 임금이 있었으니
이렇게 신하들에게 억눌려 살았던 데다가 용변 볼 때마저 남의 감시를 받아야 했으니, 왕이 '용변의 자유'를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자유'를 만끽한 주상으로서 조선 제15대 광해군을 들 수 있다.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서 광해군의 '자유'를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제16대 주상이 되었을 왕세자 이지(李䘭). 그 이지의 젖어미(유모)는 덕환이란 궁녀였다. 보모상궁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덕환은 인목대비 쪽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인목대비 앞에서 광해군의 뒷담화를 하곤 했다. 덕환의 뒷담화가 바로 <계축일기>에 소개되어 있다.
"겨울에 똥을 누실 때는 아침부터 뒷간에 가서는 정오 때까지 계속 누시고, (웃어른께) 문안을 드려야 할 때는 유난히 (뒷간을) 자주 드나들며 똥을 두세 번씩 누시니 그렇게 애가 타는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언뜻 듣기엔 광해군을 걱정하는 소리 같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광해군을 욕하는 내용이다. 덕환의 뒷담화에 따르면, 광해군은 매우틀에 용변을 보지 않고 일반인들처럼 그냥 뒷간에 가서 용변을 보았다. 덕환은 그런 광해군을 시중드는 게 너무 힘들다며 인목대비 앞에서 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왕실 웃어른께 인사드리러 갈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그럴 때마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광해군이 무척 얄미웠던 모양이다. 광해군이 싫으니까 그의 용변 습관까지 싫었던 것이다. 주군의 용변을 '매우'라 부르지 않는 데서부터 덕환이 누구 편인지가 드러난다.
조선의 왕궁에 화장실이 없었다면?
▲ 창경궁 정문.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왕궁에서는 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화장실을 만들어 두었다. 프랑스에 비하면 조선은 '친절한' 나라였다. 그래서 광해군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임금도 일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조선의 관료들은 프랑스의 관료들처럼 대궐 정문에서 용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궐 안에서도 얼마든지 용무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당당한 태도로 왕궁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 억눌렸다고 설명했다. 만약 조선 왕궁에 화장실을 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혹시 신권이 조금이라도 억제될 수 있지 않았을까? 대궐 정문에서는 물론이고 대궐 안에서도 항상 용변 걱정을 해야 했다면, 신하들은 긴장감 속에서 늘 조심해야 하지 않았을까. 왕이 국무회의(어전회의)를 오래 끌면 끌수록 그들은 한층 더 움츠러들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시리즈 내의 정규 코너에서 다루지 못한 역사 이야기를 하는 미니 코너입니다. 이 코너에서는 중국사·일본사를 포함해서 세계사도 흥미진진하게 다룹니다. 한편,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나 '짝패' 같은 기존의 미니 코너도 계속 운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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