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99
고통 속에 살아가는 ‘MB난민’을 아시나요
이명박 정부가 집권 마지막을 달리고 있다.
촛불집회부터 민간인 사찰까지,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였던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MB 난민’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기사입력시간 [227호] 2012.02.02 08:58:01 조회수 2312 김은지 기자·배정훈 인턴 기자
이명박 정부 5년차.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 해에 들어섰다. 지난 4년간 공권력의 남용으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이 하나둘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대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각각 무죄를 선고받은 정연주 전 KBS 사장이나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 그늘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도 많다. 망루에 올라 목숨을 잃고, 뚜렷한 이유를 모른 채 사찰당하고, 내부 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2009년 8월, <시사IN>은 이들을 ‘MB 난민’이라 호명했다. 이명박 정부 아래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 속 MB 난민의 삶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제92호 커버스토리 참조). 그로부터 2년6개월이 지난 오늘,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MB 난민 6인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쌍용차 노동자 김상영씨
지난해 12월 중순 김상영씨(43)는 2003년식 흰색 기아 프레지오를 샛노랗게 도색했다. ‘열린 ○○ 수강생 모집 초·중·고’라는 플래카드를 다니 영락없는 보습학원 15인승 승합차다.
1월11일 오전 경기도 평택 쌍용차 노동조합 앞에서 만난 김씨는 분주했다. 낮 12시까지 ○○학원을 가는 아이들을 태우기 위해 희망 텐트 앞에 세워졌던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남짓 되었다. 조잘거리는 초등학생 두 명이 차에 오르자 김씨는 일일이 얼굴을 확인했다. 학원에서 준 등·하원 표를 보며 ‘출석체크’를 해야 한다. 정신없이 학원으로 아이를 실어 나르고 다시 집에 내려주기를 반복하다 보면 해가 저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화장실 갈 시간이 여의치 않아 고생했다. 지금은 담배 한 모금 피울 여유는 있다.
그렇다고 일 자체가 편해진 것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노동일 뿐이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내내 차를 운전하면 한 달에 100만원을 받는다. 기름 값을 빼면 손에 70만원 정도가 남는다. 편찮으신 노모와 단 둘이 사는 처지라 생활비 충당하기에 빠듯한 금액이다. 퇴근 후 다시 희망 텐트로 향한다. 김씨에게 학원차 운전이 ‘부업’이라면 투쟁은 ‘본업’이기 때문이다.
1992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2009년 무급 휴직자가 되었지만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쌍차 사람’이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을 거치며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김씨는 지난 3년 동안 인쇄공장·공사장 따위를 전전했다. 그럼에도 희망퇴직을 하지 않는 이유는 “회사가 괘씸하고, 분해서”이다. 그는 1년 후 복직을 약속했던 회사의 거짓말과 정부의 무능이 만들어낸 결과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끝까지 싸울 거라는 김씨는 해질녘 희망 텐트로 들어가 라면을 끓였다. 운전 때문에 거른 때늦은 식사였다. 저녁 선전전을 위해 든든히 먹는다는 그는 매주 이틀씩 희망 텐트에서 잠을 청한다. 현재 김씨와 같이 희망 텐트를 지키며 농성을 이어가는 사람은 130명 정도이다.
용산참사 유가족 정영신씨
정영신씨(38)는 가장 가기 싫은 곳으로 교도소·경찰서·법원을 꼽는다. 그런 교도소에 토요일마다 간다. 안양교도소 ‘2944’ 남편 이충연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허용된 시간은 12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손의 온기조차 나눌 수 없지만 ‘폭풍 수다’로 아쉬움을 달랜다. 정씨가 교도소로 발걸음을 한 지는 3년째다. 2009년 1월20일을 기점으로 뒤바뀐 일상이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의 그날 시아버지 이상림씨도 숨졌다. 그런데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던 남편 이씨가 아버지를 죽인 주범이 되어버렸다. 2010년 11월 대법원 2부(주심 양승태 대법관)가 이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달라던 유가족은 355일간의 투쟁 끝에 2010년 1월 장례를 치렀다. 이후 남일당에서 숙식을 함께하던 유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용산 며느리’로 불리던 정영신씨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삶은 예전 같지 않았다. 수시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결혼 8개월 만에 감옥에 간 남편을 그리며 혼자 있는 집에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았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죽음이 멀게 느껴지지 않던 나날, 하루는 술과 수면제 한 움큼을 삼키고 잠을 청했다. 이틀 후 깼다. 허무했다.
늪 같던 일상을 1년 넘게 보내고 있던 때, 정씨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소식을 들었다. 망루보다 더 높은 35m 크레인에 올라가 있다는 여자를 무조건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여름, 1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한진중공업 안으로 들어가 크레인 중간 지점까지 올라갔다. 10m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김진숙은 살겠다”라고 읊조렸다. 연대하기 위해 한진중공업으로 달려온 남녀노소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희망버스에 참가한 것 때문에 용산경찰서에서 다시 소환장이 날아왔고 또 법정에 서게 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다섯 차례에 걸친 희망버스 ‘개근’은 정씨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상처로 남은 용산의 기억을 시민들과 같이 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그 길로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를 찾아갔다. 평생 장사만 하던 정씨에게 지난 7월부터 ‘상임 활동가’라는 명함이 생겼다. 1월20일 용산참사 3주기를 앞둔 정씨는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
1월3일 서울 종로구 ‘역사문제연구소’ 근처에서 만난 김종익(57) 전 KB한마음 대표는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이야기를 여러 차례 꺼냈다.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김근태 고문의 부고 소식을 들은 날 집 근처 공원을 계속 돌았다. 고문이라는 국가폭력을 당한 그분의 상처가 돌아가신다고 사라질까.”
김씨 또한 국가 폭력의 피해자다. 그는 2008년 7월부터 11월까지 ‘쥐코’라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 사찰을 당했다. 김씨가 사건을 세상에 알리자 검찰은 조사에 나섰다. 이에 가담한 이인규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은 지난해 4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원충연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고용노동부는 원씨의 최종형이 선고나지 않았다며 지난해 9월 그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검사 배성범)는 김씨도 기소했다. 회삿돈 8000여 만원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썼다는 혐의였다. 보복수사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12월 검찰의 공소 사실 대부분이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당시 기억은 여전히 김씨를 괴롭힌다. 지인들이 검찰에 불려 조사를 받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에 약을 모았다. 김씨의 상태를 심각하게 여긴 후배 둘이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에게 데리고 갔다.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으면서 상태는 호전됐지만 아직도 밤마다 약 세 알 반씩을 먹고 잠든다.
2008년 사찰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KB한마음’ 대표직을 내려놓은 뒤부터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일본 잡지를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1999년 목숨을 잃은 노동운동가이자 동생인 김종배씨의 뜻을 이어 만들어진 노동자료 아카이브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자원 활동도 한다. “사찰을 당한 사실을 밝히고 겪은 어려움도 컸지만 이 과정을 통해 이명박 정권과 권력의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하지만 더 많은 성찰을 위해서는 사건의 진상과 배후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미네르바’ 박대성씨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로 알려진 박대성씨(34)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박씨 변호를 담당했던 박찬종 변호사의 법률보좌진 김승민씨는 “나도 요즘 대성이와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고 집 밖을 거의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2009년 1월 검찰이 박씨를 구속한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2008년 박씨는 포털사이트 ‘다음’ 경제토론방의 유명 필자였다. 환율 급등을 예측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치솟자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부장검사 김주선)는 그를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00일이 넘는 기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그해 4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홀쭉해진 모습으로 퇴소한 박씨는 전기통신기본법 47조1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2010년 12월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대성은 가짜 미네르바’라는 글을 올려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들의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간다. 미네르바의 글을 무단 도용해 책을 낸 혐의로 기소된 자의 재판도 수원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반면 박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형사보상금 청구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운하 양심선언’ 김이태 연구원
1월4일 한국건설기술연구원(건기연) 김이태 연구원(50)과의 전화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3월까지 인터뷰가 힘듭니다.” 김 연구원의 첫마디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건기연 박근철 사무국장은 김 연구원의 거절에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외부활동은 올해 3월까지 제약되어 있다. 2008년 5월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린 글의 여파가 여전히 김 연구원을 옭아매고 있었다. 당시 그는 “한반도 물길 잇기 및 4대강 정비 계획의 실체는 대운하다”라고 폭로했다.
애초 김 연구원을 징계하지 않겠다던 건기연은 조용주 원장이 부임하면서 태도를 바꿨다. 2008년 12월 정직 3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각종 연구과제에서도 그를 배제했다. 김 연구원의 징계를 문제 삼았다는 이유 등으로 박근철 노조 사무국장을 파면하기도 했다(당시 건기연 노조지부장이었던 박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 파면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 복직했다).
그 이후 김 연구원은 ‘반성문’과 ‘일지’를 쓰는 일이 잦았다. 김 연구원 관련 언론 인터뷰가 나오면 그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는 소명서를 써서 건기연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본의 아니게 발생한 상황이지만 어찌하였든 애초의 원인이 저에게 있어 연구원 직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마음이 매우 무겁습니다(2010년 10월6일).” 주말에 야당 보좌관을 만난 사실을 상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쓴 적도 있었다.
4대강 사업 지원 업무에 방해가 된다며 사직을 권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면 ‘대운하 양심선언’이 잘못되었다는 글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리라는 압력도 있었다. 박 사무국장은 “건기연 상부는 김 연구원을 조직적으로 따돌렸고, 직원들은 알아서 그를 피했다. 그래도 김 연구원은 자신이 한 일에 후회가 없다며 꿋꿋이 잘 버텼다”라고 말했다.
‘한상률 비판’ 김동일 조사관
지난해 12월1일 김동일씨(50)는 나주세무서에 복직했다. 2009년 5월28일 국세청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파면당한 지 30개월 만이었다. ‘나는 지난여름에 국세청이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에는 “전직 대통령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게 내몰기까지 국세청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국세청의 대응은 빨랐다. 글을 올린 다음 날 바로 삭제되었다. 6월4일 직위해제 조치를 받았고 같은 달 12일 파면되었다. 국세청 직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이후 김씨는 징계가 부당하다며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에 이의를 제기했고, 2010년 1월 소청심사위는 파면보다 한 단계 아래인 해임 결정을 내렸다).
그는 “국세청의 명예는 서울청 조사4국까지 동원해 태광실업 조사를 했던 한상률 전 청장이 실추시켰다. 게다가 한 전 청장은 글을 쓸 당시 국세청 직원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평소 내부 게시판에 정부 비판적인 글을 곧잘 올렸던 ‘인기 필자’ 김씨는 파면 조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긴 법률 싸움에 들어갔다. 김씨는 광주지방국세청을 상대로 해임처분 취소소송을 시작했다. 광주지방검찰청 형사2부(부장검사 옥선기)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김씨를 기소했다. 두 재판은 모두 지난해 11월24일 김씨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밝은 목소리로 근황을 전하던 그도 지난 2년6개월을 떠올릴 때는 잠시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 때문에 말이 두 차례 끊어지기도 했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이 돼 취업을 하지 않았다는 김씨는 “국세청에 몸을 담았던 터라, 나를 고용한 회사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예상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일용직과 농사일을 전전했다. 아내는 피자가게를 열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당한 해고였기에 반드시 복직된다고 생각했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증은 피할 재간이 없었다. 닷새간 집 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방에만 멀뚱히 누워 있는 김씨를 보며 딸은 “저러다 아빠 죽겠다”라고 걱정했다.
복직한 이후 김씨는 다시 국세청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KBS 2TV <개그콘서트> ‘두분 토론’ 형식을 차용해 검찰과 언론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글은 계속 올릴 생각이다. “지난해 한상률 전 청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 반드시 특검이 이루어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도곡동 땅에 대한 의혹을 밝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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