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12)훙산 곰의 정체
입력 : 2007-12-21 17:01:32

단군신화까지 훔쳐가려는 중국

“이 옥기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 있어요.”

지난 7월30일 랴오닝성 박물관. 이른바 ‘랴오허(遼河) 문명’ 특별전을 지켜보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기자를 붙든다. 뉴허량(牛河梁) 16지점 3호 무덤에서 확인된 짐승머리형 옥기를 가리킨 것이다. 짐승머리 형태로 3개의 구멍이 뚫린 희한한 모양이다.

뉴허량 16지점에서 확인된 곰형 옥기. 곰 두마리가 양쪽 끝에 원조(圓雕) 기법으로 조각됐다. 훙산문화 옥기예술의 정수라는 평이다. 뉴허량·선양/김문석기자


“이기자가 보기엔 무슨 동물 같아요?”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했으니 응당 두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라는 뜻이겠죠.”

유물 설명에 나온 대로 대답할 수밖에.

“그동안엔 돼지머리로 보아 저수삼공기(猪首三孔器)라 했거든. 그런데 최근들어 해석이 바뀐거지. 돼지에서 곰으로….”

곰의 정체는?

뉴허량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곰 발 조소상.

자세히 보았다. 매우 사실적인 기법이다. 짧지만 둥근 귀와 눈, 모가 났으면서도 둥근 이마, 뾰족하면서도 둥근 입, 얇고 벌어진 아랫입술…. 그러고보니 영락없는 곰의 모습이다. 기자는 순간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곰(熊)이라.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본거지에서 곰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곰은 바로 단군신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이뿐이 아니라, 발해문명의 영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졌어요. 그러니 중국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원래 곰은 중국학계의 관심 밖이었다. ‘용의 자손’이라는 믿음 때문에 용(하늘과 물을 상징)이 추앙되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가 의미 있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그럴듯한 학설이었다.

사실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을 본다면 그 형태를 대략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C자형과 결형(한쪽이 트인 고리모양의 패옥)이다. C자형 가운데는 네이멍구 싼싱타라(三星他拉)에서 출토된 크기 26㎝ 짜리 옥룡이 가장 유명하다. 이 C자형 옥룡이 정말 용이 맞는지 그조차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오고, 머리와 등 뒤의 장식이 돼지가 아니라 사슴뿔이라는 설도 난무하는 등 복잡하다.

그러나 요즘엔 이 C자형 옥룡의 원형은 돼지 혹은 사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결형 옥’은 그 원형이 곰(熊)이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 여러분이라면 간파할 수 있으리라. 즉 이 결형 옥이 훙산문화의 전신인 차하이(사해·査海)-싱룽와(흥륭와·興隆窪·BC 6000년전)에서 확인된 옥결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최근 한반도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도 차하이-싱룽와와 같은 시대(BC 6000년전)의 옥결이 출토되었음을….

여하튼 중국학계는 뉴허량에서 나온 결형 옥의 원형을 예전에는 돼지로 보았지만, 요즘엔 곰으로 보고 있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뉴허량 2지점 4호총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뉴허량 여신묘에서 나온 진흙으로 만든 동물 가운데는 두 개체의 짐승류가 확인됐다. 발굴단은 처음엔 이 동물이 으레 돼지이겠거니 했다. 출토 사실을 보도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돼지 주둥이는 두 개의 타원형 콧구멍이 있고~ 상하 턱 사이에는 입술 밖으로 긴 이가 노출돼있고, 앞니 역시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봤다면 돼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비교적 긴 아래턱과 길면서 구부러진 이빨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곰의 특성에 가까웠다.”(궈다순의 회고)

특히나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은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네 발톱이 이렇게 노출된 동물은 곰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뉴허량 여신묘에서 확인된 두 마리 짐승은 모두 곰이었던 것이다. 뉴허량 적석총에서 확인된 쌍웅수삼공기와 곰뼈, 그리고 바로 곁 여신묘에서 확인된 진흙으로 만든 곰 형상….

곰을 숭배한 훙산인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고 하니 훙산인들이 곰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샤오허옌 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네이멍구 우한치(敖漢旗) 바이스랑 잉쯔(白斯郞 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애초엔 ‘개머리 장식’이라고 보고되었지만, 넓은 이마와 뾰족한 주둥이, 짧은 두 귀, 그리고 머리에 비해 굉장히 넓은 목 부분은 전형적인 곰의 머리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일컬어진다.

“이렇듯 옥으로 조각한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라고 보고됐어요.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혀요.”(이형구 교수)

웅룡은 뉴허량뿐 아니라 츠펑 우한치, 시라무륜(西拉木倫) 강 이북의 바린여우치(巴林右旗)와 바린쭤치(巴林左旗), 허베이성(河北省)의 웨이창(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웅룡은 죽은 자의 가슴팍에 주로 놓여 있었는데(뉴허량 제2지점 1호총에서 보듯),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이 옥으로 만든 웅룡은 후대에까지 폭넓게 퍼졌는데, 허베이성 양위안(陽原)현 장자량(姜家梁)과 허난성 상춘링(上村嶺)의 괵국(서주 후기의 소국) 묘지에서도 웅룡 옥조각이 나온다. 또한 량저우(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훙산인의 후예가 분명한 상나라에도 훙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인쉬(殷墟)에서도 훙산문화와 유사한 결형 옥이 확인된다는 게 중국학계의 해석이다. 이처럼 뉴허량 등지에서 확인되는 심상치 않은 곰의 흔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궈다순의 해석을 보자.

“훙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훙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곰이 황제라고?

이렇듯 뜻밖에 출현하는 곰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리스(李實)였다. 그는 훙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보고, “훙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학계는 리스의 주장에 주목하여 훙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켰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견강부회할 수밖에….”(이교수)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AD 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관련 기록은 사기 오제본기에 나왔다.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에 곰(熊), 큰곰, 비·휴(범과 비슷한 동물. 비는 수컷, 휴는 암컷), 추( ·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와 싸웠다.”

중국학자들은 황제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궈다순)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은 훙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했다. 이 말은 ‘황제가 훙산인의 왕이었다’는 소리다.

단군신화의 원형

동이의 본향 차하이에서 확인된 옥결.

하지만 억지춘향도 유분수지. 곰 숭배는 중국보다는 동북아시아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그 중의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중국 역사서에서 황제와 곰의 기록은 빈약하기 이를 때 없지만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를 보라.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모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범과 곰이 한마리씩 같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는 이걸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라 했다. 곰과 범은 삼칠일간(21일간) 조심했으나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으로 변하지 못했다. ~(사람이 된)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밑에서 임신을 빌었더니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혼인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차하이와 싱룽와, 그리고 한반도 고성 문암리에서 확인된 옥결이 훙산시대엔 이렇게 곰형 옥으로 발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의 말처럼 “몇 자 안되는 단편의 기록(중국측)과, 기·승·전·결이 완벽하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겨있는 단군신화”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황제=곰 숭배=훙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중국학계의 몸부림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기자의 상상력은 한도 끝도 없다. 그렇다면 인근 적석총에서 곰뼈와 옥웅·옥룡이 나왔고, 진흙으로 만든 곰형상이 확인된 뉴허량의 여신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여신묘에서 확인된 여신상은 과연 누구일까. 혹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의 원형은 아닐까. 

〈뉴허량·선양|이기환 선임기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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