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국

중국 고대의 국가 이름으로 기자의 동래(東來)와 관련 있는 곳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당의 배구전에 말하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고 주나라는 기자를 봉해줌으로 조선이라고 불렀다(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고 하였다. 즉 고구려를 고죽국과 연결시켜 본 것이며, 『삼국유사』는 고죽국을 황해도 해주로 파악하였다. 

『한서』 지리지 요서군 영지현(令支縣-현재 요녕성 객좌현)조에 “고죽성이 있다”고 하였고, 『사기』열전 백이(伯夷)조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그 지역이 고죽국이 있었던 곳이라고 적었다. 즉 전한 시대의 요서군 영지현 지역이 옛날 고죽국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에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다다른 지점인 조선이 원래는 은대의 고죽국이 속해 있던 연산산맥(燕山山脈) 이동의 대릉하 유역이었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동북지역 특히 발해 연안의 북부에서 발견된 은말과 주초의 유적, 유물들이 기자 및 고죽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 대릉하 유역을 기자의 초기 정착지인 기자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대릉하 유역인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북동(北洞)유적에서 발견된 “고죽(孤竹)”과 “기후(箕侯)”라고 새긴 청동기가 발견된 것을 가지고 기후를 기자로 보아 은말주초에 은의 유민들이 고죽국으로 도망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하였다.(이형구, 1996) 

고죽국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융적(戎狄)의 일파로 파악하기도 한다. 융적은 중국 동북방 장성(長城) 지구의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서주(西周)시대부터 춘추시대까지 활동한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보통 중국왕조 주변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문헌에 나오는 고죽의 명칭은 춘추시대에 동북지방의 연(燕)에 대해 위협을 조성한 나라들과의 관련 속에서 등장하는데, 당시 연은 북부와 동부에 위치한 소수민족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고죽은 이들 소수민족 중 하나였는데, 고고학적으로도 요녕지역 청동기문화 중에서도 요서지방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와 대체로 부합한다. 따라서 고죽은 융적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은족(殷族)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송호정, 2005)

참고문헌

이형구, 1996, 「渤海沿岸 大凌河流域 箕子朝鮮의 遺蹟․遺物」『古朝鮮과 扶餘의 諸問題』, 신서원.
송호정, 2005, 「大凌河流域 殷周 靑銅禮器 사용 집단과 箕子朝鮮」『韓國古代史硏究』38.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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