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입력 : 2007-11-09 14:47:50

도시처럼 계획된 ‘8000년전 東夷마을’

7월27일 오후 2시.

중화 제1촌, 아니 동이 제1촌인 차하이 마을을 탐사한 기자일행은 서둘러 행장을 꾸렸다.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싱룽와(흥륭와·興隆窪)로 향하는 길이다. 싱룽와는 ‘중화시조취락(中華始祖聚落)’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기자가 물었다.

“아니 ‘중화 제1촌(차하이)’은 뭐고, ‘중화 시조의 취락(싱룽와)’은 또 무슨 말인가요?”

이형구 교수가 웃으며 대답한다.

“차하이는 랴오닝성(遼寧省) 후신에, 싱룽와는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츠펑에 속해있어요. 서로 자기네 동네에서 나온 유적을 최고로 치는 것이죠.”

천신만고 끝에 찾은 8000년전 싱룽와 마을. 175가구의 집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했다.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나왔다. 지금은 발굴이 끝나 덮었으며 중국 사적으로 지정됐다. <싱룽와/김문석기자>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

요컨대 ‘중국 최초의 마을’ 자리를 두고 네이멍구 자치구와 랴오닝성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아닌게 아니라 서로 자기네 마을이 8000년 전의 것이고, 다른 마을은 7500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계 최고(最古)니, 최대니 하는 것에 민감한 것은 우리나 그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 고심 끝에 ‘중화제1촌’이니, ‘중화시조취락’이니 하는 말장난으로 ‘첫째’를 나눠갖는 것이 아닐까. 각설하고 우리 같으면 200㎞라면 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도로망이 열악한 중국의 촌구석을 달리는 것인 만큼 4시간도 장담할 수 없다. 단순히 도로사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요.”

예비답사를 다녀온 윤명철 동국대 교수와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의 걱정이 하늘을 찌른다.

“예비답사 때도 길을 잃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어요.”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톳길…. 지나치는 마을마다 우리네 1960년대 시골동네의 모습이다. 자욱한 먼지를 내뿜으며 달리는 버스는 곧 막다른 길에 닿아 낭패를 겪기 일쑤. 버스기사와 가이드는 억센 중국말로 수시로 대책을 논의하는데, 잔뜩 찌푸린 얼굴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시로 내려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하지만 호떡집에 불난 듯 다투어 나서긴 하지만 뾰족한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듯했다. 물어물어 간신히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니 어느 깡촌에 닿았다. 다 왔나 싶어 안도한 것은 찰나. 웬걸 길이 막힌 것이다.

낭패였다. 가이드와 버스기사가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길을 안다는 마을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차하이 옥결, 싱룽와 옥결, 고성 문암리 옥결(왼쪽부터)

“경향신문이 운이 좋네요”

좁디좁은 마을의 사잇길로 아슬아슬 인도하더니 간신히 외줄처럼 이어진 비포장도로로 버스를 데려다 준다. 그러나 마을사람이 “저기!”라고 가르쳐준 길로 갔지만 무신통이다. 역시 가도가도 싱룽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100m 정도 앞에 허름한 입석버스가 가고 있으니 무작정 그 시골버스를 따라갈 수밖에….

한 10여분 달렸을까. 갑자기 시골버스도 사라졌다. 다시 옥수수밭, 메밀밭 사이 외길을 무작정 가야 한다. 갑자기 절망감이 엄습한다. 저녁 6시가 넘는데….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어두워지면 한줄기 불빛도 찾을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길도 찾지 못할텐데….

한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포기상태에서 20여분을 더 헤매자 저기 저편에서 황톳빛 마을이 신기루처럼 다가온다. 드디어 마을이다. 지나치던 촌로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야트막한 저편의 구릉지대, 꿈처럼 펼쳐진 지평선을 가리킨다.

“저기가 싱룽와 유적입니다.”

저 멀리 짙은 황사 사이로 표지석 세 개가 어렴풋이 보인다.

“경향신문이 운이 좋네요. 오고 싶다고 다 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여기저기서 덕담을 건넨다. 30년을 발해문명 연구에 쏟아온 이형구 교수의 얼굴도 붉게 상기돼 있었다.

“정말 감개무량하네요. 2번이나 이곳(싱룽와)을 찾아오려고 했지만 다 실패했는데….”

마치 성지(聖地)를 찾은 듯 이교수의 얼굴엔 경건함이 배어 있었다. 동이족이 문명의 새벽을 연 곳, 바로 그곳 차하이와 싱룽와를 잇달아 찾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 탐사단은 바로 이곳, 성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싱룽와에서는 사람과 돼지가 함께 순장된 장례풍습이 확인됐다.

중국 100대발굴

싱룽와 유적. 네이멍구 자치구 우한치(오한기·敖漢旗) 바오궈투(寶國吐)향 싱룽와 촌에서 동남쪽 1.3㎞에 자리잡고 있다. 82년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중국 고고학 역사상 100대 발굴 중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다. 96년에는 우리로 치면 사적(전국중점보호단위)으로 지정됐다. 우한치 박물관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곳을 역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마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오고간다고 소개해 놓았다. 하지만 탐사단이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고, 인근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를 정도이니 어떻게들 찾아온다는 것인지 원!

발굴이 끝나 지금은 유적을 덮어놓은 상태. 풀밭과 옥수수밭으로 남게 되었으니 힘겹게 찾아온 사람들은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지류인 왕뉴허(牛河)와 맞닿은 싱룽와 유적이 갖는 의미는 같은 다링허 지류에 속한 차하이 못지 않다.

탐사단이 먼저 가본 차하이는 용의 고향이며, 그곳에서도 옥과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다. 기자는 차하이를 설명하면서 ‘용’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옥과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았다.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차하이와 같은 시대인 싱룽와 유적, 옥에 대해서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잇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면서 하기 위함이었다.


8000년 전의 계획도시

그런데 싱룽와는 왜 ‘중화시조취락’이라는 명성을 얻었을까. 83~94년 사이 7차례나 발굴한 조사단은 깜짝깜짝 놀랐다. 무려 175기의 집자리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형태로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다.(차하이에서도 55기의 주거지가 발견됐지만, 싱룽와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중국에서 가장 넓고 보존이 잘된 신석기 시대 대규모 취락이다. 4만㎡에 달하는 마을은 환호(環壕·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돼 있었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약 42평)를 훌쩍 넘었다. 중국학자들은 바로 이 대목을 주목한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두 개의 집자리엔 영도자가 살았거나, 회의 혹은 원시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2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학계는 이 원시마을에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각 방의 모습을 보면 취사용구뿐 아니라 생산도구, 심지어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列)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같은 배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개 마을의 최소단위인 가정과, 같은 열에 사는 혈연관계로 맺은 가까운 친척, 그리고 마을 안에서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싱룽와 마을의 비밀

“차하이 유적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한 점은 무덤이 주거지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이죠. 옛날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믿었나봐요.”(이형구 교수)

무덤에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기, 골기 등과 함께 사람과 돼지를 합장한 흔적도 보였다. 이것을 순장(殉葬)이라 한다면 훗날 동이족의 나라인 상(은)도 순장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사용 구덩이에서도 돼지뼈가 다수 발견됐는데, (지금의 돼지머리처럼) 돼지는 8000년 전에도 제수용품으로 사랑받은 게 분명하다. 돼지 외에도 사슴뼈와 물고기뼈가 대량으로 나왔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돼지사육과 돼지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이므로 차하이-싱룽와인들은 어렵과 수렵을 주요 생산활동으로 하면서 농업을 막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사족을 달면 차하이와 싱룽와는 200㎞나 떨어져 있지만 연대와 문화양상은 매우 비슷하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라는 용어로 묶는다.

차하이-싱룽와 유적이 중요한 것은 용(차하이)이나 취락의 규모(싱룽와) 때문만은 아니다. 차하이, 싱룽와에서 동시에 출토된 옥과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 덕분이다. 또한 확인된 175기의 주거지 가운데 5기가 동이의 문화인 홍산문화 주거지라는 점이다. 이것은 홍산문화(BC 4500~BC 2000년)가 싱룽와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옥 문화에 관해서는 옥 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운 홍산문화를 다룰 때 다시 언급하겠다. 다만 차하이·싱룽와에서 발견된 옥결(玉결·옥귀고리)과 똑같은 것이 최근 한반도 중부(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7000년전 유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우선 언급해두고 싶다.

여기서는 빗살무늬 토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차하이와 싱룽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두고 “(발해문명을 꽃피운) 홍산문화의 근원이 중국중원에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원(황허)과 동북(싱룽와)의 신석기문화는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발전했으며, 두 곳의 공통점은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점이며 모두 영도자가 살았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했다.

하지만 빗살무늬 토기 문화는 주지하듯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발해연안에 있는 차하이-싱룽와는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영역이다. 

〈싱룽와|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동영상|이다일 기자 crodail@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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