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3847
농민반란까지... 조선통신사 접대에 일본 '휘청'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징비록> 두 번째 이야기
15.02.23 13:27 l 최종 업데이트 15.02.23 13:27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징비록>. ⓒ KBS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군사대국화나 과거사 문제 등으로 이웃나라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그는 역대 총리들에 비해, 동아시아 평화를 상대적으로 덜 중시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불과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한일관계에 얼마나 많이 공을 들였는가를 고려해본다면, 아베 총리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베 총리가 살펴봐야 할 역사적 사례는 KBS 주말 드라마 <징비록>의 최근 방영분에서 자주 거론된 조선통신사 문제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무신정권인 막부에 파견된 조선왕조의 사절단이다.
<징비록>에서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선조 임금과 동인당, 동인당과 서인당이 대립과 갈등을 빚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드라마 속의 조선 정부는 이 문제 때문에 보통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런데 조선의 부담은 일본에 비하면 약과였다. 통신사의 방문을 받는 일본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통신사의 방문을 받을 때마다 일본이 엄청난 재정적 출혈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측도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했지만, 일본의 재정적 부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지출'이란 표현으로도 충분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출혈'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외교 사절단이 외국 수도 주변의 공항에 내린 다음에 곧바로 시내의 정부 청사나 대통령 관저로 들어가지만,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는 외교 사절단이 상대방 나라의 국경에서부터 수도까지 기나긴 여행을 해야 했다.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부산과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교토 혹은 에도까지 이동했다. 통신사가 교토까지 여행한 때는 무신정권 지도자인 쇼군(將軍)이 교토에 있었던 시기로서, 대체로 조선 전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무신정권은 무로마치 막부로 불린다. 통신사가 에도 즉 지금의 동경(도쿄)까지 여행한 때는 쇼군이 에도에 있었던 시기로서, 조선 후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무신정권은 도쿠가와 막부 혹은 에도 막부로 불린다.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조선통신사
▲ 1748년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의 복사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있는 달성한일우호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달성한일우호관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 장군 김충선의 무덤 및 사당과 함께 있는 곳이다. ⓒ 김종성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보통 몇 백 명으로 구성됐다. 예컨대, 인조 임금 때인 1636년에는 579명이고, 효종 임금 때인 1655년에는 488명이었다. 그런데 통신사가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를 지나는 순간, 사절단의 규모는 확 늘어났다. 대마도인들로 구성된 수행단이 통신사 사절단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682년에는 대마도 수행원들이 1760명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보다 훨씬 더 많은 대마도 수행단까지 합치면, 전체 규모가 2천 명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대규모 행렬의 이동 경비는 일본측이 부담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상 최고'의 편의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왜냐하면, 18세기 말까지 일본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손님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절단이 세계 최고의 손님? 국수주의적 과장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 잠시 뒤에 설명된다.
막부는 통신사 군단이 지나가는 곳의 도로나 교량을 정비 혹은 신설하고 중간 중간에 휴게소와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다. 이들이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대령했다. 이뿐 아니라, 말들이 아프거나 다칠 경우에 대비해서 비슷한 숫자의 말을 예비로 준비해둬야 했다. 통신사 행렬이 중간에 선박을 잠시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선박들을 호위할 일본 선박들을 따로 준비했다. 6척의 조선 선박과 50척의 대마도 선박을 942척의 일본 선박이 호위한 적도 있다.
통신사 행렬이 육로나 해로가 아닌 강을 통해 이동할 경우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됐다. 이런 경우에는 사전에 지역민들을 동원해서 강바닥을 준설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설 작업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일본 백성들이 배를 직접 끌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강 양쪽에서 몇 백 혹은 몇 천 명의 일본인들이 통신사 선박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지역에 머무는 것은 훨씬 더 부담스러웠다. 최상의 요리와 숙소와 여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신사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1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이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농민반란이 벌어지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6개월 내지 1년간 일본에 체류했으니, 통신사가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 전체가 홍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국가재정 흔들 정도였던 통신사 접대비용
옥스퍼드대학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2009년에 한국에 와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통신사 접대비용은 일본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명확한 통계 자료가 없어서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1682년의 지출액과 1697년의 쌀 생산량을 비교해도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임스 루이스에 따르면, 1682년에 에도로 가는 중간 거점인 긴키 지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사용한 비용은 쌀 320만 석 정도였고, 17년 뒤인 1697년에 일본 전국에서 생산된 쌀은 2580만 석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일본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된 18세기 후반에는 "이렇게까지 조선을 접대해야 하느냐?"는 불평의 목소리가 막부 내부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통신사의 방문은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주한미군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과거의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를 그처럼 부담스러워했다.
▲ 1811년에 이루어진 조선통신사의 대마도 방문을 기념하는 비석. ⓒ 김종성
그렇게 부담스러운데도 조선 사신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18세기말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이 일본에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가장 귀한 손님이었다.
일본, 언제든 18세기 말 이전 고립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외환위기를 방지할 목적으로 국가 간에 화폐를 상호 교환하는 제도를 통화 스와프라고 부른다. 현재, 일본은 대한민국과의 통화 스와프에 대해 좀 소극적이다. 한국 경제를 눈 아래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말 이전에는 달랐다. 일본이 세계 최강 국가의 동아시아 대리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과 달리,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고립된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은 고립을 탈피하고 대륙과 무역을 할 목적으로 조선과의 외교관계에 극진한 공을 들였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일본이 외교관계를 체결한 나라는 조선과 오키나와뿐이었다. 오키나와는 섬나라이고 조선은 대륙국가이므로, 일본은 조선을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세계 최고의 상품인 '메이드 인 차이나' 비단을 수입하고 이것으로 동남아나 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했다. 그래서 조선이 없으면 일본 경제는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없었다. 무리한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조선통신사를 후하게 대접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 같은 일본인들은 '지금의 일본은 18세기말 이전과 다르므로, 그때처럼 한국에 성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은 지금의 일본이 18세기말 이전의 일본과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19세기부터 경이적인 성장을 거듭한 것은 영국·미국 같은 당대 최강대국들과의 동맹 덕분이었다. 일본은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서구화(근대화) 작업을 진행했고, 영국·미국의 지원을 받아 1910년에 조선을 강점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따라서 일본의 성공은 '자수성가'가 아니었다.
만약 세계 최강대국이 일본에게 '대리점 영업권'을 내주지 않는다면, 일본은 언제라도 18세기말 이전의 고립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날이 되면, 일본은 예전처럼 남북한과 중국에 의해 포위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유럽 열강과 미국 덕분에 강점한 오키나와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이 최상의 자세로 조선 통신사를 대접한 것은 그런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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