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6146
조선시대에도 '여왕'이 있었다, 35년동안
[2011 지역투어-서울·경기·인천③] 조선왕릉, 그곳에 여왕의 역사가
11.12.11 21:17 l 최종 업데이트 11.12.12 16:18 l 김종성(qqqkim2000)
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마지막, 이번엔 서울·경기·인천입니다. [편집자말]
▲ MBC 드라마 <이산>의 정순왕후(김여진 분). 정순왕후는 순조 때 3년간 실질적인 여왕이었다. ⓒ MBC
현존하는 조선왕릉은 총 42기. 이 중 2기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나머지는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분포해 있다. 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총 9기의 왕릉이 모인 동구릉(경기도 구리시)이고, 그 다음은 총 5기의 왕릉이 모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이다.
한 왕조의 왕릉이 42기씩이나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개성시의 2기를 제외한 40기의 조선왕릉이 2009년 6월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조선왕릉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런 조선왕릉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대개 다 '왕들의 역사'를 음미한다. 좀더 나아가, 왕들의 부인인 왕후들의 역사를 함께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 조선왕릉에 왕들의 역사, 왕후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35년간의 '여왕의 역사'다. 조선은 35년간 사실상 여왕의 나라였고, 그런 역사가 조선왕릉 속에서 숨 쉬고 있다는 점은 자칫 놓치기 쉽다. 이 점을 증명하는 것이 대비·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다.
참고로, 전(前) 주상의 왕후는 대비·왕대비(王大妃)·대왕비(大王妃)라 불렀지만, 성종 때와 철종·고종·순종 때는 대비와 왕대비를 구분한 적이 있다. 또 전전(前前) 주상의 왕후는 대왕대비(大王大妃)라 불렀지만, 어떤 때는 전 주상의 왕후도 대왕대비라 부른 적이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제부터는 '대비·대왕대비'를 '대비들'로 간칭하자. 이 글에서는 '대비들'이란 표현이 여러 명의 대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대비와 대왕대비를 통칭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자.
대왕대비 6명, 8차에 걸쳐 35년 동안 수렴청정
▲ 동구릉 입구. ⓒ 김종성
조선 여왕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비들의 수렴청정. 이런 수렴청정이 필요한 경우는 주상이 너무 어리거나 혹은 경험이 너무 부족한 때였다. 이때 대비들이 커튼, 즉 주렴(簾)으로 자신을 가린 상태에서 대신들과 논의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 불렀다.
수렴청정 권한을 행사한 대비들은 총 6명이다. 이들 6명이 총 8차에 걸쳐 수렴청정을 집행했다. 제7대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는 제8대 예종 때 대비 자격으로 1년간, 제9대 성종 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7년간 조선을 통치했다. 제11대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 윤씨는 제13대 명종 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8년간 통치했다.
또 명종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는 제14대 선조 때 대비 자격으로 1년간 통치했다. 드라마 <이산>에서 제21대 영조의 51세 연하의 부인으로 등장한 정순왕후 김씨(김여진 분)는 제23대 순조 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3년간 통치했다.
순조의 부인인 순원왕후 김씨는 제24대 헌종 및 제25대 철종 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각각 7년·6년간 통치했다. KBS2 <명성황후>에서 추존왕 익종(효명세자, 순조의 아들)의 부인으로 등장한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는 제26대 고종 때 대왕대비 자격으로 2년간 통치했다. 이들의 수렴청정 기간을 합하면 총 35년이다.
조선 역사 518년 중 35년은 '사실상' 여왕에 의해 통치
▲ 광릉의 두 무덤. 왼쪽은 세조, 오른쪽은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 광릉관리소
이렇게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들은 주상의 의견을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입각해서 최고통치권을 행사했다. 그것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막후에서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들은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최고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이런 대비들은 사실상 여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에는 이들이 공식적인 최고권력자였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수렴청정이 끝나지 않는 한, 주상은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수렴청정이 집행된 도합 35년 동안 조선의 실질적 최고통치자는 주상이 아니라 대비들이었던 것이다. 518년 조선 역사에서 35년간은 사실상 여왕에 의해 통치됐던 것이다.
수렴청정 기간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시기는 정희왕후 윤씨 때였다. 이때 대왕대비는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 왕대비는 정희왕후의 첫째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추존왕후), 대비는 둘째며느리이자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였다. 본래 동의어였던 왕대비와 대비를 이 시기에 구분해서 사용한 것은 동서지간인 소혜왕후와 안순왕후의 격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정희왕후는 "나는 한문을 몰라서 안 된다"며 한문에 능통한 소혜왕후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았다. 그래서 소혜왕후는 사실상 부(副)여왕의 역할을 했다. 이 소혜왕후가 바로 인수대비다. 사실상의 여왕과 부여왕이 공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시기라 할 수 있다.
국가비상시, 후임 주상 지명 권한 가졌던 대비
▲ 인수대비의 무덤인 경릉의 정자각(분향 장소). 경릉은 서오릉 안에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소재. ⓒ 김종성
혹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여성들이 최고통치권을 행사했다 해도, 그들은 어차피 대신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는 허수아비가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 주상들도 어차피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하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비들이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이 통치자의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렴청정 하는 대비들이나 친정(親政)하는 주상이나 외형상으로는 다를 게 별로 없었다.
수렴청정 하는 대비들은 사실상 임금이나 다름없었기에, 고대 일본에서는 이런 대비들에게 일왕(소위 '천황')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예컨대, 제42대 몬무(文武)일왕이 어린 후계자를 두고 사망하자, 몬무의 어머니(조선으로 치면 대왕대비)가 어린 후계자를 대신해서 제43대 겐메이(元明) 일왕이 되어 최고통치권을 행사하다가 8년 만에 자리를 내준 일이 있다. 이처럼 수렴청정은 사실상의 통치권 행사나 다름없었다.
수렴청정 외에도, 대비들이 최고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가 또 있었다. 주상이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했거나 물러났을 경우다. 이런 경우에 전·현직 대신들은 대비나 대왕대비의 하교에 따라 새로운 주상을 옹립했다. 대비들은 국가비상시에 후임 주상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도 가졌던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의 라이벌인 인목대비(선조의 부인)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인조)을 주상으로 지명한다'는 교서를 인목대비로부터 받아낸 사례가 그 점을 보여준다. 이런 권한은 수렴청정 권한이 없는 대비들도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대비들이 수렴청정을 통해 사실상의 여왕으로 군림하거나 혹은 국가비상시에 후임 주상을 지명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에 여성의 정치권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열악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조선왕조가 대한민국보다도 여성에게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 통치권 행사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
▲ KBS2 드라마 <명성황후>의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 신정왕후는 조대비로 더 많이 알려졌다. ⓒ KBS
이처럼 여성의 통치권 행사가 용인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조선의 국가주권이 왕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이 국가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주인(주상)이 죽으면 주인의 어머니나 아내가 최고권력을 행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됐던 것이다. 개인기업에서 사장이 죽거나 위독하면 사장의 어머니나 아내가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대비들은 왕을 낳은 신성한 몸'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대비가 다 왕을 낳은 것은 아니지만, 왕을 생산한 여성이 대비나 대왕대비가 되는 게 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인들을 신성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수렴청정이나 주상 지명을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왕의 생산자라는 신성한 지위를 바탕으로 나이 어리거나 경험이 없는 주상을 대신해서 최고통치권을 행사하고 비상시에는 후임 주상을 지명한 조선의 대비들, 아니 조선 여왕들의 역사가 서울·경기 지역의 조선왕릉 곳곳에 담겨 있다.
그런 조선왕릉에서 '남왕(男王)들의 역사'와 더불어 '여왕들의 35년 역사'도 한번쯤 음미해보자.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꼭 여권(女權)을 신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만, 역사로부터 좀더 많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 위주의 역사, 사대주의 중심의 역사, 지배층 중심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반쪽짜리 교훈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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