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43140


조선 쇠락, 짝사랑하던 일본이 먼저 눈치챘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짝패>, 두 번째 이야기

11.03.28 17:09 l 최종 업데이트 11.03.28 17:09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짝패>. ⓒ MBC


MBC 드라마 <짝패>는 조선 제25대 철종의 즉위(1849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이 드라마는 철종에서 고종으로 가는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는 조선왕조의 말기적 징후가 종종 노출되고 있다. 


공권력(드라마 속의 '현감')이 제멋대로 세금을 부과하는 장면, 대중 사이에서 홍길동 같은 인물('아래')에 대한 동경심이 번지는 장면, 새로운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조직('동학')이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장면, "살기 힘들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장면, 반정부 소요사태에 자극받은 대중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민란에 동조하는 장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왕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불온한 기운들이다. 


그런데 철종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의 쇠락 징후를 간파한 쪽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막부정권이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바쿠후'라고 하는 막부는 일종의 군사정권이다. 12세기부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까지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막부정권들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에 등장한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는 조선왕국의 운명을 예의 주시했고, 그 결과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왕국의 쇠락 징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 가장 중요한 지역은 한반도였다. 바닷길이 활성화된 16세기 이전에 일본이 세계무역에 참여하자면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매개로 대륙과 교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대표상품인 비단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열도에 전해졌고, 일본의 대표상품인 은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대륙에 전해졌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비위를 맞추고 조선을 최고의 '전략적 동반자'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세기, 일본이 국교 체결한 곳은 조선·오키나와뿐


일본의 '조선 중시 외교'는 바닷길이 활성화된 이후는 물론이요, 임진왜란(1592~1599년)이 종결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됐다. 17세기 이후에도 일본이 한반도를 가장 중시했다는 점은 이 시기 일본이 국교를 체결한 나라가 조선과 오키나와뿐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같은 시기 일본은 청나라·네덜란드와는 통상관계만 유지했을 뿐 외교관계는 맺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신사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 증진에 기여했다. 통신사 행렬은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일본에 엄청난 재정 부담이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각 지역에서는 환영 비용을 분담해야 했다. 최종 목적지인 에도에 당도하면, 막부는 빙례(聘禮)라는 거대한 예물교환의식을 열어주어야 했다. 옥스퍼드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통신사가 한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에서는 연간 쌀 수확량의 12% 정도를 소모했다. 


조선통신사의 에도 방문은 조선·일본의 친선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신(新)막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의미했으므로, 막부정권은 재정 부담에도 통신사를 기꺼이 에도까지 초청했다. 그만큼 조선이 일본에 중요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 짝사랑'은 왜 시들해졌는가


▲  일본인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고 있는 통신사 행렬.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 비상교육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은 조선이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닷길을 통한 동남아·중앙아·중동·서유럽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조선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계속해서 낮아진 탓이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시선이 싸늘해지기 시작한 '어느 순간'은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열렬히 조선을 짝사랑하던 일본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은, 제3자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쇠약 징후가 뚜렷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은 정확히 언제일까? 조선이 서양과 일본의 개항 요구에 굴복한 구한말일까? 아니면 드라마 <짝패>가 현재 보여주는 철종시대일까? 흥미롭게도, 그 시점은 한국인들이 흔히 조선왕조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생각하는 정조시대였다. 


"아니, 영·정조 시대 같은 중흥기에 조선이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에서 제대로 기술되지 않는 점이 있다. 그것은 영·정조 시대에 청나라·일본에서는 조선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르네상스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정조 시대에 조선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청나라·일본은 그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학생 A의 성적은 10점 오른 데 비해 나머지 학생들의 성적은 훨씬 더 많이 올랐다면, A의 성적은 과연 좋아진 것일까? 영·정조 시대 조선의 실상이 바로 그러했다.  


'마음' 바뀐 일본, 조선통신사를 '대마도'로 부르다


이웃집 A에게 뒤처진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늘 혼나던 C는 작정을 하고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A가 10점을 올리는 사이 30점을 올려 A를 바짝 추격했다. 항상 A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니, A를 따라잡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가 얼마나 들떴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C)이 그런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표출된 것은 정조 11년(1787)이었다. 이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막부의 제1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다. 관례대로라면, 조선통신사를 에도에 초빙해서 거대한 빙례를 열고, 조·일 간의 우호를 다지는 한편 신막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획득해야 했다. 


그런데 막후 실권자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거창한 행사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야 할 만큼 조선이 중요한 나라인가?', '이제는 우리도 조선에 뒤지지 않는 게 아닌가?'.


▲  일본 쿠와나시시(市) 소재 진코쿠슈코쿠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초상화. ⓒ 위키페디아백과사전 일본판(저작권 보호기간 만료)


그렇다고 통신사 빙례를 당장 없앨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엄청난 외교 혼란이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안은 통신사 빙례를 에도가 아닌 대마도에서 약식으로 치르는 것이었다. 이것을 역사학 용어로는 역지빙례(易地聘禮)라 한다. 지역(地)을 바꾸어(易) 거행하는 빙례(聘禮)라는 뜻이다. 


역지빙례를 실시할 경우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재정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마다 거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으므로, 통신사가 대마도까지만 왔다 가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대마도를 통해 조선 측에 이런 뜻을 전달했다. 1869년 이전의 대마도 정권은 조선·일본 양쪽을 상국으로 받들면서도, 한일관계에서만큼은 일본측 대리인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대마도가 일본측 의사를 대신 전달해준 것이다. 대마도주인 소 요시카쓰가 조선 예조참의(외교통상부 국장급)에게 보낸 서한이 정조 18년 8월 27일자(1794.9.20) <정조실록>에 실려 있다.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간략하고 쉬운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귀국 사신이 올 경우 본주(대마도주)가 맞이하여 접대하고 빙례를 시행하려 합니다. 이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하며, 피차간에 항구적인 제도로 삼기로 상호 약속하여 우호를 견고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선통신사를 대마도에서 접대한 뒤 돌려보내겠다는 이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재정 절감을 명분으로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재정 부담이 크더라도 조선이 중요한 나라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은 어떻게든지 통신사를 에도까지 초빙하려 했을 것이다. 


최초이자 최후가 된 한일 간 '대마도' 빙례


일본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 앞에서 조선은 당혹감과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선통신사를 문전박대하는 조치를 조선 정부는 수용하기 힘들었다. 조선이 거부의사를 표출했기 때문에, 양국은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벌여야 했다. 정조가 죽을 때까지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  대마도에 있는 역지빙례 기념비석. 비석의 측면에는 “분카 8년(1811),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만난 곳”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분카(文化)란 1804~1817년에 해당하는 일본의 연호. ⓒ 김종성


순조 11년(1811), 조선은 결국 일본측 요구를 수용했다. 대마도에서 통신사 빙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은 일본 본토가 아닌 대마도에서 열린 최초의 빙례였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비석을 대마도 시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한일 간 최후의 빙례였다. 그 후로는 대마도에서마저도 빙례가 열리지 않았다. 조선과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외교 승인을 얻기 위해 단 한 푼이라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일본 막부는 판단했다. 


역지빙례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일본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자국이 조선을 바짝 추격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조선이 영·정조 르네상스를 통해 '10점'을 올리는 사이에 일본은 '30점'을 올려 조선을 따라잡았으니, 오랫동안 조선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던 일본이 조선을 시시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일본의 속마음이 표출된 때는 정조 11년(1787)이었다. 


이처럼 조선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국제적으로 서서히 낙오되기 시작했다. 외부세계의 주의 깊은 관찰자들은 이미 그때부터 조선의 쇠락 징후를 간파했다. 일본 막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은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해서 왕조의 쇠락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19세기 초부터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  홍경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부분.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 비상교육


<짝패>를 비롯해서 한국의 TV 사극들은 철종시대나 고종시대를 다룰 때에는 조선왕조를 우울하게 스케치한다. 반면, <이산>이나 <성균관 스캔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조시대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활력과 생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운명을 정확히 묘사하려면, 이미 정조시대 후반부터 불온한 기운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도한 세금에 괴로워하는 대중, 홍길동 같은 인물을 갈망하는 대중, 개혁적인 조직에 눈길을 돌리는 대중, "먹고 살기 힘들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대중,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반정부 운동에 동조하는 대중. 이런 징후들이 이미 정조시대 후반부터 서서히 생겨났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징후들이 감지되었기에, 예민한 정조가 그토록 열심히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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