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100&artid=201501022150325


땅 위의 삶에 자를 대고 긋는 폭력적 재개발, 그 안에 조선총독부의 얼굴이 있다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입력 : 2015-01-02 21:50:32ㅣ수정 : 2015-01-02 21:59:12


(1) 땅 - 1934 조선시가지 계획에서 뉴타운까지

일제의 폭력적 실행력·미국식 도시설계 결합된 도시 계획을 말한다


2009년 용산참사로 남편을 잃고 서울 북아현동 낡은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유영숙씨(53)는 하루 종일 인근 공사장의 건설기계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유씨의 셋집은 ‘북아현재정비촉진지구’에 속해 있어 언제 헐릴지 모르는 상태다. 이미 지구 일부에서는 재개발 공사가 시작됐다. 유씨는 “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강원 춘천에서 30여년 전 상경한 유씨 부부에게 서울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1991년 길음동, 2007년 순화동의 정든 터전에서 밀려난 것도 모두 재개발이 원인이었다. 재개발은 집 근처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 음식점을 운영한 유씨 부부에게서 생계수단까지 한꺼번에 앗아가 버렸다. 급기야 순화동 가게 철거 후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던 남편은 용산 철거민과 공동투쟁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유씨는 재개발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셈이다. 


유씨의 비극은 1990년대 달동네에 대한 재개발 광풍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조선 땅을 폭력적으로 재편한 일제 조선총독부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대별로 폭력적인 도시개발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 아현재정비촉진지구의 ‘ㄷ’자 형태의 가옥들이 2009년 당시 뉴타운사업 개발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따라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생겨난 작은 필지들 위에는 주로 ‘ㄷ’자 형태 가옥이 들어섰다. 조선총독부가 시가지를 개발하기 전인 1910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쫓겨난 토막민들이 모여 살았던 이곳은 해방 후 ‘달동네’로 불렸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공포하고, 시가지 확장과 도시 정화에 나섰다. 일제는 해방 전까지 경성(서울)에서 모두 10개 지구 1854만㎡에 걸쳐 구획정리사업을 벌였다. 만주 침략전쟁을 앞두고 전쟁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김주야 박사(도시건축사)는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른 구획정리는 일본과는 다르게 토지 소유자에 의한 시행이 아닌 행정에 의한 집행을 전제로 한 것이 큰 특징”이라며 관 주도의 자를 대고 긋는 방식의 도시개발 원형을 일제강점기에서 찾고 있다. 동시에 일제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해방 후 도심 슬럼가와 외곽의 달동네를 만들어내는 원인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공공용지 수용방식이 문제였다.


김 박사는 “공공용지 확보 등을 위해 토지를 공출받는 비율(감보율)이 1930년대까지 일본에선 10%대를 유지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감보율이 25%를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높은 감보율로 33㎡(10평) 내외의 작은 필지가 30%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같은 작은 필지엔 ‘집장사’들이 생겨나 ‘ㄷ’자 형태의 작고 열악한 도시형 한옥들이 들어섰고 이들 지역이 슬럼화되면서 오늘날 재개발로 이어졌다. 현재 유씨가 살고 있는 북아현지구 역시 일제강점기 소규모 토지구획의 흔적이 지금껏 남은 곳이다.


비슷한 시기 오늘날 달동네의 기원을 이룬 ‘토막촌’도 생겨났다. 1910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잃고 도시로 모여든 농민들은 일정한 직업 없이 변두리 공유지에 흙으로 지은 움막(토막)에 살았다. 경성부는 위생과 미관을 이유로 토막촌을 여러 차례 철거했지만 토막민의 수는 오히려 늘어갔다. 경성부가 이들을 주로 산지 등 공유지로 수용하면서 달동네의 기원이 됐다. 재개발이 끝난 아현재정비촉진지구가 그 경우다.


해방 이후에도 관 주도의 일제 도시계획 방식은 그대로 재현됐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는 ‘식민지 유산과 현대 한국 도시 변동’(2011)에서 “1960년대 이후 한국 도시구획정리가 무허가 빈민 주택에 대한 강제철거 방식으로 이뤄진 것은 식민지기 관행이 그 연원”이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강남 개발사업인 ‘영동구획정리사업’이다. 고속도로 용지 확보를 위해 1400만㎡에 이르는 토지가 구획정리 대상이 됐다. 김 교수는 “토지구획정리를 악용하여 공공용지를 저렴하게 취득하는 식민권력의 횡포는 경부·경인고속도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에서도 계속됐다”고 말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구획정리 규모가 클수록 개인 재산권은 소홀히 다뤄질 수밖에 없다”며 “400만평의 영동구획정리사업은 개발독재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서울 영동(강남)지구 개발사업 기공식은 일제강점기 관 주도로 자를 대고 선을 긋는 폭력적인 도시계획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또 일제강점기 토막민이 있었다면, 1960~1970년대엔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철거민이 대거 생겨났다. 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 동부>에서 “서울시는 1971년에만 판자촌 철거민 13만여명을 가구당 불과 20평 남짓의 땅만 분양해 광주대단지로 이주시켰는데 그것이 지금의 성남”이라고 설명했다.


토지구획정리 방식의 도시계획은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택지개발촉진법으로 변형됐다. 택지개발촉진법은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가 민심 호도용으로 추진했던 ‘주택 500만호 건설’의 수단이었다. 토지구획정리가 지주들로부터 공공용지를 공출받는 사업방식이라면 택지개발촉진법은 국가·지자체·토지개발·주택공사가 지주들로부터 토지 취득을 쉽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로써 서울과 수도권에서 대규모 주택단지의 계획·건설이 가능해졌고 아파트단지가 목동·상계동을 넘어 분당·일산·평촌·산본 등으로 뻗어나갔지만 부작용이 생겨났다.


개발 규모가 크다보니 자연파괴도 심각했고 급속한 개발 과정에서 버려지는 사람들도 나온 것이다. 1983년 4월 목동지구 ‘뚝방동네’ 주민들의 항의가 시발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 강제이주정책으로 쫓겨와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사당·상계지구에서도 비슷한 항의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일방적 도시행정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수도권 신도시 개발 바람이 잦아들 때쯤 이른바 ‘뉴타운’ 사업이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처음 추진됐다. 뉴타운 사업은 ‘강북 낙후 문제 해결’을 명목으로 추진됐지만 서울의 저층 단독주택과 노후 아파트가 다시 투기 광풍에 휩싸이는 계기가 됐다.


2002년 왕십리·은평·길음 등 세 곳을 시작으로 몇 년 새 뉴타운지구가 수십곳으로 빠르게 늘었다. 대부분 66만~99만㎡(20만~30만평)에서 최대 330만㎡(100만평)에 이르기까지 면적도 상당히 넓었다. 한때 서울시 전체 면적의 10%, 서울시 인구의 15%가 뉴타운지구에 속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뉴타운 바람은 거셌다. 여전히 도시계획이 거대 규모와 속도전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시개발의 고질적 문제들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원주민 이주 문제, 전면적인 철거·개발 방식이 재현된 것이다. 2009년엔 뉴타운지구의 원주민 재정착률이 10.9%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폭력적 도시개발에 대한 반성은 외부 위기가 계기가 됐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여파로 국내 부동산 경기가 하락하자 서울시는 ‘뉴타운 출구 전략’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대규모 개발사업 대신 소규모·단계적 개발을 추진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일제강점기부터 고질화된 전면 철거와 속도전에 대한 뒤늦은 반성인 셈이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우리의 재개발은 일제강점기의 폭력적 실행력에 미국식 도시설계가 얹힌 방식”이라며 “우리 사회가 일본도 미국도 아니라면 ‘다수 동의’라는 명목으로 경제약자의 도시생존권을 징발하는 방식의 도시계획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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