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100&artid=201501042143375


일제 수탈 본거지… 한 맺힌 영사관 외벽 ‘욱일승천기’ 문양 또렷

[광복 70주년 기획 - 사진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건축 기행]

목포 | 글 배명재·사진 서성일 기자 ninaplus@kyunghyang.com


(1) 목포 일본인 거주지


한국의 근대는 일제강점기와 정확하게 겹친다. 36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에 한국의 근대는 꼬이고 뒤틀렸다. ‘강요된 근대’의 유산은 지금도 전국에 남아 있다. 일제가 남긴 건축물들은 해방 후 속속 사라졌지만 점차 ‘아픈 과거도 역사’라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면서 이제는 간직하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향신문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전국에 산재한 ‘강점기=근대’의 자취를 더듬는 기행을 연재한다. 그 시절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되, 같은 경로를 되밟지 않도록 다짐하는 뜻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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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 출신 소설가 박화성이 22살 때 발표한 <추석전야>(1925)에서 선창가 방직공장에 다니는 주인공 영신은 퇴근 후 일본인 거주지 외곽을 돌아 자신의 오두막집이 있는 유달산 중턱으로 오른다. 3년 전 남편을 잃은 영신은 화려한 불빛, 엔카와 트로트가 섞여 흐르는 유곽(요정)들을 지나, 과일 더미와 생선이 풍성히 널린 상가를 바라보며 집에서 배를 곯고 있을 시어머니와 아들·딸 생각에 목이 멘다. 그의 집 산동네에서 바라본 저 아래 일본인 마을 ‘혼마치(本町)’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바로 그 일본인 거주지의 100여년 전 모습이 아직도 오롯이 남아 있다. 유달산(해발 228m) 자락 노적봉에서 여객선 터미널 쪽으로 대의동·유달동·중앙동·영해동·만호동 등이 차례로 펼쳐져 있다. 가장 먼 해안선까지 꼭 1㎞ 거리다. 걸어서 20분. 마치 바둑판처럼 보인다. 폭이 8m 이상인 도로가 가로, 세로로 반듯이 뚫려 서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과 모래밭으로 사람이 살기엔 부적절한 습지였다. 하지만 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접점으로 장차 ‘물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일제는 눈여겨봤다.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낸 일제는 드넓은 곡창지대 나주평야가 탐이 났고, 이곳 목포를 호남벌 곡물을 수탈해가는 항구로 삼고 싶었다. 


■ 왜색 짙어 한때 철거론 일기도


우여곡절 끝에 1897년 10월 목포가 개항했다. 일제는 조선수군기지인 목포 만호진터에 영사관을 열고, 조계지로 삼아 이곳 ‘쓸모없는 땅’을 바다 쪽을 향해 매립하면서 근대도시 개발을 시작했다. 영사관·학교·경찰서·형무소·법원·검찰청·사찰이 속속 들어섰다. 현재 비교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일제 건물은 4곳이다. 


그들이 가장 먼저 지은 옛 일본영사관으로 들어가 보자. 노적봉 바로 아래 언덕에 자리한 영사관은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 1900년 12월 완공한 르네상스식 2층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외벽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욱일승천기 문양’이 박혀 있다. 내부 역시 창문이나 벽에 이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안내를 맡은 김문심 전남도문화관광해설사는 “왜색이 짙어 철거론이 일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유산이라는 지역 여론이 건물을 살려냈다”고 귀띔했다. 1981년 목포 문화재 중 유일하게 국가사적 제289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1905년 을사늑약 후 들어선 통감부의 하부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의 청사가 됐다. 1910년 이후엔 목포부 청사로, 광복 후에는 목포시청·시립도서관·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됐다. 2014년 4월부터 목포근대역사관으로 변신했다. 2개 층에 ‘개항장으로 재출발’ 등 7개 주제의 전시공간을 만들어 당시의 애환이 담긴 유물과 자료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수탈의 도구가 된 토지측량기를 비롯, 당시 부유층들이 사용하던 축음기·손금고·가스히터·인력거 등이 눈길을 붙잡는다. 


건물 뒤편엔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파놓은 대규모 방공호가 있다. 높이와 폭이 2m가량이고, 총길이 82m인 미로형 요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고, 안쪽엔 굴을 파기 위해 강제동원된 목포 주민들 모습이 실물 크기로 재현돼 있다.


■ ‘악명’ 동양척식회사, 근대역사관 변신 


영사관 건물을 나와 아래쪽으로 180여m 내려가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나온다. 주변엔 아직도 일본식 가옥들이 즐비하다. 1921년 회색 석조로 지은 이 건물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외벽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은 부산 등 전국 9개 지점 중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이 물러간 뒤 1974년까지는 해군목포경비부가, 이후 1989년까지 해군헌병대가 사용하다가 빈 건물로 뒀다. 그러다 내외부 수리를 거쳐 2006년 목포근대역사관이 됐다.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과 ‘태양 문양’이 벽과 천장에 붙어 있다. 1999년 11월 전남도지정 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물로 채워져 있다. 수탈한 쌀과 소금, 면화 등을 잔뜩 싣고 떠나는 화물선,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숨짓는 식민지 백성들의 표정, 물 한 모금 나눠먹지 않으려고 무장한 채 수원지를 지키는 순사들….


건물 1층엔 ‘八紘一宇(팔굉일우)’가 새겨진 2m 높이의 돌기둥탑도 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의미로 1940년 당시 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쓰고 세운 탑이다. 최근 한 초등학교 운동장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돼 옮겨왔다. 


■ “도시 성장 정체가 원형 보존 가능케”


동양척식회사 건물에서 서쪽 170여m 거리에 1897년 11월 개교한 공립 심상소학교 강당(현 유달초등학교)도 일본이 남긴 건물이다. 1929년 벽돌 구조로 지상 2층 연면적 1210㎡ 규모로 건립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개관 기념 공연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2002년 5월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 제30호로 등재됐으나 그동안 보수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돼왔다. 소강당 등 5개 공간으로 돼 있는 아래층은 책걸상·건자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있었다. 2층은 실내 벽이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있었고, 안쪽과 계단엔 지붕의 눈이 녹으면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어 북동쪽으로 840여m 떨어진 동본원사(東本願寺·히가시혼간지) 목포별원은 일본 특유의 크고 경사가 급한 지붕을 갖춘 일본 불교 사찰이다. 바닥 면적 280㎡인 1층 건물로 1905년 포교를 위해 일본인 거류지가 아닌 조선인이 사는 무안동 오거리 골목에 건립됐다. 광복 후 한 사찰에서 관리하다가 1957년 목포중앙교회가 인수해 50년간 예배당으로 활용했다. 불교 사찰이 교회 건물로 바뀐 점도 흥미롭다. 2008년 목포시가 이웃 가옥 등과 함께 사들여 주차장을 마련하고 법당 공간은 전시·공연장으로 단장했다. 


조상현 목포문화원 사무국장은 “목포가 해방 후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되면서 도시 재개발을 할 동력을 갖지 못한 것이 일본인 거주지가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이유”라고 말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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