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안의 식민권력… 검찰 소환·조서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입력 : 2015-01-09 22:43:02ㅣ수정 : 2015-01-09 22:43:50

(2) 사법: 검찰 권력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위해 검찰에 완전한 수사자유 권한
소환=출석 의무, 조서=증거… 무소불위 검찰권력으로 군림

회사원 ㄱ씨는 얼마 전 검찰 수사관으로부터 “물어볼 게 있으니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경찰에서 이미 수사를 받았는데 또 나가려니 막막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처벌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직장일도 바쁜데 회사에 말하려니 걱정이 앞섰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봤지만 “검찰에서 불렀으니 나가서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 잘하면 별 탈 없을 것”이라는 위로가 고작이었다. 검찰에서 전화로 시민을 오라 가라 할 권한이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국회의원 보좌관 ㄴ씨는 얼마 전 검찰 특수부에 불려갔다. 수사관은 국회의원 범죄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것도 있었고 모르는 것도 있었다. 어쨌든 얘기를 듣고 있으니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됐다. 수사관은 문답식으로 적힌 조서를 만들어 주었다. 이미 머릿속에 검찰에서 만든 이야기가 들어와서 어디까지가 알던 것이고 어디까지가 모르는 것인지 헷갈렸다. 문답의 어투도 미묘하게 달랐다. 몇 줄 읽어보다가 손도장을 찍었다. 

광복 70년이 지난 현재도 대한민국 시민들은 검찰의 요구에 어김없이 응한다. 검찰이 호출하면 나가고 검사가 질문하면 답한다. 수사활동에 불과한 검찰의 업무와 사법절차를 진행하는 법원의 역할을 혼동한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신동운 교수는 “일제와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가혹한 절차가 지금까지도 수사관행과 시민의식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이 주도하는 사회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익숙해져 식민지에서 비롯된 악습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피고인의 방어를 어렵게 하고 법원의 판단절차를 최소한으로 줄인 ‘조선형사령’을 공포했다. 이 무렵 일제는 효과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서구와는 달리 행정권을 극대화한 국가제도를 운영했다.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 본토에서도 시행되지 않던 ‘행정독재형’ 형사절차가 시행됐다. 일본에서는 1925년부터 형사재판에 배심제를 도입하는 등 근대 형사사법이 자리잡아 갔지만 조선에서는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하지 않았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문준영 교수는 “조선형사령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수사기관인 검찰에 완전한 수사자유를 주다시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형사령 12조와 13조는 검사에게 모든 사건에서 영장 없이 압수·수색할 수 있고 피의자를 20일간 유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경찰도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14일 동안 유치할 수 있었다. ‘영장 없이 개인의 신체를 구속할 수 없다’는 근대 형사소송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구속·압수·수색을 검찰의 권한으로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사법절차를 장악해 식민통치를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형사소송절차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사라졌지만 검사들의 의식 속에서는 살아남았다. 해방 50년째이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수사 당시 영장이 기각됐다고 검사가 판사실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해방 60년째인 2006년에도 론스타 수사에서 영장이 제대로 발부되지 않은 데 불만을 품은 검찰 간부가 “판사들이 수사를 방해한다”고 당당하게 발언했다. 해방 이후에 태어난 검사들조차 식민지 검사의 부당한 권한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셈이었다. 


검찰의 피의자 소환권에도 식민지 권력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식민지 시절 조선 검찰은 조선형사령에조차 없는 피의자 소환권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당시 일본의 다이쇼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소환은 출석의무를 발생시키고 불응하면 강제구인이 가능했다. 당연히 판사의 영장으로만 가능한 강제처분이었다. 일본 본토 검사들은 출석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 식민지 검사들은 조선형사령 12조에서 소환권도 유추된다고 주장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소환권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검사가 부르면 거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LKB&파트너스 이용구 변호사는 “현행 형사소송법을 보면 소환은 재판절차에서 판사의 권한이며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소환 권한이 없는데도, 검사들은 소환이라는 말을 쉽게 쓴다”고 했다. 심지어 언론도 소환은 사전적으로 ‘부른다’는 뜻밖에 없는데 마치 검찰에 출석해야만 하는 것처럼 ‘소환 통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검사가 부르면 반드시 나가야 한다는, 식민지 시절 몸에 밴 의식이 해방 이후 사라지기는커녕 ‘소환=출석’으로 강화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공안통치의 최악의 잔재는 ‘검찰 조서’에 부여된 과도한 힘이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하태훈 교수는 검찰 조서에 증거능력이 부여된 기원에 대해 “일제강점기 조선말을 모르는 일본 판사들이 검사가 만들어온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면서 시작된 것”이라며 “일본에서는 1892년 이미 현재의 최고재판소 격인 대심원에서 ‘현행범이 아닌 피의자에 대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고 말했다. 

검찰 조서에 대한 법원의 절대적인 신뢰는 공안사건에서 수사기관의 고문으로 이어졌다. 일본인 판사들은 검사의 조서에 의존해 판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변호인 법정신문은 재판장에게 청구해서 허락을 받아내야 가능했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검찰 조서는 공안통치를 지탱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였다. 1984년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에서 ‘검사의 조서는 고문을 통해 작성된 것’이라는 변호인 주장에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법정에서 부인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 판례를 뒤집은 게 2004년이고, 형사소송법에 반영된 게 고작 7년 전인 2008년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해 허위 진술을 한 조선인들이 재판 받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특수부 검사 출신의 법무법인 공존 금태섭 변호사는 검사들이 ‘우리가 설마 거짓말로 조서를 만들겠냐’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범죄사실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인상을 나쁘게 만드는 질문을 연이어 던지고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묵묵부답하다’라고 적는다”며 “판사들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이런 조서를 읽다보면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이상 검사실은 법정과 같아야 하는데 변호인의 조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 변호사는 “검사실에서 조서를 작성하는 순간부터 토론의 모든 규칙이 무너진다”며 “조사받는 당사자들은 어떤 질문이 부당한 것이고 하지 않아도 되는지조차 모르는데 검사들은 피의자가 묻기 전에는 도움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경고를 어기면 변호사를 쫓아낸다”고 말했다. 

광복 70년이 되도록 식민지 권력은 무소불위 검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고 그 앞에 대부분의 시민은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이다.

법무법인 민의 주두수 변호사는 “형사절차가 식민지 시대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실무에서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며 “검찰에 밉보일 경우 어떤 결과가 닥칠지 뻔히 알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교과서대로 소환에 불응해도 된다거나 이미 작성한 조서라도 잘못됐으면 법정에서 부인하라고 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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