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청렴결백? '떡고물' 194억의 기막힌 진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81> 경제 개발, 일곱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2015.01.17 10:07:15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 주제는 경제 개발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중석 : 그간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경제 발전이 어떤 요인에 의해 이뤄졌는가, 거기서 박정희가 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그런 정책이나 발전이 없었겠는가 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따졌다. 박정희가 정말 경제에 헌신한 사람인가, 이 부분도 한 번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말 경제 발전에 사심 없이 온 힘을 쏟았느냐, 권력 유지보다 경제 발전을 위해 헌신했느냐, 그러니까 권력을 양보한다든가 권력의 어떤 부분을 희생하더라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자취가 있느냐 하는 부분을 따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그렇게 깊이 있게 얘기할 성질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갖고 있던 식견이라고 할까 시야는 상당히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목표 달성', '수출 얼마 달성', '빨리빨리' 이런 말들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장률을 높이고 눈에 뜨이게 경제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지 경제 전체의 연관 관계, 경제와 사회·정치의 관계 같은 것을 따져가면서 경제 정책을 펼치는 사람은 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박정희는 청렴했다. 경제에 전력투구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 정권 초기에 있었던 4대 의혹 사건만 보더라도 이건 경제를 죽여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것을,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측면이 있지 않나. 계엄 하에서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켜놓고 자신만 중앙정보부라는 거대 조직을 이용해 밀실에서 신당을 만든 것도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만, 그 신당 정치 자금을 확보하고자 4대 의혹 사건을 일으켜 경제에 큰 어려움을 던져주지 않았나. 특히 증권 파동을 일으켜, 막 성장하려고 하는 증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아주 나쁘게 만들었고 증권이 경제에서 해야 할 역할을 상당 기간 동안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한홍구 교수가 쓴 <장물 바구니>라는 책이 있다. '정수장학회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보면 군정 초기에 박정희 측이 1950년대에 그래도 양심적인 재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김지태로부터 어떤 방법으로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사를 강제로 넘겨받았는가 하는 것이 잘 나와 있다. 법원 판결에서도 강제 헌납 부분은 다 인정하지 않았나. 이걸 넘겨받아서 5.16장학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정수장학회가 되는 과정을 그야말로 낱낱이 썼다. 영남대 문제도 그 책에 조금 들어 있긴 한데, 그걸 읽어보고도 '참 청렴하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관련 기사 : 윤창중의 정수장학회 해법, 박근혜는 화답할까)
 

▲ 고 김지태 씨 유족 송혜영 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2012년 10월 22일 '박근혜 후보 정수장학회 입장 관련 시민사회 및 유족 기자 회견' 중).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과 일본 사이의 검은 거래, 그리고 거대한 이권 순환 시스템 
 
프레시안 :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한 법원 판결을 요약하면 '부당한 공권력의 강압으로 재산을 가져갔지만 돌려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수장학회 논란이 일 때마다 박근혜 대통령은 "순수한 장학 재단", '나와는 무관하다' 등의 주장을 펴며 진실을 외면해왔다. 이런 걸 본 아이들이 "힘으로 남의 것을 뺏는 건 나쁜 일 아닌가요?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 한국 사회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총칼로 나라를 훔치고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의 일가가 돈방석에 앉아 떵떵거리고 살고, 일제에 빌붙어 영화를 누린 친일파의 후예 중 일부가 조상의 재산을 되찾겠다며 소송을 내는 나라이기에 더 그러하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라를 훔치더라도, 일단 성공하면 대대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여길 때 그 아이들만 탓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점에서 역사 정의는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인데,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를 가벼이 여기는 듯해 안타깝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집권기에는 일본과 관련된 검은 거래 의혹이 많았다.
 
서중석 : <한겨레> 2004년 8월 13일 자를 보면, 미국 CIA 문서를 근거로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일본의 6개 기업이 6600만 달러나 되는 돈을 민주공화당에 정치 자금으로 줬다고 돼 있다. 이게 크게 보도됐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6600만 달러라는 건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돈이었다. 군사 정권 그리고 민정 이양 초기 박 정권이 양곡이나 원면 같은 걸 도입할 때 이것이 검은 거래의 황금 노선이고 또 막대한 이득을 내면서 시장에 팔 수 있어서 국내 정치 자금의 중요한 젓줄이기도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여기저기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일 회담에서 오로지 청구권 자금에만 매달렸다고 전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다룰 때 자세히 얘기했는데, 이 청구권 자금 사용만 보더라도 순수하게 경제 논리가 작용했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못했다고 하더라도 정말 순수한 경제 논리에 의해 이 돈을 썼느냐 하는 것도 약간은 논란거리가 되는 것 같다. 
 
여기에는 거대한 이권 순환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10년에 걸쳐 이 청구권 자금이 매년 균등하게 지불됐는데, 그 자금과 관련된 사업 계약이나 발주처 선정에서 이권과 관련된 파이프라인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일본 측은 기업이나 상사가 그 상대편이 되는 것이지만, 한국은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등 권력 기관과 밀착하는 것을 통해 사업 계약이나 발주처 선정 등이 이뤄졌다. 만주 인맥의 대부이자 박정희 정권 후원 세력의 대부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포항종합제철소와 서울지하철 건설, 나아가 한일 대륙붕 석유 공동 개발 등의 거대 프로젝트 이권에 개입했다고 하지 않나. 이런 것들은 박정희 정권이 정권 안보를 경제 논리보다 우선시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부관 페리의 취항,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한일 대륙붕 협정 체결 등 중요한 사안들이 정부의 공식 루트를 통해 결정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면 무대에서 이뤄졌다고 지적들을 한다. (부관 페리는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페리로 오가는 항로다. 1905년 뱃길이 열린 이 항로는 해방 전에는 관부연락선으로 불렸다. 공부하러 혹은 품을 팔러 일본으로 향한 한국인들과 대륙 침략에 앞장선 일본인들이 이 항로로 오갔다. 해방 후 끊겼던 이 노선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인 1970년부터 부관 페리호가 다니게 된다. '편집자')
 
서울지하철 의혹과 관련해선 일본의 미쓰이, 미쓰비시 등 4개 상사가 지하철 사업에서 연합했는데, 1971년 4월에 1차로 민주공화당 자금줄로 거론되던 김성곤이 지정한 미국 체이스맨해튼 은행에 120만 달러를 입금하고 잔금 130만 달러를 1972년 1월과 1973년 5월에 외환은행의 어느 가공인물 구좌에 입금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잔금이라는 것도 참 재미난 표현이다. 이 사건이 한국과 일본에서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된 직접적 요인은 한국에 들여온 지하철 전동차 가격이 일본에서 파는 가격의 2배나 됐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경제 논리에 의해 이런 것들이 이뤄졌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본과 이뤄진 검은 거래, 흑막 속의 거래에 관해서는 일본 측에서도 언급한 게 참 많고 한국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쓴 글이 많이 있는데, 다국적 기업이나 미국 기업 같은 곳에서도 상당한 정치 자금이 헌금으로 들어왔다고들 이야기한다. 1970년대 후반 미국 하원이 코리아게이트를 조사할 때 터져 나온 건데 김성곤, 김종필, 이후락 등이 세계적인 석유 메이저인 걸프사에 정치 자금을 요구해 196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400만 달러가 제공됐고, 이 돈의 일부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됐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이고 아주 가깝게 지냈던 서정귀, 이 사람이 호남정유를 맡게 되는데 호남정유의 합작 투자 회사인 칼텍스에서 1971년에서 1972년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 서정귀를 통해 역시 거액의 헌금이 넘어간 것으로 돼 있다. 또 콜트 회사라든가 유명한 항공기 회사인 더글라스 같은 데서도 정치 자금이 넘어갔다고들 이야기한다. 
 
김대중 꺾으려 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거액을 쓴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그런 식으로 긁어모은 검은돈을 어디에 썼나. 
 
서중석 : 이런 정치 자금이 어디에 쓰였느냐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추측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용도였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4대 의혹 사건의 경우 당을 만드는 데 사용했지만, 제일 큰 것은 선거 자금이었다. 1967년 대선과 총선, 특히 이해 총선에는 엄청난 돈을 뿌렸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격돌한 1971년에도 엄청나게 큰돈을 뿌렸다.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가 쓴 책을 보면, 1971년 대선 자금으로 여당이 쓴 돈이 600억 원에서 700억 원 사이였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나온다. 권력 핵심으로부터 그렇게 들은 것이다. 그런데 그해 국가 예산이 얼마였느냐 하면 5242억 원이었다. 
 
이렇게 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돈을 선거 자금으로 쓰려니까, 전에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야기를 할 때도 그 문제가 나왔지만, 많은 정치 자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 말고도 민주공화당이나 유신 시대 때 유정회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 야당에 대한 많은 공작금, 장관 '떡값'이라든가 군을 비롯해 여러 요직에 있는 이들에게 가는 돈, 한마디로 통치 자금으로 불린 돈을 필요로 했다. 그런 것들 가운데에는 연말이나 추석이 되면 '하사금' 명목으로 돈이 나가는 대상자 목록이 정해져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그런다.
 
이처럼 국내 정치 자금으로만 사용한 게 아니라 일부는 국외 정치 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일본 정계에 거액의 정치 자금이 흘러갔다는 것이 여러 차례 보도됐는데, 자민당 총재 경선 같은 데에도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결부해 박 대통령의 용인술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여러 글을 보면 '용인술이 아주 뛰어났다', '김형욱, 이후락, 박종규, 김종필, 김성곤, 길재호, 그리고 나중에는 차지철, 김재규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견제하게 해가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써놓은 글이 꽤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하는 건데, 여기서 거론된 사람들은 조금 전 이야기한 정치 자금을 거둬들인 핵심 인물들이다. 김재규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다 그 방면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지 않나.
 
이 사람들이 박 대통령한테 꼼짝 못하고 충성을 다했다는 것과 관련해 '그런 정치 자금을 자기가 하나도 안 쓰고 전부 내놨겠느냐' 하는 추측도 나온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강력한 권력을 누릴 수 있던 데에는 이권과 관련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중에 그러니까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5.17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유명한 부정 축재자로 알려지지 않나. 그런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이권과 관련해 약점이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잘 파악하고 있다가 꼼짝 못하게 하는 식으로 충성을 바치게 했다고 할 때는 그건 정상적인 정치 논리와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비열하다는 인상까지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것을 훌륭한 용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정희 금고 대행 이후락의 천문학적인 '떡고물' 
 
프레시안 : 민주주의에 걸맞은 방식은 분명 아니다. 다른 권력자가 그런 방식을 따라 한다면 국민은 물론 그 권력자 본인도 불행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에서 제2인자 소리를 들었고 박정희 대통령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건 중앙정보부장이지 않았나. 중앙정보부는 특수 기관처럼 돼 있었다. 특명을 받들어 특무 활동을 한다고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그야말로 막강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앙정보부장, 그러니까 잠깐 있었던 사람들 말고 주요 중앙정보부장들을 보면 말로가 좀 꺼림칙한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1960년대에 악마 마(魔) 자를 써서 마왕이라고도 불린 김형욱을 보자. 중앙정보부장을 제일 오래 해먹었는데, 이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떨려난 다음에 불안을 이기지 못해 망명했고 나중에는 반박정희 활동을 벌이다가 파리 근교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 김형욱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떨려나자마자 외국으로 도피해버렸다. 그러다가 모종의 타협이 이뤄져서 국내로 돌아오지 않나. 신직수도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고 나서 좀 이야기가 있었다. 그전엔 힘이 무지하게 좋았는데, 나중에는 별로 힘을 못 쓴 것으로 돼 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결국 박 대통령에게 총을 겨눴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이자, 박정희의 고향 후배였다. '편집자') 이런 것들을 보더라도, 박 대통령의 뛰어난 용인술이라고 부르기가 참 뭣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과 관련해 유명한 말이 떡고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후락 때문에 1980년대 들어 유행했다. 이후락은 오랫동안 박 대통령의 금고 대행 역할을 했다. 스위스 구좌와 관련됐다느니 하는 소문도 많았고 그에 관한 글도 많지 않나. 신군부가 권력을 잡았을 때, 엄청난 부정 축재를 한 것으로 비난을 받으니까 이후락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들었지만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떡을 만지다 보니 고물이 묻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놈의 떡고물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떡은 얼마나 많은 건지 모르겠는데,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총칼 앞에서 진술한 것에 의하면 청와대 비서실장 재직 시에 45개 기업과 개인들로부터 28억5000만 원을 거둔 것으로 돼 있는 등 모두 194억3000여만 원을 치부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전두환 육성 증언>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것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 주변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었어." 전두환은 자기가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서를 올리면 상대방한테 주어버리는 성격이 있어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상대방은 차지철을 가리킨다. 차지철에 관한 보고서인 것 같은데, "직접 그 사람을 불러서 보여줄 용기가 없는 거야"라고 했다. 그 사람은 차지철을 말하는데, 박 대통령이 '너 이런 것 했어?' 하면서 차지철한테 얘기할 용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힘이 있다던 박 대통령이 세상에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정치 자금도 차지철을 통해서 하고 신세를 너무 많이 지니 정면으로는 말 못하고 보고서를 주어버리는 거지. 보고서 낸 사람만 죽게 돼", 이렇게 쓰여 있다.
 
프레시안 : 검은돈의 악취를 가려보고자 애꿎은 떡을 갖다 붙인 사례는 '떡고물'만이 아니다. 2005년 삼성·안기부 X파일 사건 때도 '떡값 검사' 문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X파일 사건 당시 '거액의 뇌물을 떡값으로 분칠하는 것이 어이없고 듣기 불편하다'는 서울 낙원시장 떡집 주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떡을 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민 전반의 심경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떡고물'이라는 이후락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박정희 정권 당시 실력자들과 이권 문제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서중석 :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들이 이권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청구권 자금이건 뭐건 간에 실무자들이 발주처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권력 핵심들이 큰 것에 많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중앙정보부장, 청와대 비서실장,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같은 실력자들은 거래가 끝나면 관련 자료를 모두 파기한 것으로 돼 있다.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중에서도 다른 사람은 별것 아니었고, 그 유명한 김성곤이 돈 주무르는 데는 대단하지 않았나. 
 
이상우의 책을 보면 이 거래 방법이 상당히 흥미롭게 적혀 있다. 길지만 그 부분을 살펴보자. "1960년대에는 '한국에서 계속 돈 벌고 싶으면 정치 자금으로 얼마를 내놔라'", 이건 걸프사에서 뜯어간 수법이라고 하는데, "이런 수법은 세련되지 못해서 1970년대에 들어와 일본을 상대로 한 커미션 거래에서는 상당히 정치 자금 마련이 체계화되고 세련됐다"고 한다. "청와대, 공화당, 행정부 쪽의 실력자들이 함께 호텔 같은 데 모여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규모의 정부 및 민간 차관, 특히 상업 차관과 국내의 굵직한 건설 공사, 교포 재산의 반입 등에 관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망라하여 일정 비율의 정치 자금을 매겼다." 공부를 많이 했는가 보다. "청와대에서 비서실장이, 행정부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당에서 재정위원장이,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 부장이 참여하여 거둬들일 리베이트의 비율을 결정했다. 그 비율은 많은 것은 도입액 혹은 계약부의 10퍼센트까지 된 적도 있고 적은 것은 2퍼센트도 있었지만 대체로 3퍼센트에서 7퍼센트가 가장 많았다. 한국에 플랜트를 수출하는 일본 상사들은 거의 빠짐없이 이런 리베이트를 지불했다. 그렇다고 하여 이 리베이트로 말미암아 일본 장사치들이 손해를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리베이트를 뜯긴 액수만큼의 웃돈을 물건 값에 덧붙여 팔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관이건 공사 수주건 3퍼센트에서 7퍼센트 정도를 내야 했다고 한 건 참 놀라운 일이다. 한 업체가 1년에 순이익을 3퍼센트에서 7퍼센트 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어떠한 발주를 하건, 또 어떻게 차관을 들여오건 그렇게 많은 돈을 정치 자금으로 가져갔다고 하면 나머지를 가지고 경제를 운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그 경제가 그만큼 부실해지는 것 아닌가. 정치 논리가 우리 경제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정희 대통령(1979년 6월 12일). ⓒ연합뉴스

정권의 치부를 제대로 폭로한 '죄'로 된서리 맞은 <신동아>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경제 발전을 위해 사심 없이 헌신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이야기다.
 
서중석 : 이런 부분과 관련해 1960년대 말에 굉장한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언론 탄압과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었다. 3선 개헌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잡았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여전히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니까 3선 개헌을 앞두고 <동아일보>를 잡아야겠다고 한 것이다. 나중에 송건호 선생이 쓴 글을 보면, 3선 개헌을 사설에서 반대한 신문으로 딱 <동아일보>가 있었는데 <동아일보>도 좀 약하게 썼다고 돼 있다. 송건호 선생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가 어떤 시기로 들어가고 있는가를 얘기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동아일보>에 눈독을 들이던 찰나에 <동아일보>에 속한 <신동아> 1968년 12월호에 중진 기자인 김진배, 박창래 두 사람의 공동 집필로 '차관'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러자 박 정권에서 '됐다. 이제 때려잡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차관'이라는 글의 핵심은 이러했다. 1963년에서 1968년까지 6년에 걸쳐서 상업 차관만도 8억 달러가 되는데 그중 5퍼센트만이 정치 자금으로 돌았다고 해도 최소한 4000만 달러, 즉 100억 원을 훨씬 넘으리라고 추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5퍼센트만 정치 자금으로 돌았다고 해도'라고 한 건 5퍼센트가 더 되는 경우도 많았다는 이야기인데,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나. 그러면서 "5퍼센트 커미션설, 정치 자금 4인 공동 관리설 등은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렇게 써버렸다. 앞에서 말한 것, 그러니까 1970년대 들어 권력 핵심 네 명이 모여 리베이트 비율을 정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데, 1960년대부터 이미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자 특명이 떨어졌다. 그래서 김형욱이 이 건을 조사하게 됐다. 김형욱은 이미 그전에 대단히 큰 언론 하나를 때려잡는 일을 성공적으로 했다. 당시 <동아일보> 다음으로 센 신문이 <경향신문>이었는데 그 <경향신문>을 잡았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 백태하를 시켜서 <경향신문>을 손보게 했다. <경향신문> 사장 이준구에게 신문에서 손을 떼라고 했는데, 이준구 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섰다. 이준구를 구속하고, 나아가서 <경향신문>을 매각하도록 아주 무섭게 몰아댔다. 결과적으로 <경향신문>은 가톨릭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다. 그러면서 <경향신문> 주식의 50퍼센트가 권력으로 넘어가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장물 바구니>에도 이 이야기가 조금 나오는데, "장물 보관소에서 5.16장학회로 넘어갔다. 그래서 김지태한테서 뺏은 문화방송과 합쳐서 한동안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운영했다"고 돼 있다. 1970년대에 실제로 그랬다.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었다. 여기에서 큰 공을 세운 김형욱이 이젠 <동아일보>를 손보러 나선 것이다.
 
프레시안 : 그만큼 '차관'이라는 글이 정권의 치부를 제대로 폭로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서중석 : 그런데 이 '차관'이라는 글을 때려잡으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다 시비를 걸 수가 없을 만큼 빈틈없이 꾸며놓고 있었다"고 김형욱이 말할 정도였다. 그만큼 잘 쓴 글이었다. 이 사람들도 각오하고 쓰지 않았겠나. 박정희 정권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한 상황이지 않았나. '차관'이라는 글을 보면 김성곤계인 쌍용 재벌의 차관 도입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에 의해 이뤄져가고 있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쓰고 있고, 이후락도 여기서 얻어터졌다. 김형욱은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동아일보>와 관련 있는 사업체에 손을 댔다. 악명 높은 세무 사찰, 그러니까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 그것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까 글을 쓴 김진배와 박창래, 그리고 당시 <신동아> 주간이자 유명한 언론인인 홍승면, 그리고 <신동아> 부장 손세일 등을 다시 중앙정보부에서 연행했다.
 
하지만 '차관'이라는 글을 가지고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에서 고민을 아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절호의 기회가 왔다. 뭐냐 하면 <신동아>가 그해 10월호에 실은 글을 문제 삼았다. 역시 반공주의로 때려잡는 것이 그들로서는 제일 빠른 길이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사학자로도 유명한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가 '<신동아> 필화'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래서 이제는 단단히 때려잡기로 하고 부사장 겸 발행인 김상만, 그리고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 이 사람들을 싹 잡아들였다. 그러면서 뭘 문제 삼았느냐 하면 10월호에 게재한 미국 미주리대 조순승 교수의 글 '북괴와 중소 분열'을 걸고넘어졌다. 그 당시엔 제목도 이렇게 붙여야 했다. 조순승 교수는 남북 문제와 해방 직후에 대한 글을 많이 쓴 분인데, <신동아> 측이 조 교수의 그 글을 번역해 실을 때 김일성을 공비 두목이라고 했어야 하는데 빨치산 지도자로 번역했다고 문제를 삼았다. 그야말로 반공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나라이지 않나. 관련자 전원 해고를 <동아일보> 측에 요구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언론인 천관우가 언론계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에게 사표를 받았다.
 
이 사건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오랫동안 <동아일보>, <신동아> 필화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어느 중앙 일간지에서도 이 부분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싶지만, 이미 이 당시에 언론이 얼마만큼 권력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차관 업체들이 그렇게 정치 자금을 내놓게 되면 과연 그 차관으로 제대로 공장을 지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박정희 정권이 경제 논리에 충실한 정권이었느냐, 많은 사람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좀 부정확한 그림이 아니냐, 이런 것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여든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김덕련 기자, 서어리 기자
 


Posted by civ2
TAG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