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28172729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4) 기자, 본향으로 돌아가다

입력 : 2008.03.28 17:27 수정 : 2008.03.28 17:28 


기자조선, 中 제후국 아닌 동이족 독립국


베이둥 방정(사각 솥) 속 바닥에는 ‘기후(箕侯)’ 명문


BC 1046년. 주나라 무왕이 은(상)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상)의 554년 역사를 종식시켰다.


이것은 동북아 고대사의 판도를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한족(漢族)의 하(夏·BC 2070~BC 1600년)를 무찌르고 동아시아의 주인공이 된 동이족의 천하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한족(하)~동이족(은상)~한족(주)으로….


그 과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주 무왕은 주나라의 수도인 펑이(풍읍·豊邑, 산시성 치산·岐山 부근)에서 전차 300대와 용·갑사 4만5300명을 직접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자 주왕의 학정에 못이긴 은(상)의 제후들도 전차 4000여대를 지원했다. 은 주왕은 70만 대군을 동원, 그 유명한 무야(목야·牧野, 허난성 지셴·汲縣 부근)에서 대치한다.


하지만 전쟁은 너무도 싱겁게 끝난다. 은 주왕의 학정에 몸서리를 친 은나라 군사들이 주 무왕의 군사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은나라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쥔 채(倒兵·자기 쪽을 향해 공격한다는 의미) 배반한 것이다. 결국 은 주왕은 분신 자살했고, 그의 애첩 달기는 목을 맸다. ‘사기’ 주본기는 “은(상)나라 사람들이 모두 교외에서 무왕을 기다렸고, 두 번 절을 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고 썼다.


‘사기’는 은 주왕의 폭정에 시달린 은나라 사람들이 주 무왕의 정벌을 반겼다는 투로 썼다.


■ 굴복하지 않은 기자(箕子)


과연 그랬을까. ‘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면 은 백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 무왕은 은나라 사람들을 달래려 몇가지 위무 정책을 단행한다. 은(상)의 3인(仁) 중 한 사람인 기자(箕子)를 석방시키고, 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제후(諸侯)로 봉하면서 은나라 유민(은유·殷遺)들을 다스리라고 명했다. 은나라 역법(曆法)까지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특전까지 베푼다. 역법은 정권의 상징. 그런데 은의 역법까지 쓰라고 했으니 얼마나 은나라 백성들의 눈치를 본 것인가.


그러면서도 2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왕의 친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무경의 사부로 임명, 감시토록 한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는데도) 무경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음험한 마음을 품을까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사기 위강숙세가)


옆면에는 24자의 명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무왕의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무왕의 행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은나라 유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기자(箕子)를 몸소 찾아가 천하의 상도(常道)를 묻고 유명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을 받는다. 하지만 이종족(異種族)인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을 잡는 것이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기자를 조선에 봉했지만(武王乃封箕子於朝鮮), 그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을 만큼(而不臣也) 경외했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기자가 무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不臣)는 뜻으로도 된다. 여하간에 기자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기자가 폐허로 변해버린 인쉬(은허·殷墟)를 지나다가 맥수지가(麥秀之歌)를 짓자, 그 노래를 들은 은나라 유민들이 구슬피 울었다는 대목(사기 송미자세가)이 있다. 은나라 백성들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다(以暴易暴兮)”는 백이·숙제의 비난이 당대 여론의 주류였을 것이다.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스트레스가 컸을까. 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지 3년 만인 BC 1043년 병으로 죽고 만다. 나이 어린 왕(성왕·成王)이 등극하자 무왕의 동생(성왕의 삼촌)인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에 들어간다.


■ 끝까지 저항한 망국의 은(상) 백성


이때 문제가 생긴다. 은나라 제사를 이은 무경(은 주왕의 아들)과, 무경의 감시자였던 관숙과 채숙(둘 다 역시 무왕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성왕을 대신해 섭정에 나선 주공이 권력을 찬탈할까 의심했던 것이다. 셋은 의기투합했고, 망국의 한을 품은 은나라 사람들이 반란군 세력으로 나섰다. 동이족 계열인 회이(淮夷·산둥 남부 지역의 동이족) 사람들이었다.


24자 명문은 “정해(丁亥)일에 ‘회’가 ‘목’이라고 하는 곳에서 右正이란 관직을 가진 ‘문’에게 관패(串貝) 한 조와 붕패(朋貝) 200개를 상으로 내렸다. 이에 ‘문’이 ‘회’에게서 받은 상사(賞賜)를 칭송하기 위해 어머니 모기(母己)의 제사를 지낼 제기(사격형 큰 솥·方鼎)를 만들어 기념한다”고 해독할 수 있다. 바닥의‘기후’명문과 함께 해석하면 ‘회’라는 인물은 기후, 즉 기자족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箕侯亞 ’ 명문 가운데는 시호를 뜻하는 상형문자로 보인다. 명문중 ‘기후’를 둘러싼 글자는 亞로 해석되는데,‘기후’라는 작위를 내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孤竹)’명 청동기는 백이·숙제의 고죽국을 알려주는 고고학 자료이다. | 이형구 교수 해석


하지만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은나라 백성을 이끈 무경과 관숙은 주살되었다. 은 유민의 저항에 놀란 주 성왕은 은나라 세력을 둘로 쪼개 약화시켰다. 은말의 3인(仁)이었던 미자(微子)를 망한 은(상) 왕조의 후사로 삼았으니, 그것이 바로 송(宋)나라다. 또 주 무왕의 다른 동생인 강숙(康叔)을 봉해 은유(殷遺)들을 맡겼다. 강숙과 은 유민은 인쉬(은허)에 거주했는데, 이것이 위(衛)나라다.


“은나라의 저항이 끈질겼어요. 성왕 때까지도 왕이 과거 은나라의 세력과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은을 멸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이형구 선문대 교수)


사기 주본기에 “성왕이 은의 잔여 세력을 소멸시킨 뒤에야 비로소 예의와 음악이 바로 잡히고 흥성해졌다”고 했으며, 그 뒤에도 “동이를 정벌하고…”하는 대목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은과 동이의 저항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기자조선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왕에게 ‘홍범구주’의 가르침을 준 기자는 어디로 떠났을까. 사기는 분명히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무왕이 기자를 (존경한 나머지) 신하로 부르지 않았든지, 아니면 신하이기를 거부했든지 어쨌거나 기자는 무왕의 품을 떠났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기자는 과연 주나라의 제후국이었을까. 이형구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진·한·위·노·제·송·채 같은 단명(單名)이잖아요. 그런데 조선(朝鮮)은 복명입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자기 영역 밖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복명을 썼거든. 조선, 선우, 중산, 흉노, 선비, 오환처럼…. 그러니까 주나라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외국으로 친 겁니다.”


그러고보니 사마천의 ‘사기’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기자세가’가 아니라 ‘송미자세가’에 아주 자세하게 담았다. 만약 기자조선을 중국의 역사로 쳤다면 ‘기자세가(箕子世家)’라 해서 별도의 꼭지로 처리했을 것이다.


공자는 그렇다치고, 실패한 반란의 주인공인 진섭(陳涉·반란을 일으켜 秦나라를 무너뜨린 인물)마저 세가(제후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것)에 담은 사마천이지 않는가.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무장한 사마천이라면 홍범구주로 무왕을 가르쳐 결과적으로 주나라 건국정신의 토대를 쌓은 기자와 기자조선의 역사를 당연히 세가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중국이 아니기에 차마 세가에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기자가 가공 인물이며,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가 거짓이라는 해석이 팽배한데요. 기자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해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그런 측면도 있고, ‘기자조선 인정 = 소중화 = 사대주의’라는 조선시대 이래의 역사 인식에 대한 거부감도 있고…. 또한 중국과 우리의 역사를 떼어놓으려는 일제 관학자들의 그림자도 아직 남아 있고….”


그런데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기자를 거부하려는 시각이 있다면, 기자의 신분이 종족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기자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과연 거짓인가.


“이미 기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노나라 태사 좌구명이 쓴 역사책) 희공 15년조(645년)에 출현합니다. 또하나 사기의 정확성은 정평이 나있잖아요.”


‘있는 역사’를 왜곡하는 경우는 많지만,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는 법은 드물다. 더욱이 1899년부터 확인된 은(상)시대의 갑골문을 해독한 결과 사기 은본기에 나온 은(상)나라 왕의 이름들과 거의 일치한다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BC 90년 무렵 완성된 사기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사기’ 주본기, 송미자 세가와 노주공세가, 위강숙세가 등에 나타난 기자의 기록은 사실로 봐야 할 것 같다.


■ 가자! 본향으로



자, 이젠 기자의 행방을 쫓아가자. ‘기자조선의 존재’를 논증한 이형구 교수가 주목한 곳이 바로 카줘셴(喀左縣) 베이둥(北洞) 유적이었다. “기후(箕侯)와 고죽(孤竹)명 청동기가 나온 두 곳의 유적 거리가 불과 3.5라는 점이 눈에 띄었어요. 기자조선의 대동강 유역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중국학계는 ‘기후’명을 기자로 해석하지 않았거든. 나는 거의 붙어있는 두 유적의 관계를 흥미롭게 여겼는데, 바로 두 제후국이 시간 차를 두고 계승한 것으로 보았어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명문 청동기는 비단 베이둥에서만 발견된 게 아니다. 카줘셴 산완쯔(山灣子)·샤오좐쯔(小轉子)·샤오보타이거우(小波汰溝)와 이셴(義縣) 사오후잉쯔(稍戶營子) 교장갱 등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베이둥에서 나온 청동기의 ‘기후’와 ‘고죽’ 명문 외에도 산완쯔·샤오좐쯔·샤오보타이거우 등에서는 숙윤(叔尹), 술(戌), 백구(伯矩), 어(魚), 주(舟), 차(車), 사(史), 아(亞), 윤(尹), 채(蔡), 사벌(史伐), 과(戈) 등 여러 씨족들의 징표가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은(상)이 망한 뒤 기자가 주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여러 씨족들을 이끌고 동북으로, 동북으로 향했다고 보면…. 그리고 머나먼 조상 때부터(훙산문화 시절부터) 하늘신과 조상신 제사를 끔찍이도 모셨던 그들은 신주 모시듯 했던 청동예기(방정·뢰 등)들을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옛 고향으로 떠났다고….”(이형구 교수)


이와 관련, 1930년대 인쉬 발굴을 총지휘한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의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은상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허 하류로 와서 나라를 건국하고, 은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동북(고향)으로 돌아갔다.”(동북사강·東北史綱)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왕궈웨이(王國維)도 “은이 망한 뒤 기자는 선조의 땅으로 돌아갔다(從先王居)”고 했다. 명나라 사람인 함허자(涵虛子)는 ‘주사(周史)’를 인용하면서 “기자는 중국인(즉 은나라 유민) 500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또 하나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을 보면 “고려(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었다.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망국의 눈물을 흩뿌리며 은(상)의 백성들과 함께 험난한 옌산(燕山)을 넘어 도착한 곳이 그들의 본향인 고죽국, 바로 조선 땅이란다.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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