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404171051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5) 기자의 본향 ‘고죽국’

입력 : 2008.04.04 17:10  수정 : 2008.04.04 17:12 


‘천하통일 상징’ 청동솥은 신앙의 대상

카줘 베이둥 2호 교장갱에서 확인된 짐승 문양의 청동솥(정). 정은 원래 정권의 상징물이자, 천·지·인을 연결해주는 보물로 여겨졌다. <선양 | 김문석기자>


그렇다면 기자(箕子)가 은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찾아간 본향, 즉 고죽국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고고학 자료와 문헌을 잘 따져보자.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기자가 돌아간 옛 조상의 땅으로 대략 4곳을 꼽는다.


먼저 롼허 하류설. ‘사기정의(史記正義·주석서)’는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城在盧龍縣 南十二里, 殷時諸侯孤竹國也)”이라 했다. 누룽셴은 오늘날의 롼허 하류에 있다.


두번째는 산하이관(山海關)설. ‘요동지(遼東志)’ 지리지는 “순임금~하나라 땐 북기(北冀)의 동북을 분할하여 유주(幽州)라 했고, 상(商)나라 때는 고죽국이라 했다”면서 “위치는 산해관(山海關) 동쪽 90리, 발해 연안에서 20리 떨어진 곳”이라 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의 진시셴(금서현·錦西縣) 첸웨이(前衛) 일대이다.


세번째는 카줘(喀左) 일대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서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시대 여조양(呂朝陽)은 “영지현은 바로 객자심좌익(喀刺沁左翼·지금의 카줘셴)”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차오양(朝陽) 일대설. ‘흠정성경통지(欽定盛京通志)’는 “유성현(柳城縣)은 원래 상나라 고죽국(本商孤竹國也)”이라 했다. 그런데 유성현은 고죽영자(孤竹營子)라는 지명이 보이는 차오양 서남이다. 카줘셴·젠창셴(建昌縣)·진시셴(錦西縣) 등 3개현의 경계 지점이다.


카줘 베이둥에서 ‘고죽’명 청동기가 발견된 곳을 현지 사람들은 구산(고산·孤山)이라 한다. 고죽국 명칭과 관련시켜보면 수상한 대목이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4곳은 한결같이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점과 일치한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은 유민들은 그 무거운 청동기들을 짊어지고 험난한 옌산을 넘었을까.


■ 청동솥(정)의 비밀


“다링허 유역 교장갱 청동기를 봅시다. 모두 세발 혹은 네발 달린 청동솥(정·鼎)을 중심으로 술그릇, 술잔, 물그릇 등 주로 제사 지낼 때 쓰던 예기(禮器)라는 게 특징입니다. ‘기후’명이 새겨진 사각형 모양의 청동솥(방정·方鼎)은 31㎏이나 나가는데….”(이형구 선문대 교수)


여기서는 우선 청동솥을 주목하고자 한다. 주나라가 은을 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구정(九鼎·천자가 도읍에 모신 아홉개의 정)을 주나라 도읍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예전에 복희는 신정(神鼎) 하나를 만들었는데, 통일과 천지만물의 귀결을 뜻했습니다. 또한 황제(黃帝)는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지·인을 각각 상징하셨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9부족)의 금속을 모아 아홉개의 정을 만드셨습니다(九鼎). 어진 군주가 나타나면 정이 출현하고, 사직이 황폐해지면 정은 땅 속에 묻힙니다.”(사기 효무본기) 그래서 구정은 국가를 상징하기도 했다.


발해 연안에서 현지인들의 영향을 받아 형태가 바뀐 귀달린 새 문양의 청동솥(정). <선양 | 김문석기자>


한무제 때의 일. 분음(汾陰·산시성 완잉셴)의 무사(巫師)가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내다 문득 땅을 보니 무언가 갈고리 같은 것이 삐져나온 걸 보고 흙을 파보았다. 지금으로 치면 우연한 기회에 고고학에서 말하는 긴급발굴을 벌인 셈이었다. 그 결과 뜻밖에 ‘고고학적 성과’를 얻는다. 명문은 없고, 꽃무늬만 조각된 솥이 확인된 것이다.


여기서 기자(記者)가 주목하는 대목은 예로부터 동방의 신으로 일컬어진 복희가 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중국인들은 황제 또한 발해문명의 창시자이며, 동이계열이라고 하지 않는가. 황제가 천·지·인을 상징하는 정을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훙산문화(BC4500~BC 3000년)가 연상되지 않는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는 제정일치 시대가 개막된 바로 그 훙산문화.


게다가 BC 3500년 전 유적인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좐산쯔(轉山子)의 청동 찌꺼기(동사·銅渣)와, 탕산(唐山) 다청산(大城山)에서 확인된 BC 2000년 전의 순동(純銅)장식 2점 등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바로 발해문명의 창조자들이 동아시아 청동기 제작의 원조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구정의 경중을 묻다


역시 발해 연안에서 제작된 띠를 두른 귀달린 항아리. <선양 | 김문석기자>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갔다는 것은 인류문명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은(상)은 바로 그 최첨단 무기인 청동기로 하나라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청동 예기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청동솥은 천하통일의 상징이었으며, 천·지·인을 연결하는 신비의 보물이었다. 은(상) 무정제(재위 BC 1250~BC 1192년)의 일. 그가 성탕(상나라 초대왕)에게 제사를 올리자 꿩이 날아와 정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제가 불길하게 여기자 신하 조기(祖己)는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라고 간했다. 무정제는 이 일을 거울삼아 덕정을 베풀었고, 나라가 흥성해졌다. 그 뒤로도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청동솥을 손에 넣으려 했던 역대 황제 및 왕들의 투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시황은 천하를 평정한 뒤 사수(泗水·산둥성 취푸 曲阜에 있는 강)에 빠졌다는 주나라 정을 꺼내기 위해 무려 1000명을 물 속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얻지 못했다.(사기 진시황본기)


또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융족을 멸한 뒤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주나라 도성 교외에서 열병식을 열었다. 때는 바야흐로 천자국인 주나라가 쇠퇴했던 시기. 주 정왕(BC 607~BC 586년)은 신하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장왕(莊王)을 위로했다. 천자이지만 제후인 장왕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초 장왕은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구정(九鼎)의 경중(輕重)’을 묻는다. 이것은 “내가(초 장왕) 구정을 들고 갈 수도 있다”, 즉 “천하가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냐”며 은근히 주나라를 협박한 것이다. 하지만 왕손만은 “(천하를 손아귀에 쥐는 것은) 덕행에 있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주 천자만이 ‘왕(王)’을 칭하였는데 초나라가 무왕(BC 740) 이래 왕을 잠칭(潛稱) 함을 빗댄 말이다.


“덕행을 행하면 구정이 무거워져 들 수 없고, 세상이 혼란하면 구정이 가벼워집니다. 주왕실의 덕정이 비록 미약해졌다지만 하늘의 뜻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주 천자의 권위가 살아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후대 한나라 신하들도 무제에게 “보정만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모셔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을 만큼 정(청동솥)은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더욱이 조상신, 하늘신에 대한 제사를 끔찍하게 여겼던 은(상) 사람들에게는….


랴오닝성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은말 주초의 청동기들. 기자(箕子)족이 가져온 청동기는 물론 발해 연안 현지에서 토착세력(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청동기들도 다수 있다. <선양 | 김문석기자>


■ 기자조선은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자가 이끈 은(상)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 본향으로 도망갔을 때 기자족의 정을 비롯, 예기를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가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은말 주초의 청동기, 즉 기자 일행이 묻은 청동기는 왜 그렇게 정연한 모습으로 발견됐을까.


아마도 천신만고 끝에 청동예기들을 들고와 제사를 지내던 은(상)의 유민들은 모종(周족의 침입 등)의 갑작스러운 변고를 겪었을 것이다. 너무도 급한 나머지 무거운 예기들을 들고 갈 수 없었기에 이것들을 땅 속에 정성껏 묻어두고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 일행은 다시 동으로 동으로 향해, 중국학계가 정설로 여기는 대동강 유역에서 기자조선을 창업했을까.


“아니지. 은(상)의 청동기는 랴오허(요하) 이동(以東)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랴오허를 건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기자조선의 영역은 랴오둥 이서(以西) 지역이었다는 뜻이에요.”(이형구 교수)


여기서 한 가지 착안해야 할 대목은 베이둥이나, 산좐쯔, 샤오좐쯔 등에서 출토된 은말 주초의 청동기 가운데는 은 유민들이 남부여대하며 가져온 제기와 함께 현지, 즉 다링허 연안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들이 일부 보인다는 점이다.


베이둥의 대취발형기(帶嘴鉢形器·주둥이 달린 그릇)와 산좐쯔의 일부 청동기가 그렇고, 샤오좐쯔의 반형정(盤形鼎·쟁반 형태의 솥), 관이호(貫耳壺·귀달린 항아리), 압형기(鴨形器·오리 형태의 그릇) 등이 그렇다.


즉, 신주모시듯 제사용 청동예기를 가져온 은 유민들이 현지 토착문화의 형태로 청동기를 제작, 고향 사람들과 ‘알콩달콩’ 살았다는 뜻이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고죽국과 고조선의 관계이다. ‘사기’ 백이열전은 고죽국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운 성탕 때 상의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상한 대목이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武王及封箕子於朝鮮)”는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사이다. 이는 “무왕이 (이미 존재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기자를 봉했다”고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명나라 사람 함허자(涵虛子)가 주사(周史·주나라 역사)를 인용한 “기자가 중국인 5000명을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갔다(入朝鮮)”는 기사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주나라 무왕 때, 즉 BC 1046년 이전부터 이미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 고죽국은 (고)조선의 영역


우리는 이미 BC 6000년부터(차하이·싱룽와 문화) 발해 연안 북부, 즉 다링허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를 중심으로 한 발해문명의 맹아가 싹텄음을 보았다. 그 문화는 단·묘·총으로 대표되는 제정일치 시대를 개막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 그리고 대규모 석성과 적석총을 특징으로 한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로 이어졌음을 논증해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동이의 문명이다.


그리고 그 발해문명의 창조자 가운데 일파가 중원으로 내려와 한족인 하나라를 꺾고 은(상)나라를 세웠다.(BC 1600년) 그런 뒤 다시 한족의 주나라에 나라를 잃은 기자가 조상 땅인 발해 연안으로 돌아간 것이다.(BC 1046년)


그렇다면 조선과 고죽국은? 기자(記者)는 일단 (고)조선과 은(상), 고죽국이 모두 동이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싶다. 이형구 교수는 ‘고죽국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한다.


“고죽국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원래는 옌산산맥 남록, 즉 만리장성 밑(롼허 하류 누룽셴·盧龍懸)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도 백이·숙제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도 옌산의 일부였을 것이고….”


이 고죽국이 BC 1600년 무렵 중원에서 은(상)을 건국한 성탕이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바로 그 고죽국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무슨 변고가 생겨 옌산을 넘어 카줘 일대로 둥지를 옮긴 것이 아닐까. 같은 동이족의 나라인 (고)조선의 영역으로….


물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고죽국이 카줘 일대로 옮겨간 것일 수도 있다. 고조선 문화인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부터 시작. 하한은 늦게 잡으면 BC 1300년 무렵)와 기자족의 이동에 따라 은말 주초의 청동기가 성행하는 BC 11세기와는 약 100~200년의 공백기가 있다. 이 때가 바로 고조선의 세력이 약화된 시기가 아닐까.



<선양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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