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523174548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32) 천자를 칭한 조선
입력 : 2008.05.23 17:45 수정 : 2008.05.23 17:45
연나라와 대등했던 고조선의 위세
만리장성 너머 랴오닝성 젠창셴에서 확인된 청동단검. 고조선 문화인 청동단검 문화를 받아들인 연나라 장군 진개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선양 | 김문석기자>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韓)조의 내용을 조목조목 풀어보자. 기승전결을 갖춘 베스트셀러 소설 같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연나라가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欲東略地),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亦自爲王) 병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周)’의 왕실을 지키려 했다.”
연나라가 제·조·위·중산국 등 다른 네 나라와 함께 왕(王)을 칭한 것은 BC 323년이었다. 왕을 칭했다는 것은 이미 주나라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나라가 왕을 칭하자 조선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면서 연나라가 동쪽땅, 즉 조선땅을 노리자, 조선이 도리어 주(周)왕실을 지킨다는 구실로 연나라 타도를 외쳤다는 뜻이다.
“(조선이 연을 공격하려 하자) 대부 예(禮)가 ‘절대불가하다’고 간하자 (왕은) 공격을 멈췄고, 대부 예를 연나라에 보내 이야기하니 연나라도 (조선에 대한 공격을) 그쳤다.”
조선왕이 연나라 타도를 외치자 대부(大夫) 예(禮)가 강력하게 만류했다는 얘기다. 조선왕은 공격의 뜻을 철회한 뒤 대부 예를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연나라는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에 격분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유세가들이 세치 혀로 천하를 주물렀던 전국시대 중기. 조선의 유세가 예는 화려한 언변으로 연나라왕을 녹여 연의 조선침공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조선의) 자손들이 교만해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 그 땅(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攻其西方), 땅 2000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얻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 조선왕 비(否)가 즉위했다.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조회에 참석하지는(알현하지는) 않았다(不肯朝會).”
이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는 마침내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략, 2000리나 되는 땅을 차지했다. 연나라 강역도를 보면 연나라는 한반도 청천강(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본 것)까지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조선의 세력은 악화됐다. BC 221년 급기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조선은 크게 두려워 해서 진나라에 복속했지만 진시황을 직접 찾아가 알현하지는 않았다.
■ 연개소문을 떠올리는 이유
일단 여기까지의 ‘위략’ 내용이 담고 있는 속뜻은 무엇일까.
다링허~랴오허 사이에 140㎞나 뻗어있는 요택(遼澤). 당나라군이 고초를 겪은 곳으로 유명하다.
“BC 4세기에서 BC 3세기 사이 조선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조선이 ‘감히’ 천자를 뜻하는 ‘왕’을 스스로 칭했잖아요. 연나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 게다가 연나라가 조선을 우습게 보고 공격하려 하자, 조선은 ‘주 왕실의 존숭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연나라를 오히려 공격하려 들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조선의 대부 예의 외교로 양국은 충돌을 면했지만, 악감정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었다.
“당시 기자조선-연나라 관계로 훗날 고구려-당나라 관계를 떠올릴 수 있어요.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 그리고 기자조선의 왕과 그 자손들은 닮은 꼴로 중국과 대립한 것이거든….”
하지만 연나라는 BC 314년 제나라와 중산국의 침략 때문에 존망의 위기에 섰던 터라 조선을 넘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중흥군주인 소왕(昭王·재위 BC 312~BC 279년)이 즉위했고, 마침내 BC 280년을 전후로 진개를 파견, 조선 땅 2000리를 공략하고 랴오시(遼西)·랴오둥(遼東), 한반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고대사를 둘러싼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하는 셈이다. 즉 적어도 BC 280년 무렵까지는 연나라가 랴오둥(요동)은 물론 랴오시(요서)까지도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수수께끼 하나. 과연 연나라 진개 장군은 당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 청천강까지 진출했을까.
■ 둥다장쯔 유적의 비밀
지난 2002년 봄, 당시 궈다순(郭大順) 랴오닝성 문물국장은 마침 선양(瀋陽)을 방문했던 이형구 교수에게 씩 미소를 흘렸다.
“이 선생, 하나 재미있는 게 나왔어요. 청동단검이 나왔는데, 이 선생이 보면 아마 고조선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농담조였지만 흥미로웠다. 이형구 교수는 마침내 ‘2000년 중국 중요고고발현’이라는 약(略)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중국문물국이 2000년 발굴한 중요 유적 24곳에 대한 약보고서였어요. 그런데 만리장성을 넘어 다링허(대릉하)로 가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 젠창셴(建昌縣) 둥다장쯔(東大杖子)촌에서 전형적인 청동단검(후기형식·BC 4세기 말~BC 3세기 중엽)이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었어요.”
마을의 거리와 식당에서 모두 54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서울 풍납토성처럼 이곳도 보존과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확인되었던 터라 학자들의 접근이 무척 껄끄러웠다.
“지금도 현장은 볼 수 없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궈다순씨가 반농담조로 말했듯 한국 학자가 가면 고조선과 연결시키려 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고….”
문제는 (고)조선의 전형적인 석곽묘와 손잡이를 황금으로 만든 청동단검은 물론 전국시대 후기(연나라)의 전형적인 청동기들이 함께 나온다는 뜻이었다.
“약보고서의 결론을 보면 흥미로워요. 우선 고조선의 대표문화인 청동단검들이 분포한 가장 서남단에 위치한 유적이라는 점, 그리고 고분의 분포가 광활하고 묘 주인의 신분이 높은 점 등을 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연나라 시대의 군사장령(軍事將領), 즉 장군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해두었어요.”
이 교수는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연나라가 파견한 장군이 이곳에서 현지인, 즉 고조선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뒤 죽어 묻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기자(記者)는 이쯤해서 BC 280년 무렵 조선을 공격한 진개 장군이 퍼득 떠오른다.
“무덤의 규모나 문화 양상을 보면 연나라 장수 진개의 무덤일 수도 있지. 시대와 유물양상 등을 보면….”
앞서 인용한 ‘위략’의 내용, 즉 “진개가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攻其西方)”는 것과 진창셴 유적을 검토하면 만리장성을 넘으면 곧 고조선(기자조선) 의 영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랴오허를 넘지 못한 연나라
그렇다면 진개의 침략(BC 280년 무렵) 이후 연나라는 랴오둥을 건넜을까. 춘추시대 때 만리장성 너머 랴오시(遼西) 지방에서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았듯, 진개의 침입 이후에도 랴오둥 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연나라 유적 및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형구 교수는 사기 ‘흉노열전’을 주목한다.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공격, 1000리를 패주시켰다”는 기사.
“이 동호라는 표현이 혹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닐까. 옛 기록에 호(胡)=이(夷)라고도 했어요. 또 진개가 조선을 치고 2000리를 넓혔다는 기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만 나오거든. 나머지 역사서는 모두 동호 1000리만을 기록했어요. 이 동호가 나는 조선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진개는 2000리가 아니라 1000리, 즉 랴오허 동쪽만 점령했다는 얘기다.
중국의 고고학자 천핑(陳平)은 ‘연문화(燕文化)’라는 책에서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해석한다.
“이우뤼산(醫無閭山·랴오시 푸신:阜新)을 기점으로 동쪽으로는 전국시대 연나라 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유물이 보이지 않는다. 연나라 희왕(喜王) 33년(BC 222년) 랴오둥으로 피신하기 이전에는 연나라가 진정으로 랴오허(遼河)를 건너 랴오둥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BC 222년은 연나라 희왕이 진나라의 공격을 피해 랴오둥 지역으로 피신했던 때였다. 이는 진개가 조선을 침략했지만 연나라는 60년 가까이 랴오허를 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진개의 침략 이후 조선은 약해졌으며, 이후 천하통일을 완성한 진나라가 두려워 복속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조선은 자존심만큼은 잃지 않았다.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삼국지 위지 동이전)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천하를 떨게 한 진시황 치하인데도 직접 가서 무릎을 꿇지는 않은 것이다.
■ 위만의 조상은 동이족?
이제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 조선열전을 검토해보자.
“(조선에서는) 비왕이 죽고 준왕(準王)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는) 20여년 뒤 진섭(陳涉)과 항우(項羽)가 반란을 일으키자 연·조·제나라 백성들이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하니, 준왕이 이들을 서쪽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때 연나라 왕으로 책봉된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뒤 준왕에게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에게 중국망명인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한다’고 간청했고, 준왕은 은혜를 베풀어 위만을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봉했다.”
이것은 위만의 등장에 관한 기사다. 준왕은 ‘조선의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믿고 그에게 박사 벼슬을 내리고 서쪽 100리의 땅까지 내주며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어 세력을 키운 뒤 급기야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병사들이 열길로 쳐들어옵니다. 제가 가서 막아야겠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위만은 돌아가 준왕을 공격했으며, 패배한 준왕은 바다를 건너 한(韓·마한)의 땅에 들어갔다.”
BC 194년의 일이다. 가히 쿠데타였다. 위만은 준왕을 속여 서쪽 변방(아마도 랴오둥 지역이었을 것)에서 세력을 키운 뒤 군대를 이끌고 준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이로써 BC 1046년 무렵 고조선과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기자조선은 900년 만에 정권을 위만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위만이 사서에 나온 대로 중국인이었을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사서를 종합하면 위만은 다른 1만명과 함께 상투를 틀고(추결·추結), 호복(胡服·오랑캐의 옷)을 입은 뒤 조선의 준왕에게 망명했다. 당시는 진나라 말기 혼란 상황. 옛 제·연·조나라 백성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들었고, 위만도 한나라 초기 혼란기에 수 천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둥지를 틀었다.
”중국이 어지러울 때 많은 무리들이 옌산을 넘고, 랴오허를 넘어 몰려들었어요. 험준한 옌산과, 폭이 140㎞나 되는 지긋지긋한 요택을 둔 랴오허 유역을 건넌다는 것은 쫓는 무리들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을 테니까.“(이교수)
동이계인 중산이 마지막으로 망한 때는 BC 296년. 역시 동이족인 고조선이 진개의 침략으로 랴오시(요서·療西)를 잃었던 것이 BC 280년 무렵. 이후 조·연·진의 영역에서 삶을 부지했던 동이계 사람들 역시 변란이 생겼을 때 같은 종족을 찾았을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과 그 수 천 무리도 ‘믿는 구석’, 즉 동이의 나라, 고조선으로, 고조선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마치 은(상)의 멸망 이후 본향을 향해 총총히 떠났던 기자(箕子)처럼….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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