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13174719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35) 에필로그-발해문명이 던진 메시지
입력 : 2008.06.13 17:47 수정 : 2008.06.13 17:47
갇힌 역사를 넘어 동이족 8000년을 발굴하다
훙산문화의 중심 뉴허량(牛河梁) 유적 신전에서 출토된 여신상. 뉴허량에서는 곰형 옥기와 곰뼈, 곰형 소조상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웅녀(熊女)의 원형일 수도 있다. <뉴허량 | 김문석기자>
바로 이맘때였다. 기자는 지난해 비무장지대 일원, 즉 민통선 이북지역을 탐사 중이었다.
한창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이라는 기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의 와중에 방치되고 훼손되고 있는 비무장지대 일원 문화유산을 찾는 기획이었다.
■ 휴전선 너머로 떠난 역사기행
기자가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찾아간 곳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육군박물관 등이 1991~2000년 사이 지뢰지대를 뚫고 조사했던 문화유적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아도 모골이 송연하다. 상당수 답사지역이 지뢰지대였고, 조사한 지 10~20년이 흘렀기에 조사 당시 지뢰지대를 뚫고 개척했던 좁디좁은 길이 제멋대로 자란 풀과 나무 때문에 어사무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순간 길을 잃기도 했다. 땅거미는 사납게 밀려오지, 발밑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허겁지겁 빠져나온 뒤 밤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상황을 복기하면 “미친 짓을 했구나”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군사분계선을 딱 반으로 가른 채 철원 풍천원 들판에 방치된 태봉국 도성은 손만 뻗으면 잡힐 듯했다. 철책선 너머 김화 전골총(병자호란 때 전사자들을 모은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한걸음이면 다가갈 수 있는 그렇지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그랬다. 우리는 저 철책선 너머로는 단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그런데 민통선 기획을 하던 도중 기자는 또 하나의 기획을 맡게 되었다. 바로 이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기획탐사였다. 러시아 연해주~바이칼호~중국 동북부~발해연안까지 1만㎞를 달리면서 이른바 ‘한민족의 시원’을 찾는 탐사였다.
비행기를 타고 훌쩍 날아간 곳은 연해주 체르냐치노 유적이었다. 러시아에서도 궁벽한 곳. 곰이 간간이 출몰하고, 모기떼가 들끓는 드넓은 초원지대. 그런데 이곳이 발해(AD 698~926년)의 솔빈부(率賓府·발해의 지방통치조직의 하나)가 존재했던 곳이라 하지 않는가. 더구나 여기까지 발해인과 말갈인이 오순도순 함께 살았던 흔적, 즉 발해인의 돌무덤과 말갈인의 흙무덤이 사이좋게 조성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BC 3세기쯤으로 보이는 옥저인의 쪽구들과 발해인의 쪽구들이 같은 문화층에서 보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 유적은 1937년 소련 정부에 의해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까지 고려인의 터전임을 보여주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말처럼 이 체르냐치노는 옥저~발해·말갈~고려인이 2300년 동안 끊길 듯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명맥을 끈질기게 이어온 드라마틱한 유적인 것이다. 기자는 체르냐치노 마을의 야산에 올라 드넓은 평원과, 우리 역사의 맥을 묵묵히 지켜보며 흐른 솔빈강(라즈돌라야)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한낱 철책선에 가로막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이 ‘처량한 인사여!’. 철책선 핑계만 댈 수 있을까. 식민·분단·냉전사관의 견고한 틀에 갇혀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해온 딱한 신세여!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 남부에 국한시켜 해석하고, 그 좁은 틀을 벗어나 폭넓게 역사를 보려고 하면 무슨 국수주의니 지나친 민족주의니 하면서 ‘재야사학’으로 몰아붙여 폄훼하기 일쑤이지 않는가.
■ 버려야 할 순혈주의
잠시 감상을 깨고 또 하나 던져버려야 할 망령이 있었으니 바로 순혈주의였다.
발해인과 말갈인이 오순도순 모여 산 체르냐치노 마을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한민족의 시원을 찾는’ 기획이라면 그것은 빨리 저 도도히 흐르는 솔빈강에 던져버려야 할 국수주의의 망령일 것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의 역사는 결코 한반도, 그것도 한반도 남부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 역사는 결코 한민족만의 역사가 아니라 주변 종족과의 융합을 통해 창조해낸 역사라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탐사 내내 자칫 빠지기 쉬운 이른바 지나친 민족주의의 유혹과, 역사를 찾아서 무엇하느냐는 식의 냉소 및 허무주의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었다.
체르냐치노를 떠나 바이칼호~울란우데~자거다치~하얼빈 등을 거치면서 기자는 “한국인과 (우리는) 매우 닮았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런데 탐사 도중 만난 몽골계 러시아 학자들은 “한국인의 뿌리가 몽골인이 아니라 몽골인의 뿌리가 한국인일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그랬다. 이것은 이른바 민족문화의 윈류를 북방에서만 찾는 무비판적인 시도에 대한 현지 전문가들의 죽비 소리이지 않는가.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단군신화는 한민족만의 신화가 아니라 동이계열의 공통신화이며, 이른바 게세르 계열의 신화 가운데 가장 먼저 채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1280년 무렵)는 게세르 신화의 채록(1712년)보다 500년 가까이 앞서며, 그 내용도 특정 종족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여러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 공동가치를 지향한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주채혁 세종대 교수는 “적어도 몽골의 역사는 발해·말갈 유민의 역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즉 칭기즈칸의 선조가 발해·말갈의 유민이고, 칭기즈칸(1162년 탄생)의 12대 선조(700~800년?)부터 쓴 ‘몽골비사’의 내용은 아무리 늦어도 BC 1세기 신화인 유화부인·주몽설화보다 800~900년가량 늦는다는 것이다.
■ 발해문명의 의미
러시아~중국 동북방을 돌아 발해연안에 닿은 기자는 BC 6000년부터 동이족이 창조해낸 발해문명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목도하고 파천황의 경지를 경험한다. 30년 넘게 발해문명을 연구해온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이끎에 기자는 차하이(査海)·싱룽와(興隆窪)마을, 즉 동이의 본향을 목격한다. 빗살무늬·덧띠무늬 토기와 용신앙·옥문화의 탄생, 그리고 씨족마을의 형성 등….
훙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의 중심지, 즉 제단·신전·적석총 등 정신문명의 3위일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뉴허량(牛河梁) 유적…. 기자는 이곳에서 웅녀(熊女)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여신상과 곰뼈, 곰 소조상 등을 목도했고, 찬란한 옥기문화를 통해 일인독존의 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개막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을 중심으로 한 동이족의 예제가 탄생했고, 청동기의 맹아가 엿보이는 시기였다. 단군신화의 원형을 벌써 이 훙산문화 시대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중원의 황허(黃河) 문명보다 앞선 문명이 그들이 그토록 오랑캐의 땅으로 폄훼했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출현하자 그야말로 충격에 빠진다. 결국 통고(痛苦)의 과정을 거친 중국학계는 “중국문명의 효시는 바로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이었고, 바로 이 랴오허 문명과 중원의 황허문명 등이 융합해서 오늘날의 중국문명을 이뤘다”고 견강부회한다. 이른바 다원일체론이다. 중국학계는 엉뚱하게도 중국인의 조상으로 추앙했던 황제(黃帝)를 훙산문화의 대표로 앉힌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는 BC 2000년 이전부터 거대한 석성을 쌓고 청동기의 예제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 즉 조선(단군)시대를 연다. 츠펑(赤峰) 싼줘뎬(三座店)에는 본 치(雉)만 13개나 되는 거대하고 견고한 석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하나, 수이서우잉쯔(水手營子)에서 확인된 청동예기, 즉 청동꺾창도 의미심장한 유물이다.
“어쩌면 그렇게 고구려와 백제의 석성 축조방식과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왕이 지녔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꺾창의 경우 예제의 완성을 뜻합니다.”(이형구 교수)
그런데 만리장성 이북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단군)조선의 일파 중 하나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중원으로 향한다. BC 1600년 무렵이다. 최첨단 청동기를 장착한 동이의 일파는 중원의 하(夏)나라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은(상·BC 1600~BC 1046년) 시대의 개막이다. 그후 550여년간 중원은 동이족의 차지가 되었다. 그들은 중원 민족과 갑골문자를 창조하고, 찬란한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다. 정저우(鄭州)와 옌스(偃師), 인쉬(殷墟) 등에 대규모 궁전을 건설하고 노예제를 채택한다.
달은 차면 기우는 법. 은(상)의 말기에 세력을 키운 주(周)나라가 은(상)을 멸하고 다시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웠다. 은(상)의 왕족인 기자(箕子)는 종선왕거(從先王居), 즉 본향인 발해연안으로 떠난다. BC 1046년 쯤, 즉 BC 11세기 무렵이다.
은(상)의 엘리트 계층인 기자(箕子)는 단군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에 단군은 정권을 내주고(잃고) 장당경(藏唐京)으로 은신한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토착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이른바 난산건(南山根)문화를 창조한다. 또한 춘추 전국시대의 개막(BC 770년)으로 전쟁의 시대가 도래하자 예기보다는 무기가 성행하게 된다. 훗날 ‘한국형 세형동검’으로 발전하는 발해연안식 청동검(비파형 동검)이 탄생하는 것도 이때다. 석관·곽묘와 적석총, 복골문화 등 동이계 특유의 문화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 기자조선은 BC 323년 천자를 칭하고, 중원의 연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 사이(전국시대) 만리장성 이남 중원에서는 기자(箕子)의 후예로서 전국 12웅의 위세를 떨친 작지만 강한 나라 선우·중산국이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식민지가 되기도 했던 선우·중산은 80여년간(BC 380~BC 296년) 전성기를 이룬 뒤 멸망한다.
한편 만리장성 이북의 기자조선은 900년 가까이 존속하다가 연(燕)나라 망명인인 위만에 의해 멸망한다. BC 194년 무렵이다. 그러나 “위만도 어쩌면 중산국 혹은 조선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이형구 교수)도 유념해야 한다.
기자조선을 이은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년)에도 조선은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중개무역을 독점하고 한나라 황제를 우습게 여기는 등 기세를 올리다가 1년간에 걸친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끝내 멸망한다.
한편 저 멀리 동북방에는 은(상)의 풍습을 빼닮은 군자의 나라 부여(BC 3세기~AD 494년)가 어느새 둥지를 틀었다. 점복, 제사, 음주가무, 은(상)의 역법 사용 등…. 그래, 그렇게 700년 넘게 꽃핀 부여의 역사가 다시 고구려·백제로 이어지고, 또 그 역사가 지금 이 순간까지 흘러오고 있는 것이다.
■ 식민·분단·냉전사관을 극복하며
자, 이제 눈을 들어 시야를 좀 넓히자. 그러면 한반도 남부, 철책선에서 꽉 막힌 우리 역사의 체증이 좀 뚫릴 것이다. 이번 탐사 내용이 100% 다 맞는 해석이라는 뜻인가. 절대 아니다. 학문은 절대진리가 없다. 이번 탐사가 식민사관·분단 및 냉전사관으로 갇혀버린 우리네 사고의 폭을 그저 넓혀주는 몫을 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일을 생각하기 위함이다.”
불멸의 역사가 사마천이 발분(發憤)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쓴 까닭이다.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미래의 길목을 가로막는 전봇대일 뿐이라는 인식에 대한 2000년 전 사마천의 대답이다. 일국의 지도자가 취임하자마자 먼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자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목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명기할 방침을 세우는 것으로 대답했다. 또한 우리 안에서 탈민족주의, 탈역사주의가 똬리를 틀기 시작할 때 중국은 발해문명을 중국의 문명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우리는 아직 식민주의·분단주의·냉전주의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단순히 돈의 가치만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제대로 된 역사인식없이, 그리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은채 돈만 벌면 그뿐이라는 사고가 지금 이땅의 백성들에게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지 않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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