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중국 은나라의 현인으로 주나라로부터 조선에 봉함을 받았다고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서는 “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壽一千九百八歲)”고 하였다.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라고 하였다.
기자의 실체와 동래(東來)여부에 관하여 여러 연구가 있었다. 먼저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기자가 동쪽으로 온 것을 반대하는 견해가 있다. 즉 문헌상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시작되었다는 기원전 12세기경에는 한반도에 무문토기(無文土器)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역사상으로는 이들을 예맥(濊貊)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조선이 있던 시기는 지석묘(支石墓)와 석관묘(石棺墓)의 시대와 겹치고 있는데, 이러한 유적들은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예맥인들이 만든 것이다. 지석묘와 석관묘는 그 분포와 연대가 기원전 10세기 이전, 즉 기자의 동래(東來)와 거의 맞먹는 시기이지만 중국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으며, 그 곳에서 나오는 청동기의 화학적인 성분도 중국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즉 고고학적인 면에서 볼 때 기자의 동래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김정배, 1973)
소위 기자의 동래(東來)를 부정하면서 그가 세웠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주체를 한민족 토착사회의 씨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이들은 요동방면에서 아사달로 침투하여 아사달사회의 지배씨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대신 이 사회의 신(新)지배씨족으로 등장하였다. 신지배씨족은 중국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들의 교체연대는 춘추시대 초엽으로 추측된다. 그 후 신지배씨족은 아사달의 칭호를 아역(雅譯)하여 조선이라 일컫고, 전국시대에 연(燕)이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자, 조선후(朝鮮侯)도 왕을 자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잠부론(潛夫論)』 권9 지(志) 성씨조(姓氏條)의 기록을 근거로 조선에서 한씨(韓氏)의 성을 칭하고 있었는데, 위만의 침입으로 인하여 남한(南韓)지방으로 옮겨갔다. 남한 지방으로 옮긴이는 준왕(準王)이므로, 준왕의 성이 한씨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준왕의 성이 기씨(箕氏)라는 확증은 없으며, 기자란 명칭에서 기(箕)는 성이 아니라 봉국명(封國名)이고, 자는 이름이 아니라 작명(爵名)을 가리킨다. 그리고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나서 조선왕(朝鮮王)이 아니라 한왕(韓王)이라고 칭한 것은 그를 몰아낸 위만이 대신 조선왕이라고 자칭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소위 기자조선의 대두는 토착 사회 내에서의 세력 교체이며 이것을 한반도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성립된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이병도, 1976)
기자족(箕子族)의 이동에 주목하여 그 주력이 동방으로 이동하였음을 주목한 견해가 있다. 기자는 동이(東夷)로서 그를 지도자로 하는 집단이 은말주초(殷末周初)에 주의 압력을 받아 동쪽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이동과정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난하 하류의 고죽국(孤竹國)이었다. 기자족은 오랜 세월에 걸쳐 요서와 요동을 동진하여 평양 지역에 도달하였는데, 문헌상에 나오는 “창려(昌黎)의 험독(險瀆)”은 대릉하 유역의 조양(朝陽)과 의(義)지역, “광녕(廣寧)의 험독”은 요하구(遼河口)의 반산(盤山)지역, “낙랑(樂浪)의 험독”은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그 이동과정에 있어 일정기간의 근거지로 파악하였다. 기자족의 이동과정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므로 기자가 직접 영도하는 집단이 평양 지역으로 왔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기자를 조신(祖神)으로 섬기고 기자전승을 보유한 집단이 오랜 세월 끝에 평양 지역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 기자족이 평양 지역에 도달한 시기는 전국시대 말에 연이 동방으로 침략에 옴에 따라, 이에 요서와 요동에 자리잡았던 기자조선이 점차 후퇴한 것과 때를 같이한다고 보았다.(천관우, 1989)
은말주초(殷末周初)에 해당하는 시기인 기원전 12-11세기경에 대릉하 유역에는 주족(周 族)으로부터 밀려난 은의 왕족인 기자를 대표로 하는 은의 유민에 의하여 기자조선이 건국되었고 이 같은 기자조선은 기원전 2세기 준왕(準王)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0년을 지속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동북지역 특히 발해 연안의 북부에서 발견된 은말과 주초의 유적, 유물들이 기자 및 고죽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 대릉하 유역을 기자의 초기 정착지인 기자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대릉하 유역인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북동(北洞)유적에서 발견된 “고죽(孤竹)”과 “기후(箕侯)”라고 새긴 청동기가 발견된 것을 가지고 기후를 기자로 보아 은말주초에 은의 유민들이 고죽국으로 도망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하였다.(이형구, 1996)
한편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에 기자를 비롯한 은족(殷族)의 일부가 대릉하 유역 일대로 진출하여 한동안 존속하였다가, 단군조선을 비롯한 토착세력의 저지를 받아 중국내지로 후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중국 땅으로 후퇴한 뒤 중국의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늦어도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소멸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대릉하 유역에 기자국(箕子國)이 실재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있는,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내용은 기자국의 소멸 이후에도 단군조선이 존속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서영수, 1999)
한편 은의 유민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할 당시 이 일대에는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주민들이 북방계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말하면서, 대릉하 유역에 기자조선이 성립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자조선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고죽이나 기자 집단 등은 대개 은의 유이민이 중심이 된 집단이었지만, 결국은 토착 융적(戎狄)문화에 흡수되어 존재했다고 하였다.(송호정, 2000)
참고문헌
김정배, 1973,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고려대학교출판부.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이형구, 1996, 「渤海沿岸 大凌河流域 箕子朝鮮의 遺蹟?遺物」『古朝鮮과 扶餘의 諸問題』, 신서원.
서영수, 1999,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東洋學』29.
송호정, 2000, 「고조선 중심지 및 사회성격 연구의 쟁점과 과제」『韓國古代史論叢』1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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