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0306.22029195744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48> 고조선에 미친 러시아사람

한국인들, 우리역사 공부하는 외국인 얕보는 경향 있어

배척풍토로 한국학 '우물안 개구리'

동구권 연구자 지원 등 이뤄져야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03-05 19:58:56 |  본지 29면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찐이 근무했던 시베리아과학원 고고민족학연구소와 경제학 연구소. 필자가 유학한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 남한에서는 고조선의 실체에 회의를 품는 사람도 많았고, 변변한 전공자 하나 없었다. 고조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학계의 영향을 받은 강단사학과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구체적인 증거없이 고조선의 실체를 주장하려는 재야사학계가 소모적인 논쟁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때에 고조선에 미쳐서 북한, 중국의 고고학 자료와 역사 자료를 두루 섭렵한 러시아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리 미하일로비치 부찐이다. 그는 동방학하면 중국이나 일본을 생각하던 당시에 놀랍게도 한국의 고대사를 전공했고, 그 중에서도 고조선에 미친 사람이었다. 부찐이 한국사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출생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그는 당시 그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그 과정에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한문을 습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학교에서 배운 불어마저도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원래 경제학 전공이었는데, 그의 탁월한 언어적 능력을 알게 된 고고민족학 연구소의 오클라드니코프 소장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고고학 자료를 여러 언어로 번역을 부탁했고, 이것이 점차 고조선의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국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봤자 북쪽은 소련의, 남쪽은 미국의 위성국가이며 그 문화도 대략 중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일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기원전 7~2세기에 중국과는 별도의 문화와 국가가 만주~한반도에 존재했었다는 그의 연구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부찐의 연구는 지금 보아도 놀랍다. 고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설이나 독창적인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고조선의 국경, 수도의 위치 등 한국사람이 읽어도 잘 이해가 안 갈 법한 내용들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1982년에 '고조선'을, 그리고 1985년에 '삼국시대'라는 책을 내고는 아쉽게도 고고학계에서 사라졌다. 1980년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고고학을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모양이다. 이후 그는 이르쿠츠크로 이사해 본업인 경제학을 다시 전공, 대학의 경제학부장까지 맡는 등 경제학자로 성공했다.


우리는 외국 사람이 우리 역사를 한다면 뭐 얼마나 알겠는가 하고 얕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필자가 10여 년 전에 한 한국학학술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러시아의 노학자의 발표에 대해서 한 한국인 교수가 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적이 있었다. 그 한국인 교수는 왜 '음양(陰陽)'을 '인양'으로 하는가, 한문을 제대로 모르면서 한국학을 할 수 있는가 따지듯이 묻는 게 아닌가. 척박한 러시아에서 한국학을 심으려고 평생을 노력한 그 러시아 교수님은 기가 막혀서 떠듬떠듬 한국말로 답변을 했지만 제대로 전달은 안되었다. '음양'을 '인양'으로 한 것은 러시아어 표준어가 '인양'이기 때문이었다. '풍수'도 러시아어 표준어로는 '펀슈이'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학술대회 내내 러시아 학자들을 아랫사람이나 대학원생 대하듯 하는 한국 학자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외국에서 한국학 전공자가 너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외국 학자의 연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풍토에도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서양사 학회에 유럽 사람이 와서 유럽을 알고나 하시는 소리입니까 하던 적이 있던가? 한국학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 식이었나를 보여주는 예였다. 특히 소비에트 시절 한국 같은 약소국을 연구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평생 자기 나라에서 대접 제대로 못 받고 한국에서도 지원이 거의 없으니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만 연구한다. 요즘 한국 정부의 지원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한국학에 대한 역사가 유럽에서 제일 깊은 러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필자가 대학교 때에 부찐의 '고조선'을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꼭 뵙고 싶었다. 하지만 필자가 유학한 노보시비르스크의 고고학연구소에서도 그가 옛날에 연구소를 그만두어서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뒤늦게 그가 이르쿠츠크에 산다는 것을 알았지만, 쉽게 갈 기회는 없었고 결국 그는 2002년에 세상을 떴다. 통탄할 일이다. 2007년 필자는 한 연구회에서 부찐의 고조선에 대해 발표하면서 다시 그의 연구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부찐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연구에 대한 관심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고조선은 확고하게 한국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사서에서 중국에 대항하는 위만조선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그의 책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한국고대사를 대표하는 저작이 되었고, 고조선은 한국의 역사라는 것을 러시아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도 결국 부찐의 저작 덕분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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