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27170940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충남 공주 장선리 유적의 비밀

공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 입력 : 2008.06.27 17:09 


개미굴을 닮은 마한시대 지하 주택단지



“선생님은 ‘발굴복(福)’이 있으셨나요?”(기자)


“허허, ‘발굴복’이라. 글쎄…. 그저 ‘소소(So So)’라 할 수 있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하기야 천하의 김원룡 선생도 생전에 ‘난 발굴운이 없는 고고학자’라고 한탄했다가 (1971년) 무령왕릉 발굴로 소원을 풀었다지요?”(기자)


“그래요. 스승님(김원룡 선생)이 쓴 글을 보면 ‘난 발굴운이 없다. 그래서 자주 금은보화를 잔뜩 발굴하고 미쳐 날뛰는 꿈을 꾼다. 꿈에서나마 운 없는 학자의 한을 푸는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술회하신 적이 있었지.”


지난 17일 충남 공주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기자와 조유전 관장은 이런 뜬끔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무슨 발굴복, 발굴운 타령이냐고?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 즉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훈 연구실장(46)을 떠올리며 기자가 화제를 던진 것이다.


“그 사람은 정말 발굴복이 대단한 것 같아요.”


“글쎄 단순히 발굴복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한 곳에서 묵묵히 한 우물을 판 사람에게 준 하늘의 선물이라 할 수 있지요. 허허.”


이훈은 그런 뜻에서 기막힌 사람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금동관(7점) 가운데 무려 3점이 그의 트라우얼(trowel·모종삽 같은 발굴도구·고고학자들은 그냥 트롤이라 한다) 끝에서 나왔다. 백제금동신발은 13켤레 가운데 4켤레가 그의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에게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가 발굴했던 유적 가운데 무려 4곳이 사적으로 지정된다. 4곳은 공주 장선리(사적 433호)·공주 수촌리(460호)·서천 봉선리(473호)·서산 부장리(475호) 유적이다. 가히 대단한 발굴복이다. 그가 발굴했던 곳 가운데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2곳에 대해 차근차근 살펴보자.



■ 하늘이 낸 ‘발굴福’?


2000년 9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발굴조사 의뢰가 떨어졌다. 조사장소는 공주 탄천면 장선리와 안영리 일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의 휴게소 부지였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개발사업 등을 펼치게 되면 그에 앞서 문화유적 조사를 한다. 그런데 이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는 공주대박물관 등이 한 바 있는데, 이미 청동기~백제시대에 이르는 구덩이 유구(竪穴遺溝)와 토기편들을 확인한 바 있다.


이렇게 지표조사 후 유적의 징후가 확인되면 시굴조사~정식발굴의 절차가 진행되며, 이 조사를 충남도 출연기관인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맡은 것이다. 하지만 조사단은 이 발굴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10월 중순까지 표면 흙을 걷어내면서 역시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백제 주거지를 다시 확인했지만 그저 구덩이 유구라는 점 외에는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10월23일. 구덩이 유구를 유심히 살피던 이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했어요. 구덩이는 맞는데 보통의 구덩이와는 다르다는 느낌이랄까.”(이훈)


구덩이 안에 또 다른 구덩이가 뚫려 있지 않은가. 단순한 수혈유구, 즉 사람들이 땅을 파고 살았던 단순한 움집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좀더 파고드니 더욱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 글쎄, 장방형 구덩이 혹은 원형 구덩이 안에 다시 구멍이 뚫렸고, 그 안에 다시 구멍이 뚫려있는 거예요.”


즉, 수직으로 구멍을 파서 공간을 만든 뒤 다시 그 옆을 수직으로 파내려가 2단의 방을 만든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3단의 방까지 조성한 것도 있었다. 구덩이의 지름은 1m 내외였고, 적어도 1m 이상 두께의 천장부를 만들었으며, 바닥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단면 플라스크형으로 조성됐다. 구덩이의 면적은 7~14㎡ 정도였다. 이런 구덩이들이 무려 39기에 달했다.


■ 감옥이냐 함정이냐



이훈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개미굴이 정녕 무엇이란 말인가. 즉시 전문가들을 모셔놓고 이 정체불명의 개미집 유구에 대한 한 마디 조언을 부탁했다.


과연 해석이 구구했다.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이상한 유적”이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나도 이상했어. 무슨 고대 사회의 감옥 같기도 하고…. 지하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을 송송 뚫어놓고 교도소 감방처럼 만든 것인지, 사냥을 위한 덫 같기도 하고…. 토굴 같기도 하고….”(조유전)


“네. 그랬습니다.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 그건 좀 이상하다고 보았고요. 사냥을 위해 파놓은 함정? 그렇다면 옆구리에 뚫어놓은 또다른 구멍은 설명이 안 되고…. 특수한 저장 구덩이? 그렇다면 주변에 저장 구덩이들을 사용한 사람들의 취락이 확인돼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지 않고…. 사람이 살던 공간? 그렇다면 뻥뻥 뚫린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온통 미스터리였어요.”(이훈)


그런데 현장을 찾은 최몽룡 서울대 교수의 눈이 빛났다.


“숙신(肅愼), 읍루(읍婁) 등 고대 동북방 아시아 사람들이 혈거(穴居), 혈처(穴處)에 살았다는 기록과 고고학 증거들은 많지. 그리고 그런 유적들이 이미 한반도에서도 15곳 이상 나왔는데, 전문가들이 눈길을 주지 않았던 거지요. 그런 유구가 나와도 그동안에는 그저 수혈갱, 혹은 저장공으로 해석했거든. 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최몽룡 교수)


최 교수는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 마한(馬韓)조 등에 나온 ‘토실(土室)’이라는 기록에 주목했다.


“(마한은) 거처는 초가(草家)에 토실(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 같았고 그 문은 윗 부분에 있다.(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戶在上 擧家共在中)”(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조)


■ 마한시대 초옥토실


2000년 11월14일. 정식 지도위원회가 열렸다. 최 교수는 이 자리에서 “이것은 분명 마한의 초옥토실(草屋土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문헌(삼국지)과 고고학 성과(장선리 유적)가 이렇게 맞아 떨어진 겁니다. 옛 역사서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장선리 유적이 마한의 것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마한의 상한연대는 최소한 BC 3세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를 보면 “옛날 진(秦·BC 221~BC 206년)의 사역을 피해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주었다(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최몽룡 교수는 “마한은 BC 3~BC 6세기 초까지 존속했으며, 백제가 강성해지자 점점 영역이 축소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말한다.


예컨대 한성백제 시대(BC 18~AD 475년) 마한의 중심영역은 천안 용원리, 청당동 및 평택, 성환, 직산을 포함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장선리 유적에 대한 연대측정(질량가속분석기) 결과 AD 220~AD 290년 사이로 밝혀졌다.


그런데 마한인들은 어떻게 이 토실에서 살았을까. 이훈은 우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분석했다.


마한의 토실유구로 추정되는 유구 39기가 무더기로 쏟아진 공주 장선리 유적의 항공사진. 이곳에 조성될 예정이었던 휴게소는 자리를 옮겼고, 현장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우선 “초옥에 토실을 만들어 살았다(草屋土室)”는 내용.


“사전적인 의미에서 옥(屋)은 가옥 자체나 혹은 방을 덮는 것을 의미하고, 실(室)은 방 혹은 거처하는 곳을 뜻하거든요. 결국 초옥토실이라는 것은 겉모습 혹은 지붕은 초가이고, 내부는 흙방인 집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죠.”(이훈)


그렇다면 지금의 초가집, 즉 지상가옥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지하 마을인 장선리 유적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삼국지에 나온 대목, 즉 ‘초옥토실’의 모양이 무덤 같았고(形如塚), 그 출입구가 위에 있었다(其戶在上)는 내용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토실유구를 살펴보면 지표면을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판 뒤 바닥 옆면에 2~3차로 방(토실·흙방)을 1~3개 조성했다.


그리고 맨처음 판 1차 구멍 바닥은 출입시설을 포함한 활동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 가장자리에는 기둥자리가 남아있었다. 이 기둥자리는 움, 즉 맞배지붕 형식의 초가를 세운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출입은 사다리로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복원해보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출입구가 위에 있고 무덤과 비슷한 초옥토실’과 완전히 부합된다는 것.


“1차로 판 구멍바닥은 일종의 거실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벽에 구멍을 뚫어 조성된 흙방은 침실이거나 혹은 곡식 저장고로 쓰였을 가능성도 크고….”


이 정체불명이었던 장선리 개미굴, 즉 지하유구는 결국 마한시대의 토실유적으로 비정되었고, 이듬해인 2001년 9월 ‘공주 장선리 토실유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사적(제433호)으로 지정되었다.


■ 보존의 새로운 방향 제시


확인된 39기의 유적 가운데 이미 발굴한 10기를 제외한 29기는 그대로 보존키로 했다. 유적 현장에 세울 예정이었던 탄천 휴게소는 200m 떨어진 곳에 옮겨 조성됐다. 조유전 관장과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최몽룡 교수 등 지도위원들의 한결같은 뜻이었다.


“발굴은 곧 파괴입니다. 있는 그대로 봐둬야 하는 게 원칙이라는 얘기죠. 불가피하게 발굴할 경우엔 10% 이상 발굴하면 안 된다는 게 원칙이에요. 훗날 후학들이 불가피하게 발굴할 경우 지금의 해석이 아닌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죠.”(조유전)


조유전 관장은 “그런 뜻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고 한 마디 던진다.


“물론 이 발굴 이후 토실로 평가되는 유적들이 줄이어 나타났고, 이 유적이 토실유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발굴 내용을 보고 너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모험이라는 것이죠. 장선리의 경우 고고학자의 의견과 함께 고대 건축사와 주거사 등 관련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종합적인 검토를 펼칠 수도 있었는데… 그런 후에 사적으로 지정해도 늦지 않았는데….”


하기야 그렇다. 우리가 AD 3세기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단칼에 “유적의 성격이 이렇다 저렇다”고 쾌도난마식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은 위험한 해석일 수도 있지 않은가. 조유전 선생의 아쉬움이다. 단 조사되지 않은 29기의 유적이 현장에 보존됐다는 게 위안거리다.


“후학들이 훗날 이 현장보존된 유적을 조사할 기회가 생기고, 또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그런 뜻에서 의미 있는 보존결정이었지요.”(조유전)


물론 이는 최몽룡 교수도 같은 생각이다. 각설하고 어쨌든 이 장선리 발굴은 유적의 독특한 성격 만큼이나 보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의미심장한 조사였다.


“대규모 개발을 하더라도 녹지공간은 필요하잖아요. 장선리 유적이 지금 휴게소 주변의 녹지로 변했듯 만약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가 확인되면 그곳을 녹지공원으로 보전하는 상생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지요.”(조유전)


장선리 발굴이 마무리된 지 3년여가 지난 2003년 12월1일. 조유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다름아닌 이훈이었다.


“선생님, 이훈입니다. 수촌리(공주)로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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