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04173459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3)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 공주 수촌리 고분(上)

공주 수촌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입력 : 2008.07.04 17:34 


금동관·금동신발 … 백제인의 삶이 쏟아지다


금동신발과 금동관, 환두대도가 쏟아진 수촌리 2지점 1호 토광묘의 현장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2003년 12월2일 아침. “빨리 와달라”는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의 급보를 받은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은 서둘러 행장을 꾸려 공주 수촌리로 떴다.


“전화는 받았지만 내심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에 도착했어요. 구제발굴이라는 점도 그랬고, 또한 도굴 무덤에서 그저 청동유물 정도나 나왔겠거니 했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현장은 충청남도가 농공단지 조성을 위해 그에 앞서 사전조사를 벌이던 곳이다. 이른바 구제발굴을 벌이던 곳인 것이다. 과연 현장은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다.


“전망은 확 트였지만 잣나무 숲과 풀이 무성해서 고분이 존재할 만한 환경으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현장을 보니 막 모습을 드러낸 금동신발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겠어요? 아! 큰 일이 터졌구나.”


■ 금동유물 품고 있던 백제 무덤 6기


37년 전의 일이 번개처럼 조유전의 뇌리를 스쳤다. 무령왕릉 발굴의 교훈. 흥분에 빠져 단 하루 만에 쓱싹 발굴을 해치워버린 바로 그 쓰라린 기억이었다. 그래 흥분은 금물이다. ‘내 손으로 큰 발굴을 했다’는 흥분에 사로잡히면 평정심을 잃게 되고, 그것은 도굴이나 다를 바 없는 졸속 발굴로 이어진다. 바로 1971년 무령왕릉 발굴처럼….


“자, 시간이 필요해. 절대 서두르지 말 것. 차근차근…. 언론에 먼저 보도되면 큰 혼란에 빠진다(무령왕릉 발굴 때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언론의 취재경쟁으로 발굴현장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보존대책을 미리 세워야 할 것이야.”


조유전은 이훈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12월4일자로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터졌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300평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구릉 한쪽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다. 그 안에서는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남짓 지난 2008년 6월 어느 날. 조유전 관장과 이훈, 그리고 기자가 수촌리 현장을 찾았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나왔다.


■ 각광 받지 못한 청동세트


“야, 전망이 좋네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이훈씨(오른쪽)가 조유전 관장에게 말끔히 정비된 수촌리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적으로 지정된 현장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봉분까지 복원해놓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현장은 동편 뒤로는 산을 등졌고, 서편 앞쪽으로는 드넓은 정안뜰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확 트였으니 말이다.


“옛날에는 홍수가 나면 저 정안뜰까지 물이 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수촌리(水村里)라고 했다네요.”(이훈)


세 사람은 발굴 당시의 기억 속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땐 여기보다는 저쪽에서 청동검(한국형 세형동검), 청동꺾창(靑銅戈)과 청동창(靑銅矛·끝을 뾰족하게 하여 찌르는 창의 일종), 청동도끼, 청동 조각도 등 청동기 세트가 한꺼번에 먼저 출토됐잖아? 이런 청동기 세트가 한자리에 출토된 것도 획기적인데….”(조유전)


“그랬죠. 실은 우리가 이 중요한 청동기 세트를 발견하고 나서 ‘어떻게 언론에 터뜨릴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중에 여기서 더 엄청난 대형발굴이 터진 겁니다.”(이훈)


“그러니 청동기 세트는 운이 없는 거네요.”(기자)


“그것도 팔자지 뭐. 허허.”(조유전)


이게 무슨 말인고? 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03년 9월 이훈이 소속된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발굴조사팀은 의당 농공단지 조성의 사전단계로 문화재조사를 벌이게 되었다. 이훈은 발굴대상을 1지역(1000평), 2지역(300평)으로 나누었고, 먼저 1지역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10월20일. 1지역에서 뜻밖의 유물이 터졌다. 아까 언급한 청동세트가 확인된 것이다. 이훈은 마음이 급했다. 매우 중요한 유물세트이니만큼 언론에 공개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미 1지역에서 좋은 유물이 나온 터여서 2지역 조사는 서둘러 끝내려 했어요. 사실 2지역은 지형 자체는 좋은 편도 아니었고, 개인소유 땅이었어요. 조경수를 심느라 땅을 파내기를 수 십 년 간 해왔던 터라 유적이 있어도 훼손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충남의 담당 공무원은 조바심을 냈다. “(2지역에서) 중요한 유물이 나오면 농공단지 조성은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니냐. 그냥 조사없이 끝내면 안되냐”고 걱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선견지명인데, 조사단은 오히려 “별 것 없을 것이니 빨리 (조사를) 마무리 짓는 편이 낫다”고 설득했다. 조사단은 발굴조사에 앞서 통과의례처럼 지내는 개토제(開土祭·흙을 파기 전에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도 ‘별것 없겠거니’하고 생략했다.


■ 아! 금동신발, 어! 금동관


1호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금동신발.


그러던 11월3일. 연구실에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이훈에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2지역, 즉 수촌리 현장에서 발굴을 담당하던 이창호 연구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부장님(당시 이훈의 직책). 지금 1호 토광묘에서 이상한 것이 잡혔어요. 금동관 하고, 환두대도(둥근 고리 칼)가 나왔어요.”


“금동관?”


머리가 띵 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며칠 전 본 청동기 세트도 처음인데, 이번엔 금동관이라니. 급거 현장으로 달려간 이훈의 앞에 희미한 금동관 같은 범상치 않은 흔적과 환두대도가 보였다.


“제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각인된 신라금관의 T자형 형태였어요. 이 금동관은 환두대도의 칼날 끝부분 바로 아래 놓여있었고…. 일단 흥분을 가라 앉히고 내일(4일) 다시 정밀하게 조사하자고 하고 돌아왔어요”


이훈은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낮에 보았던 1호 무덤의 장면이 파노마라처럼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머리에 쓰는 금동관이 환두대도의 칼 끝에 있을까. 칼이 거꾸로 놓였단 말인가. 순간 이훈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 왜 금동관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금동신발…. 맞다. 금동신발이다.’


백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 즉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최상격의 유물이 아닌가. 다음날 이훈은 이 무덤에 ‘요주의’란 딱지를 붙인 뒤 맨 마지막으로 돌려버렸다. 보통 중요한 무덤이 아니므로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 조사를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5기의 무덤을 먼저 조사하기로 결정내렸다. 먼저 조사하기 쉬운 석실분(3호)부터….


그러나 절대 쉬운 조사는 없었다.


“아! 여기서도 또 한 켤레의 금동신발과 환두대도, 항아리 등이 줄줄이 엮여 나오잖아요.”


조사단의 눈과 귀가 다 멎었다.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 다음엔 4호 무덤. 여기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금동고리칼, 금동허리띠 등 지역의 수장층이 갖추고 있어야 할 모든 필수품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색다른 유물이 걸렸다.


“살포(논에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와 등자, 재갈, 그리고 계수호(鷄首壺·닭머리 달린 항아리) 등 도자기들이 쏟아졌어요. 6기의 무덤 가운데 최고의 부장품을 자랑하고 있었죠. 흙 속에서 검은색 닭머리(계수호)가 삐죽 삐져 나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가장 중요한 무덤이라 여겨 뒤로 미뤘던 1호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귀가 여섯개 달린 항아리)와 비슷한 청자유개사이호(뚜껑 있는 귀 네개 달린 항아리) 등 중요 유물이 더 나왔다.


“누구도 접해보지 못한 유물들이라 제가 직접 대나무 칼을 들고는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그야말로 신주 모시듯 유물의 노출을 시도했어요. 금빛 유물들이 터지면서 저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책임자가 흥분할 수는 없었고…. ‘릴렉스 릴렉스’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차분하게 작업에 임했습니다.”


■ 속내까지 다 연 백제사람들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 세트. 2지점에서 쏟아진 금동제 유물 때문에 각광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심상치 않은 일 하나. 3호 무덤에서 금동신발이 나올 무렵, 갑자기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때서야 느낌이 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무덤을 파헤치면서 제사조차 지내지 않은 ‘싸가지 없는 후손들’이 아닌가.


“아! 우리가 너무 이 분들(무덤의 주인공들)을 우습게 보았구나.”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 위령제를 지냈다. 다음 날 어르신들의 화가 풀렸다. 날씨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개었고, 포근해졌다.


“망국의 한을 품고 있어서인가요? 백제인들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번 문을 열어주면 속내까지 다 보여주는 것 같아요. 바로 이 수촌리의 주인공들처럼….”


다시 2008년 6월 어느 날. 기자가 “수촌리와 관련된 자료 좀 달라”고 하니 이훈이 몇가지 자료를 건네준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반성문이다. 무슨 반성문? 발굴 때의 실수담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구원 한 명이 새파랗게 질려 달려왔습니다. 부장님, 어쩌면 좋죠? 하고. 사연인즉슨 2호분에 흩어져 있던 구슬들에 대한 보존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바닥에 널려있는 구슬의 배치를 살펴서 머리장식과 목걸이 형태를 알아보려면 바닥면까지 한꺼번에 우레탄폼으로 굳혀 통째로 들어낸 뒤 보존처리실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 올리다가 그만 바닥에 구슬을 쏟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물론 미리 평면실측도 했고, 사진촬영까지 마친 뒤라 보고서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지만 더욱 정밀한 사후조사로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실수로 묻혀버린 것이었다. 이훈은 그것을 자책하는 것이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해서 다시 1971년 무령왕릉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하룻밤 졸속 발굴로 수많은 정보가 묻혀버렸던 그 때의 몸서리쳐지는 일이….


“발굴자는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거라. 잘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야. 실수를 몰래 덮어 버리면 남 몰래 넘어갈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지. 발굴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해.”


그러면서도 작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렇게 공개하는 후학의 용기가 가상한 모양이다. 하기야 발굴자가 이렇게 후일담으로나마 실수를 인정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AD 4~AD 5세기, 한성백제국 수촌리 마을로 돌아가보자. 당시 이 땅에 묻힌 무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으로….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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