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11172834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4)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발굴공주 수촌리 고분 (下)

공주 수촌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 입력 : 2008.07.11 17:28 


‘한 가문의 무덤’ 세대별 묘제 다르다


고고학자의 야장(野帳·조사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노트). 2003년 11월27일과 12월2일 수촌리 1, 2, 4호를 조사한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창호 연구원의 야장이다.


“제 사촌형수가 여기(수촌리) 살았는데 예전에 저기 보이는 학교(수촌초교)를 조성할 때 ‘왕의 칼’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대요.”(이훈)


왕의 칼이라 하면 환두대도(둥근고리칼)를 뜻하는 것이리라. 이훈(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실장)은 수촌리 현장 바로 곁에 있는 수촌초교를 지목하며 떠도는 이야기를 전한다.


조유전 관장(토지박물관)이 수촌리 현장과 학교 사이에 있는 무성한 풀숲을 범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본다.


“저 풀숲에도 무언가 있을 가능성이 있네.”(조 관장)


“예, 이곳부터 저 학교까지의 사이에 아마도 고분군이 있었을 겁니다. 저 풀숲을 발굴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발굴자인 이훈은 그러면서 수촌리 고분이 AD 4~5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가족묘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 유구와 유물의 양상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조 관장)


5세기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부모님의 묘를 선산에 조성했다고 치면 1~2호분은 증조 할아버지·할머니 묘이고, 3호분은 할아버지, 4~5호묘는 부모묘인 것이다.


“할아버지 묘(3호분)는 있는데, 할머니 묘가 없는 게 이상하네요.”(기자)


“아니지, 어딘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게지.”(조 관장)


“아마도 3호분 곁 어디엔가 있는데, 우리가 조사하지 못한 거죠.”(이훈)


■ 애틋한 부부의 정표


이훈은 왜 가족묘라고 단정을 내릴까.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2004년 여름 어느 날, 나른한 오후였다.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데, 이형주 연구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잠이 확 달아났다.


“부장님, 이 두 개가 붙어요.”


이 무슨 소린가? 안경너머로 보니 이형주 연구원이 자색 관옥 2점을 들고 있었다. 4호분과 5호분에서 한 점씩 출토된 것이었다.



그런데 출토유물을 정리하다가 유물의 형태가 비슷한 것 같아 서로 맞춰보니 딱 맞는 게 아닌가. “그래, 부부묘다”라고 외치며 뛰어온 것이었다.


“아, 부절(符節, 돌·대나무·옥 따위를 잘라 신표로 삼던 것)이다. 살아생전 부부의 도타운 정을 죽어서도 간직하고픈 것이었겠지.”(이훈)


아니면 먼저 간 사랑하는 남편(혹은 아내)의 머리맡에 옥을 부러뜨려 고이 넣고는 자식들에게 말했으리라. “나 죽으면 나머지 부러진 옥을 내 머리맡에 놓아주거라”라고…. 죽은 뒤 하늘에서 만나 맞춰보려면…. 결국 4~5호분도 애틋한 부부의 정을 담고 있는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아버지의 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고고학의 묘미다. 바로 묘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수촌리 유적은 한 집안의 무덤들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일정한 시차를 둔 다양한 묘제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틱해. 하나의 고분군에서 이렇게 시기별로 나타난 것은 드물지.”(조 관장)


중요한 것은 흙무덤과 돌무덤의 차이.


충청도나 전라도의 토착세력들, 즉 마한사람들은 흙무덤(토광묘·土鑛墓)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한성백제가 마한을 복속시키면서 점차 돌무덤이 전파되었다. 돌무덤은 발해연안에서 선진문물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후예, 즉 백제인이 BC 18년 남하하면서 가져온 고급 묘제이다. 그런데 이 수촌리 1~2호분의 주인공은 마한의 전통이 남은 토광목곽묘를 썼다. 반면 3호분은 백제 묘제인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앞트기식 돌방무덤), 4~5호분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이다.


토광목곽묘는 위에서 구덩이를 판 뒤 목곽을 짜맞춰 놓고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묘제인데, 1~2호분은 목곽 안에 목관을 조성했다. 3호묘인 횡구식석곽묘는 돌방무덤을 만든 뒤 앞에 문을 만들어 출입하게 했다. 4~5호묘인 횡혈식석실분은 무덤 앞에 안팎으로 통하는 무덤길(연도)을 만든 뒤 무덤방, 즉 돌방무덤을 조성했다.


■ 수촌리 가문


“고대 묘제는 토광목곽묘→횡구식석곽묘→횡혈식석실분의 순서로 발전합니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한 것이죠. 지체높은 분들이었으니까 첨단 묘제를 쓰기 시작했겠죠.”(이훈)


1~2호(토광목곽묘)는 AD 380~390년, 3호(횡구식석곽묘)는 AD 400~410년, 4~5호(횡혈식석실분)는 AD 420~440년으로 추정된다. 즉, 5세기 중반에 살았던 수촌리 어떤 가문의 증조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수촌리 2지점과 붙어있는 1지점에서 확인된 청동기세트를 떠올려보자.


“이 수촌리 가문은 청동기 시대(BC 4세기)부터 뼈대 있는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청동기시대 수장(首將)이 지니고 있었을 청동기세트를 땅에 묻은 집안의 후예가 마한의 지배세력으로 이어졌을 겁니다.”(이훈)


자, 시계를 기원 전후로 되돌려보자. 이복형인 고구려 유리(주몽의 적자)의 핍박에 밀려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 온조왕은 마한의 도움으로 위례성에 도읍을 세웠다(BC 18년). 이 무렵 한반도 서남부에는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왕(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년)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마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마한이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한은 백제가 강성해지면서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면서 그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유전 관장은 이쯤에서 또 한마디 지적한다.


“생각해봅시다. 온조왕이 마한을 정복했다고 해서 마한의 전통이 쉽게 사라질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려고 마한인들을 북돋는 정책을 펼쳤을 겁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도 “이렇듯 명백하게 나온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훈도 두 선생의 말에 동의한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즉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AD 16년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는 배은망덕한 나라다.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서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겠지.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옛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거야. 간접지배라는 뜻이지. 백제 중앙정부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환두대도 같은 예기(위세품)를 하사했을 테지.”(조 관장)


특히 강정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연구팀장은 “AD 4세기말~5세기초로 편년되는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된 하사품들은 AD 392년 광개토대왕의 남침 등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 한성백제왕이 하사한 왕·후 작위


이훈은 특히 송서 백제전 및 남제사 백제전에 등장하는 왕·후제에 주목한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후(侯)제를 두었습니다.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는데, 수촌리 가문이 바로 그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마한의 후예, 즉 공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귀족에게 금동관과 금동신발 같은 최상급의 하사품을 주지 않았을까요?”(이훈)


또 하나, 수촌리 가문 계보의 출자에 대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의 해석이 그럴듯하다.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어요.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요?”


더 자세히 묻는다면? 그 가문의 성씨는?


“이 가문의 성(姓)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백가(加)입니다. 웅진세력이 기반인 백가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새로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수촌리 고분 가문과 백씨 가문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노중국 교수)


이렇게 보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BC 4세기부터 공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지배계급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후에 마한 54개국 중 감해비리국의 수장으로 이어지며, 훗날 한성백제의 지방 혹은 중앙귀족이 된 뼈대있는 ‘백씨’ 가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지금까지 고고학 발굴 성과와 문헌자료를 토대로 엮어본 그럴듯한 추정일 뿐이다.


“앞으로 본격적인 역사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요.”(이훈)


이것은 무슨 말인고? 지금까지는 몇 안되는 고고학 발굴 성과를 갖고 일부 학자들이 우리 고대사를 멋대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최근 10여년간 특히 백제사와 관련된 고고학 성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면서 기존 학자들의 학설이 ‘거짓말’로 판명되기 일쑤다.


여기서 조유전 관장의 한마디는 경청할 만하다.


“며칠 전 풍납토성에서 쏟아진 수많은 토기들을 보라고. 수촌리 고분이 조성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토기들이 중앙, 그러니까 풍납토성으로 운반되잖아. 기원 전후부터 활발했던 국제교역의 증거들은 또 어떻고. 쾌도난마로 학설을 독점하고 남의 이야기는 무시해왔던 학자들이 지금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제발 섣부른 단정을 내리는 어리석은 고고학자가 되지 말라’는 노학자의 충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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