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205165439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4)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上

경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 입력 : 2008.12.05 16:54 


당나라 횡포 휘둘리던 신라 구국의 뜻을 사찰에 담다


당나라 침략의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사천왕사.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낭산)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선덕여왕릉, 그리고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성한 망덕사지 등 1400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한꺼번에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671년 7월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슬프다. 예전에는 충성과 의리를 다하더니 이젠 역신이 되었구나. 이제라도 겸손한 의리를 회복하고 순종한다면 제사와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당나라 총관 설인귀)


이것은 잘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으니 좋은 말할 때 무릎을 꿇으라는 협박이었다.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다.


“당(唐)군 먹여살리느라 뼛골이 빠졌는데”


“우리 백성들은 풀뿌리조차 먹지 못했는데, 옛 백제 땅인 웅진(熊津)에 장기주둔한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네. 신라백성들은 계절마다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네. 1만명의 당군이 지난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으니 당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와 살은 한결같이 신라에서 기른 것이네. 당의 은혜가 한없다고 하지만 신라의 충정 또한 가련하게 여길 만하네.”


이렇듯 신라가 당나라 군을 먹여살리느라 뼛골이 빠졌는데도 배은망덕 운운하며 신라를 침공하는 당나라를 맹비난한 것이다. 문무왕의 피를 토하는 한탄이 이어진다.


“슬프다. 두 나라(백제와 고구려)가 평정되지 않을 때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들짐승(백제와 고구려)이 잡히고 나니 (신라는) 잡아먹히는 박해를 당하도다! 잔학한 백제는 옹치(雍齒)의 상을 받는데, 신라는 도리어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는구나!”


옹치는 중국 한나라를 창업한 고조(유방)의 신하. 한때 유방을 배신하고 다시 귀순했지만, 뜻밖에 상급을 받은 인물이다. 반면 정공은 항우의 휘하에 있다가 곤경에 빠진 유방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훗날 유방을 찾아왔을 때는 “자기 주인(항우)에게 충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즉, 문무왕은 당나라가 ‘옹치’인 백제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정공’인 신라에게는 칼을 들이댄 것을 비유했다.


그러면서도 당나라의 대대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 한수 접어준다.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심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한다네. 우리 신라는 너무도 억울하네. 자,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설)총관은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면서 죄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을 것으로 믿네. 황제께 우리는 감히 배반하지 않네.”


그런데 대체 이 무슨 사연이기에 이렇게 험한 말이 오가는 것인가. 반추해보자.


신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


주지하다시피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잇달아 멸망시켰다. 그런데 양국은 왜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까. 먼저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거의 사직을 잃을 처지에 빠진다.


선덕여왕 11년(642년) 7월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킨다. 의자왕은 미후성(獼猴城) 등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한 달 뒤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공격한다. 대야성 성주 품석(品釋)은 처자와 함께 항복했다. 하지만 윤충은 품석의 목을 베고 항복한 이들을 모두 죽인다. 신라 백성 1000명을 사로잡은 윤충에게 의자왕은 상급을 내린다.


그런데 품석과 함께 살해 당한 품석의 아내는 훗날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년)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딸 고타사랑(古陀炤女良)이었으니…. 사랑하는 딸의 비참한 최후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피눈물을 흘렸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가도 몰랐으며 나중에야 한마디 했다. ‘아아! 내가 반드시 백제를 집어삼키리라!’”(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조)


김춘추는 그 길로 고구려로 떠나 고구려와의 연합을 통해 백제를 치고자 했지만 고구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백제는 신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신라는 눈길을 당나라에 돌렸다. 진덕왕 2년(648년)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도모하기 위한 나·당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면서 당태종은 김춘추에게 말한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것은 다른 뜻이 없다. 신라가 두 나라의 등쌀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짐이) 불쌍히 여겨 정벌하는 것이니라.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라.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어서 영원히 편안하게 하리라.”(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6월조)


마각 드러내는 당나라


그렇다면 당나라의 뜻은 순수했을까. 아니었다. 당나라는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정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징후는 660년 백제와의 마지막 혈투를 벌이던 중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김유신과 김문영 등이 660년 7월9일 그 유명한 백제 계백장군과의 건곤일척 싸움을 끝내고 당나라 군영에 이르자 소정방(蘇定方)이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면서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유신은 비장한 각오로 소리쳤다.


“(소정방) 대장군이 황산벌 전투를 보지도 않고 기일이 늦은 것을 이유로 죄를 삼으니 나는 무고하게 치욕 당할 수는 없다. 먼저 (저 무례한) 당나라군과 결전을 벌이고 백제와 맞서 싸우리.”


김유신이 도끼를 들고 군문에 서자 머리털이 바싹 섰고, 허리춤에는 보검이 칼집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김유신의 서슬에 놀란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정방의 발등을 밟으며 살짝 귀띔했다.


“장군,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소정방도 깜짝 놀라 김문영을 풀어주었다. 7월18일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 방령(方領)의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하고 만다. 백제의 678년 사직은 끊기고 만다. 하지만 신라까지 삼키려는 당나라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나라는 사비(부여)의 언덕에 군영을 차리고 은밀하게 신라를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왕(문무왕)이 알아차리고 대책을 묻자 신하 다미공(多美公)이 나섰다. ‘신라백성들에게 백제 옷을 입히고 싸우려 한다면 당나라군이 반드시 그들을 공격할 겁니다. 이 틈을 타 당군과 싸운다면 될 것 같습니다.’”(삼국사기 김유신전 중)


문무왕이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고 난색을 표하자 김유신이 나선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한다지만 주인이 개의 발을 물면 물어뜯는 것인데, 나라가 어려우면 자구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신라가 대책을 마련한다는 첩보를 듣고는 귀국했다. 소정방을 맞이한 당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왜 내친김에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당 고종)


“신라왕이 어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 모시기를 자기 부모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하니 작은 나라지만 쉽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소정방)


백제의 고토에 세운 5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고구려 정벌전을 치르면서는 신라군을 평양성까지 오라가라 하면서 계속 허탕치게 만들면서 신라의 힘을 뺐다.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를 보자.


“667년 당나라 대총관 영국공(英國公·당나라 이적(李勣))이 요동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국경지역에 내보냈네. 그런데 아직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단 고구려 칠중성(七重城·파주 적성)을 쳐서 당군을 위해 길을 열어두려고 했네. 그런데 성이 함락될 무렵, 당나라 사자가 와서 갑자기 ‘신라군은 칠중성을 치지말고 빨리 평양성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라’고 했네. 하지만 우리가 수곡성(水谷城·황해 신계)에 이르자 이번에는 당나라 군사가 벌써 돌아갔다고 했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신라군은 (당군의 도움없이) 평양성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네. 모두들 ‘이번에는 큰 상급을 받겠지’하고 큰 기대를 했는데, 영국공은 ‘신라군의 도착기일이 늦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흘렸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완전히 ‘×개 훈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안으로 개선한 당군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자는 아무도 없다”고 떠벌였다. 더구나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관리와 백성들까지 이주시킨 비열성(卑列城·함남 안변)을 고구려에 돌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당나라의 침략 급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의 선택은?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야욕은 고구려 멸망 이후 본격화한다. 당나라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669년부터 옛 백제의 땅을 점령하였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한다. 하지만 신라는 끝까지 외교적 교섭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무왕은 9년(669년) 5월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보냈다.


하지만 당 고종은 이듬해 1월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용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어 버린다.


“당 황제는 (문무)왕이 멋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차지했다고 하여 황제가 문책하고 노발대발하여 사자를 계속 억류해버렸다.”(삼국사기 문무왕 10월조)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와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法敏條)’를 보자.


“김흠순(혹은 김인문)과 김양도 등이 당에서 갇혔다. 당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어 신라를 정벌하려 했다. 고종이 김흠순(혹은 김인문)을 불러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 우리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냐’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그를 옥에 가두고서 군사 50만명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김흠순은 마침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던 의상법사에게 당나라 침공사실을 알렸고,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된 의상법사는 서둘러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같은 급보를 전한다. 이 때가 670년의 일이었다.


사천왕사를 찾은 이유는?


2008년 11월. 늦가을인데도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부셨던 어느 날. 조유전 토지박물관장과 기자는 폐허만이 남은 어느 사찰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경주시 배반동 낭산 구릉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사천왕사(四天王寺·사적 8호)터다. 발굴조사가 한창인 절터를 일제가 부설한 철로가 반으로 뚝 잘라 지나치고 있었다.


“자, 저 너머가 유명한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이 있는 곳이고, 저기가 신라시대 때 신이 뛰놀았다는 신유림(神遊林·낭산·사적 163호)이고, 또 저기 맞은 편은 망덕사(사적 7호)라는 곳이고….”


이리저리 가리키는 조유전 관장의 손 끝에 1338년 전의 역사가 묻어나온다.


“우리가 서있는 이 사천왕사터는 바로 670년 의상법사로부터 당나라 침공이라는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절이지. 전설적인 내용도 가미되었지만 신라는 이 절을 지음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침공을 막았어요.”


1338년 전인 670년 신라 경주로 여행을 떠나보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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