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223.22020192406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3> 신라 황금보검의 미스터리
카자흐스탄과 경주 '닮은꼴 황금보검'… 주인은 원행 갔던 신라인?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2-22 19:32:48 | 본지 20면
- 보로보예 황금 장식, 신라 계림로 14호분…제작 방법·형태 등 같은 지역서 만든 동일한 종류
- 계림고분 속 남자 허리띠 장식·귀고리 신라 고유의 것들
- 현재 발굴 중인 경주 쪽샘지구서 초원과 한반도 문화교류의 단서 쏟아질 수도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공사 도중 발견된 황금보검 장식.
1928년 카자흐스탄의 북쪽에 위치한 보로보예라는 마을 근처에서 건설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힘들게 그 돌을 치워내자 그 밑의 구덩이에서 보석을 박은 황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뜻밖의 횡재는 곧 사방으로 소문이 났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러시아 고고학자 오레호프는 훔쳐간 유물들의 일부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비슷한 상황은 약 45년 뒤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됐다. 1973년 경주 대릉원을 정비하면서 계림로에서 도로 공사를 하던 중에 작은 신라 고분들이 발견됐다. 다행히도 이 고분은 고고학자들의 체계적인 조사를 거칠 수 있었다. 특히 계림로의 14호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은 황금보검이 발견되었다. 두 단검은 만든 방법이나 형태 면에서 같은 사람 또는 같은 지역의 장인들이 만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동일한 종류였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공간이동을 한 듯한 두 유물은 한동안 신라 고고학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미공개로 있던 그 유물을 전시하면서 문제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리고 있다.
■ 계림로 보검의 주인공은 초원민족인가?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황금보검.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양식이다.
계림로 고분은 발굴된 지 40여년 가까이 미공개였고, 황금보검만이 국보로 지정돼 공개됐다. 신라에서는 전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황금보검이기 때문에 혹시 그 주인공은 초원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유물들을 종합해보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원에서 직접 내려온 사람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보검 이외에는 유라시아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리나 황금장식 등 초원지역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들은 이미 '신라화'된 유물들일 뿐이다. 게다가 무덤도 신라의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이다.
지난 주 전시회를 보기 위해 경주로 가면서 필자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바로 유물의 주인공이 초원지역에서 내려온 사절일 가능성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그러한 예가 있다. 중국 북부 초원과 접경지역인 감숙성에서 객성장(客省庄)이라는 한나라 시대 대형 고분군이 발굴된 적이 있다. 이 무덤군 중 140호로 명명된 고분의 유물은 대부분 한나라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허리띠만은 동물이 장식된 흉노계통 버클이었다. 여러 정황을 검토한 끝에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흉노의 사신이라고 결론내렸다. 흉노 사신의 무덤에서 보듯이 먼 곳에서 온 사람이 객사한다면 같이 묻히는 토기를 비롯한 여러 물건은 방문한 국가의 것을 쓰고, 귀족의 무덤에 같이 묻힐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옷과 같이 몸에 부착하는 물건들은 그냥 그대로 넣어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나온, 몸에 부착하는 물건들인 시신의 허리띠장식과 귀걸이 등은 신라의 것이었다. 즉, 초원지역 어딘가에서 온 사신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 황금보검 어떻게 신라에 들어왔을까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귀고리.
무덤의 주인공이 신라인일 가능성이 크다면 또 다른 문제와 맞물릴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이 보검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가'이다. 먼저 보검이 놓인 자리를 보자. 이 칼은 35cm 정도의 단검으로 실용이 아니라 장식적인 기능이 강하다. 그런데 이 칼은 허리춤 바로 밑에 비스듬하게 놓았다. 바로 옆에 묻힌 사람의 경우는 허벅지 밑으로 장검을 놓은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황금보검이 착용된 방법은 5~7세기 알타이 지역 투르크 인들의 칼 차는 방법과 똑같다. 즉,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그 검을 알타이 초원지역에서 어떻게 차고 다니는지 잘 알았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황금보검을 이런 저런 경로로 수입해온 것이 아니라 실제 차고 다녔음을 반증한다.
다음으로 황금보검이 출토된 무덤을 보자. 먼저 카자흐스탄 보로보예를 보면, 비록 이미 많이 파괴되었지만 대량의 황금유물이 출토됐다. 이는 실제 그 무덤의 주인공이 최상위 귀족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계림로 고분으로 오면 사정은 약간 달라진다. 무덤의 규모도 작고 출토된 유물도 270여 점으로 다른 신라고분보다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출토된 안교 등자 장신구 등은 엔간한 최상위급 신라고분 못지 않다. 더욱이 흥미로운 점은 이 무덤에 일부 남아있는 치아의 마모흔이나 같이 묻힌 유물로 볼 때, 비슷한 신분과 나이인 남자 2명이 묻혀있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기존의 신라고분들하고는 사뭇 다르다.
계림로 고분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윤상덕 학예사에 따르면 실제 무덤의 주인공이 입었던 옷은 실크로 진골 이상의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신라의 귀족으로 증여 또는 사사의 형태로 보검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비슷한 신분의 남자 2명이 같이 묻힌 것을 본다면, 고분 자체가 매우 작다는 것은 무덤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던 사람들, 즉 오랜기간 외국에 체재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 누가 신라인에게 황금보검을 주었을까
현재 계림로 14호 고분과 같은 보검의 실제 유물은 카자흐스탄 보로보예가 유일하다. 다만 중국 신장성 돈황에 있는 키질석굴에서도 비슷한 단검의 그림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 동유럽 일대에 비슷한 4~5세기 황금유물이 많기 때문에 켈트족이 신라로 전해주었다는 일본사람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황금제작기술은 멀리는 흉노문화에서 기원하며 서기 4~6세기에는 훈족의 대이동을 따라 동유럽으로 전파됐다. 또 황금보검에서 보이는 누금세공 같은 기술은 전 유라시아에 널리 유행했다. 그러니 흑해나 동유럽에서 비슷한 유물이 1점 나왔다고 곧바로 흑해 연안의 사람들과 신라가 직접 교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로보예나 계림로 14호 고분은 대체로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해당한다. 이때에 흑해 연안에서 황금보검을 쓰던 사람들은 이 지역 토착민이 아니다. 흑해 연안은 초원민족이 복잡하게 유입된 곳이다. 그들은 동쪽에서 밀려온 훈족, 그리고 이후에는 투르크(돌궐)계통이 거주했다. 따라서 신라와 교류했던 집단은 흑해보다는 동쪽인 시베리아나 몽골지역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5~6세기는 아직 돌궐세력은 미약했고, 대신 유연제국이 번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연의 왕족이나 고위층의 고분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광활한 몽골초원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유연제국의 고분이 혹시 답을 주지는 않을까?
■ 유라시아 고고학, 신라에서 답을 구하다
우리는 막연히 신라의 황금문화의 기원을 북방에서 찾고 있지만, 반대로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신라의 고분에서 초원지역의 고고학을 해결하려고 한다. 1970년대 소비에트의 중세고고학 최고 권위자인 A 암브로즈는 신라고분과 고구려 벽화의 연대에 근거해서 3~7세기 초원지역 고고학의 연대를 결정했고, 그의 연구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또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단검도 실제 칼은 없어지고 칼집만 남아서 그 용도를 모르는 채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계림로 고분의 보검이 발견된 덕에 그 황금장식이 칼의 일부였음이 밝혀졌다. 즉,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서기 4~6세기 전 유라시아를 뒤흔들던 훈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문화 교류의 한 거점으로 신라를 파악한다. 우리도 시야를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전 유라시아적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초원지역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슷한 유물만 나오면 무리하게 전파루트를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북방지역 자료를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자들의 연구를 재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물론 1980년대 이전에는 이념적 장벽으로 사회주의권의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회주의권이 개방된지도 20년이 넘는 지금도 여전히 단편적인 비교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으로 신라의 비밀을 풀고 싶으면 당장 기원을 찾으려는 생각보다는 체계적으로 유라시아 초원의 고고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를 양성해야할 것이다.
황금보검의 문제는 대부분 미해결인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라와 북방문화의 관계에 한걸음씩 우리는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경주에서는 쪽샘지구에서 적석목곽분 발굴이 한창이다. 천년고도 경주가 우리에게 또 다른 유물을 보여줄까. 조만간 초원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화교류의 흐름을 밝혀주는 발견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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