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110.22020200229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8> 영생을 꿈꾼 유목민족
알타이 고원의 파지릭人 `미라 무덤` 신라로 전해졌나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1-09 20:11:02 | 본지 20면
- 무사나 고위층 죽으면 곧바로 방부 처리
- 나무 무덤방에서 꽁꽁 언 채 미라로 남아…수천 년 흘러도 온전한 모습 그대로
- 온난화로 '얼음미라' 사라질 판이지만 신라 적석목곽분 닮은 매장 풍습 등 알타이·한국문화 유사 흔적 많아
인간의 영원한 화두는 불로장생이다. 역사의 수많은 장면 속에서 인간들은 죽음을 피해서 영원히 살고자 했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며 이런저런 약을 먹다가 약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수은 때문에 생을 빨리 마감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자신이 죽은 후 미라로 형체를 보전하여 거대한 지하궁전인 피라미드 속에서 영원히 살고자 했었다. 죽음 앞에 예외 없고 또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죽음을 피하고자 했다.
자연의 순리라면 죽은 시신은 곧 부패하고 사라져야한다. 시신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미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영원히 살고자하는 바람은 초원의 유목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7~3세기 알타이 초원의 파지릭문화에서는 인간의 노력과 환경적인 요인이 결합되어서 미라가 발견된다.
■알타이 산속의 파지릭인, 미라를 만들다
러시아 에르미타쥐박물관에 소장된 파지릭 문화의 미라.
중앙아시아에서 영산(靈山)으로 추앙받는 알타이의 고원에 살았던 파지릭문화의 사람들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아주 유사한 고분과 다양한 황금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알타이지역이 한국문화와 관련성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파지릭문화와 신라의 관계에 있다. 파지릭의 사람들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었고, 또 죽은 자에 대한 독특한 염습도 행해졌다. 이 사람들은 무사나 고위층이 죽으면 곧바로 시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뺀 후 그 안에 약초를 채우고 피부도 발삼(balsam)처리를 해서 부패를 방지했다. 파지릭문화의 지도자가 죽으면 시신을 실은 마차는 광활한 초원에서 목축을 하는 각 부족을 마지막으로 순회했고, 몇 달간 소요되는 이 과정에서 부패를 막기 위하여 신속하게 미라로 만들었다.
아무리 염습을 잘했다고 해도 보통의 땅에 묻힌다면 미라가 온전하게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 해발 3000m를 넘는 알타이 고원의 자연환경이 결합되어 미라가 만들어진다. 알타이는 고위도 지방이니 여름이 되어도 땅 속은 여전히 얼음으로 차 있는 영구동결대라고 하는 북극권에만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알타이의 고원지대 모두가 영구동결대는 아니고 응달이 진 계곡이나 산기슭에 곳에 따라 나타난다.
알타이 고원지대에 여름은 2개월도 안 되게 짧다. 땅을 제대로 팔 수 있는 이 짧은 기간에 무덤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무로 짠 무덤방을 만들고 다시 위를 흙으로 덮으면 무덤은 속이 빈 방처럼 된다. 가을이 되어서 눈이나 비가 내리면 이 무덤 안은 물로 꽉 찬다. 겨울에 이 물은 얼음이 되고 이후 수 천년간 계속 영구동결대로 지속되어서 '온전한' 미라를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것이다. 만약 무덤을 만든 후 무덤 방 안에 얼음이 차지 않는다면 시신은 부패되어버리게 된다. 그야말로 자연의 선물이다. 게다가 처음에 무덤을 팔 때에 얼음이 있는 땅을 피해서 팠을 테니, 무덤을 판 후에 얼음이 들어찬 '재수좋은' 경우에만 미라가 생긴다. 요즘말로 복불복이다. 어쩌면 파지릭인들은 처음부터 무덤을 만들면서 후에 얼음이 가득차는 지역을 골라서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시신과 부장품들은 온전히 보존되며 얼음 속에 있는 덕에 도굴도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구의 온난화로 사라지는 미라들
파지릭 미라가 출토된 무덤에서 함께 나온 마차. 미라는 이 마차에 실려 몇 달간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고분에 얼음이 차 있다면 썩기 쉬운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니 고고학자들이 감격에 찰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영구동결대의 발굴은 고고학자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삽이나 꽃삽 대신에 더운 물을 무덤 위의 얼음에 부어서 얼음을 약간 녹인 다음에 다시 물을 퍼내는 고행을 몇 달간 지속해야 한다. 경주에 있는 거대한 신라고분의 무덤을 컵 몇 개로 감질나게 판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게다가 시시각각으로 드러나는 부패하기 쉬운 유기물질들이 상하지 않게 다루어야 하니 엔간한 참을성으로는 어렵다.
그나마도 요즘에는 지구의 온난화로 영구동결대에 갇힌 무덤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알타이지역 발굴을 하면 바로 몇 년 전에 얼음이 다 녹아버린 흔적들이 발견되어서 고고학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지구물리탐사로 영구동결대의 고분을 확인하고 곧 사라져 버릴 고분들부터 시급하게 조사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한 10년 넘게 알타이산맥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알타이 지방정부에서 발굴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질 얼음 속의 무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라가 맺어준 인연
1994년 발굴된 파지릭 문화권의 남성전사 미라.
1993년과 1994년에 알타이에서 미라가 발굴되어 세계적인 뉴스가 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굴된 미라는 여성이어서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었고, 1995년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전시되었다. 하지만 얼음공주는 실제로 '공주'가 아니다. 당시 파지릭문화는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었으니, 공주가 나올 리 없다. 게다가 이 여성 미라가 발굴된 고분은 무덤 중에서 중간 정도의 크기였다. 그 주인공은 아마 제사를 관장했던 여사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알타이의 얼음공주는 나에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만주지역의 비파형동검을 전공하고 있었던 필자는 전시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V.I.몰로딘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몰로딘 교수의 지도로 러시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라가 전시된 박물관에서 필자를 만난 몰로딘 교수는 필자가 초원지역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북중국을 연구했으니 앞으로 시베리아를 연구한다면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거라며 격려했었다. 2500년 전 알타이의 깊은 산속에 묻힌 미라가 한국에 사는 한 젊은 고고학자의 인생을 바꾼 셈이다.
■유교가 선물한 한국의 미라
알타이에서 발견된 미라의 처리는 모스크바의 생체학연구소가 맡았다. 이 연구소는 사회주의권 지도자인 레닌, 모택동, 스탈린, 김일성, 호치민 등을 미라 처리하여 세계 최고 시신보존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파지릭 미라도 사회주의권 최고 지도자들과 장의사 동창인 셈이니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괜히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의 전통은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권에서 계승되었다. 시신을 생전과 똑같이 보존하려는 욕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은 자에 대한 경외감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종교를 부정한 사회주의권은 더더욱 미라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소련의 '아름다운' 전통 덕분에 파지릭에서 출토된 미라는 지금도 건재하다.
박물관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미라는 왜소하고 초라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당시 미라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은 고위층이었고, 대부분 화려한 부장품과 함께 묻혔다. 하지만 영생을 꿈꾼 죄로 그들은 벌거벗겨져서 어두컴컴한 박물관 한 귀퉁이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도시를 돌면서 청나라 때의 미라들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의 미라는 충효사상의 발로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유교의 제례에 따르면 무덤의 관은 일정한 두께의 회를 바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유교의 규례를 완벽히 지켜가며 무덤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기 성리학이 성행하며 실제 규례대로 회곽을 만들었다. 그 결과 회곽 안은 완벽하게 진공상태가 되어서 미라가 되는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덕에 미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회곽묘에서 미라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데, 특히 1586년에 사망한 이응태 씨의 묘에서 발견된 그의 부인이 쓴 편지가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그 이유는 죽은 남편에 대한 절절한 부인의 사랑이 담긴 내용은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미라는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온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원지역의 얼음 속에 묻힌 미라를 통해 초원에서 일생을 살았던 수천 년의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밝히는 것은 곧 초원지역에 묻힌 미라에 대한 진정한 예우가 될 것이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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