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112.22022201824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17> 반구대 암각화, 초원과 한반도를 잇다

암각화 그림 요소와 모양, 초원과 반구대 `빼다박아`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1-11 20:29:19 |  본지 22면


반구대 암각화 전경을 보여주는 도면.


- 1자형 배와 사람, 춤을 추는 사람들, 활쏘는 사냥꾼, 점박이 표범 등

- 초원과 반구대 공간적 거리 무색케

- 양 지역 제작 시기 BC 10~6, 8~5세기로 시간적으로도 유사

- 청동기시대 울산…많은 사람 모여 살아 북쪽 유민들이 암각화의 주인공일 가능성도


1970년 12월 25일 울산시 울주·언양군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은 주민들로부터 천전리라는 마을 근처의 어느 암벽에도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지만 혹시 삼국시대 마애불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마애불은 아니었지만 한국 최초의 암각화 유적인 천전리 유적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인 1971년 12월 25일 다시 조사팀을 꾸려서 감격의 천전리 암각화를 찾았다가 뜻밖의 정보를 입수했다. 천전리 암각화를 제보한 주민들이 근처 강가의 바위 위에도 호랑이들 그림이 있는데, 보통은 물에 잠겨있다는 것이었다.


■성탄절의 기적


사람 모양. 칼박타쉬 유적 사람 그림이 무릎을 접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조사팀은 엄동설한에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가며 바위들을 조사하다 물 밖으로 빠끔히 자태를 비춘 암각화의 일부를 발견했다. 한국 선사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순간이다. 40여 년 전 두 번에 걸친 성탄절의 기적적인 발견으로 한국의 선사시대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암각화는 초원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예술이다. 알타이초원, 중앙아시아, 내몽고 등 대부분의 초원에는 바위들에 빽빽히 사슴, 전사 등 다양한 그림을 새긴 암각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암각화는 만주와 한반도로 내려오면 거짓말같이 사라지게 된다. 반구대 이외에도 한국도 고인돌에 바윗그림이 1~2점씩 발견된 적도 있지만, 초원지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그런 점에서 울산을 대표하는 반구대 암각화는 전세계 암각화 연구자들에게는 참으로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유적이다. 초원지역과 수 천 ㎞ 떨어져 있는 바닷가 울산에서 이런 대형의 암각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구대의 암각화는 단순히 초원지역의 암각화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고래로 유명한데, 반구대 암각화에는 생동감 있게 다양한 고래가 묘사되었다. 들짐승을 사냥하면서 고래도 잡았던 장면이 묘사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암각화인 반구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짐승.


반구대의 고래는 이미 여러 방송매체도 다큐멘터리 등으로 여러 차례 제작했으며, 지금도 울산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반구대 암각화의 왼쪽 윗부분에 있는 조각배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가 많이 그려져 있으니 고래 잡는 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배 주변에는 고래가 아니라 육상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런 배는 알타이의 칼박타쉬나 카자흐스탄, 하카시 등에서도 보이는데 배와 사람이 1자형으로 표현되어 마치 태양의 환한 빛과 닮았다.


■알타이의 암각화와 유사성

대표적 알타이 암각화인 칼박타쉬 유적.


러시아의 암각화 전문가인 V. 쿠바레프 씨는 이를 태양과 관련된 천문학적 기호이며 아주 예전에(기원전 4000~3000년)에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화가 시베리아로 들어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 그러한 그림은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동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북쪽으로는 베링해의 추코트카까지 보인다. 이제 반구대에서 발견되었으니, 그 남쪽 경계는 울산이 된 셈이다.


또 반구대에는 '춤을 추는 사람'이라 불리는,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얼굴쪽으로 올린 사람이 표현되어 있다. 두 발을 굽히는 인물상은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시대(기원전 8~3세기) 암각화에서 공통적으로 새겨진다. 그뿐인가. 몸통에 점이 박힌 표범, 뿔이 달린 사슴, 화살로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등 많은 그림들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는 공통점이 많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초원지역에서 사람들이 왔다고만 결론내릴 수는 없다. 고래나 호랑이, 곰, 족제비, 토끼 등 반구대에서만 보이는 요소도 많다. 또 바로 옆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기하학적 그림만 보인다는 점도 미스터리이다.


표범.


반구대를 비롯하여 암각화를 연구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정확한 연대를 알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보통 암각화는 돌을 파내는 기법과 도구(예컨대 돌을 썼는지 금속도구를 썼는지 등)로 대략적인 연대를 가늠한다. 즉, 단단한 쇠로 날카롭게 파낸 것은 중세시대 이후이고 선사시대의 것은 돌로 쪼아낸 것이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암각화에 표현된 동물이나 사람이 지는 무기 등을 실제 고고학 발굴을 실시해서 출토한 유물과 비교한다. 알타이의 경우 무사의 암각화에 새겨진 동검이나 도끼를 실제로 고분에서 발굴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도 여전히 암각화의 실제 연대를 아는 게 쉽지 않은데, 주된 이유는 대부분의 암각화는 여러 시기에 걸쳐서 쪼아 판 곳에 다시 덧붙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요즘 사람의 낙서판으로도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누가 언제 새겼을까


맹수.


반구대의 경우는 신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 것이라고 학자 간에 의견이 다르다. 또 실제로 암각화를 만든 기법을 보면 반구대 암각화 역시 몇 번에 걸쳐서 만들어진 흔적이 있다. 최소한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이 있는 그림들은 대체로 초원에서는 기원전 10~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반도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해당해서 논농사를 하고 비파형동검을 만든 고인돌사회가 널리 확산되는 시기 즈음이다.


이 시기 울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청동기시대 울산은 과장 조금 보태면 6·25때 임시수도 부산처럼 복잡하게 사람들이 살았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울산 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집자리만 3000여 곳에 육박한다. 지금도 울산지역은 발굴만 했다하면 거의 빠짐없이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는 상황이어서 남한의 다른 어느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게 그 밀도가 높다. 울산지역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소위 '울산식 주거지'의 연대는 기원전 8~5세기대로 대체로 초원지역과 관련성이 있는 암각화의 연대에 대체로 부합한다.


그렇다면 반구대의 암각화는 당시 상대적으로 살기 좋았던 울산지역으로 밀려들었던 사람들 중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 일부가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상상한다면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그 지역으로 몰려오던 고래잡이도 같이 하면서 살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현재로서는 막연한 상상이다. 보통 암각화는 당시 주민들이 의례를 지내던 성소였기 때문에 주변에는 당시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반구대는 물속에 잠겨 있으니 주변조사는 아직 요원하다. 향후 주변지역을 정밀 발굴조사한다면 많은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 반구대의 조사도 중요하지만, 초원지역과 반구대 사이의 공간적 차이를 메꾸는 또 다른 유적의 발견도 기대해봄직하다. 실제로 사냥을 주업으로 하던 주민들이 북쪽에서 이동했다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을 것이다. 동해안을 따라서 또 다른 암각화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반구대가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9월 필자는 국내의 학회에 러시아 고고학자 한 분을 초청한 적이 있다. 이 분은 학회가 부산에서 있으니 꼭 근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울산에서 그렇게 생동감 있는 대형 암각화가 있다니 한번 꼭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모셔가지 않았다. 자칭타칭 문화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강물 속에 잠겨서 망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여준단 말인가.


지방자치단체들은 물 부족을 이유로 물의 수위를 낮출 수 없으니 이전복원을 하자는 등 임시방편만을 제시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암각화 문화의 중요한 유산이다. 또 초원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선사시대 문화교류의 증거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1980년에 큰 길을 낸다고 독립문을 70m 옆으로 옮긴 일은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하물며 근대 건축물도 아닌 바위 위에 새겨진 그림을 떼어서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발상인가. 두바이에 100층 넘는 빌딩을 짓고 바다도 메우는 토목기술을 자랑하는 21세기 한국에서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만 보내며 수수방관하는 동안 반구대는 물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정녕 또 다른 '성탄절의 기적'을 기대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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