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518.22022200902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5> 치우의 청동투구와 황제

한국 "치우는 동이족 다스린 제왕" - 중국 "다원일체 방해 세력"

중국 신화 속 치우, 강력한 전차와 금속무기로 상징

구리의 머리에 철로 만든 이마 '동두철액' 묘사

최근의 中 역사가 치우마저 역사로 편입시켜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5-17 20:16:46 |  본지 22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이 한 달 남짓 남았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응원팀의 상징은 붉은 악마와 치우(蚩尤)천왕이었다. 중국의 시조 황제(黃帝)와 탁록에서 큰 전투로 맞섰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인 치우는 현재 한국과 중국 사회에서도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치우를 동이족을 다스린 제왕으로 간주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을 세운 황제의 최대 방해세력이었던 괴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팀의 상징이 될 정도로 유명한 치우천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치우 이야기는 언제 등장했나


몽골에서 나온 고대의 청동투구.


사실 치우를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간주할 근거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치우나 황제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시기는 신석기시대로 현재와 같은 대형 전투가 일어났을 때도 아니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치우는 중국 서남부에서 사는 소수민족인 먀오(苗·묘)족의 선조로도 숭앙되고 있다. 즉 치우는 단순한 고대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중원세력과 대립했던 중원 주변 이민족들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과연 치우는 한민족의 선조일까. 그리고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중국은 최근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려 세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나라임을 내세우고 있다. 사실 이 개념은 신해혁명(1911년) 이후 일본과 서구 열강의 여러 세력이 중국을 침탈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 황제는 단순히 신화 속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황제를 비롯한 삼황오제에 대한 신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부터다. 이후 황제는 거의 숭배되지 않다가 명·청 대에 그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 만주족에 억압되었던 한족의 문화를 부활시키는 상징으로 중국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를 시조로 숭앙하면서 그와 맞선 대표적 인물인 치우는 괴수화되었다.


연세대 김종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상나라 때의 책인 '귀장역'을 인용한 '초학기'에 치우가 처음 등장한다. 만약 그 문헌의 인용이 맞다면 적어도 치우의 등장은 기원전 13세기까지는 올라가는 셈이다. 치우가 본격적으로 괴물로 등장하는 책은 '상서'(尙書)로 원래는 주나라 때 역사를 한나라 때 기록한 것이라 한다. 치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한나라 이후 최근의 역사까지 중국에 대적한 '악의 축'이었던 셈이다.


■탁록의 전투는 있었을까


서주 시대 연나라의 무덤인 베이징 근처 유리하에서 출토된 청동가면과 투구들. 치우에 대한 옛 기록과 잘 부합한다.


황제와 치우의 갈등은 '탁록대전'에서 폭발했다. 황제가 55번 전투를 한 끝에 간신히 치우를 이겼다고 하는 이 전투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 가장 큰 전투였다. 탁록은 허베이(河北·하북)성 동북 쪽으로 랴오닝(遙寧·요령)성과 거의 맞닿은 지점이다. 실제로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중원에서 고구려, 고조선으로 정벌을 나갈 때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이다. 즉, 중원과 만주지역의 교통로인 셈이다. 신화에 탁록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중원의 세력과 비중원 세력이 만나는 상징적 장소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탁록지역은 이미 기원전 2000년께부터 유목민족이 발흥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원전 15세기께 시베리아의 전차 문화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문화의 일부는 중원의 상나라에도 도달했다. 상나라에 그 전차를 전한 세력들은 중국 북쪽에 거주하면서 바로 그 상나라를 괴롭혔다. 탁록을 중심으로 허베이 지방에도 강력한 전차무기를 지닌 초원민족의 유적이 바이푸, 차오다오고우 등에서 발견됐다. 치우에 대한 기록이 상나라~주나라 대에 등장하니, 아마도 이 때 탁록을 중심으로 웅거하던 초원민족이 치우라는 신화로 재등장한 것으로 보는게 가장 맞을 듯하다.

 

한편, 춘추시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에는 산융과 동호가 등장했다. 이들은 만리장성의 북쪽에 웅거하며 스키토-시베리아유형의 초원문화를 동아시아에 전달하던 주역이었다. 그들도 현재의 탁록을 중심으로 허베이 지방에 웅거하면서 연나라뿐 아니라 중원의 여러 지역을 괴롭혔다. 신화에 치우와 황제의 전투 장소가 탁록이라고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고대부터 중원과 요령 그리고 한반도를 잇는 길목이요, 또 상-주 대에는 초원세력이 남하해서 첨예하게 대립한 세 문화의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구리 이마에 쇠로 된 이마' 속 실마리


주나라 시대 북방 지역의 청동기.


중국 신화의 여러 기록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치우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강력한 전차와 금속무기로 상징된다. 신화에서 황제가 치우에 고전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치우의 강력한 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북방에서는 초원지역에서 유입돼 발달한 전차와 청동무기가 확인되고 있으니, 이러한 묘사는 어느 정도는 부합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치우를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묘사하는 점이다. '구리의 머리에 철로 만든 이마'라는 뜻이니 곧 금속제 투구를 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기원전 12세기께부터 탁록이 위치한 허베이~랴오닝성 서부 일대에는 투구가 유행한다. 청동투구는 상나라 때 처음 등장해서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썼으며, 나아가서 랴오닝성 바이칼 몽골 등으로 전파됐다. 심지어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시대 유적에서 '쿠반식'이라 하는 독특한 투구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중국 북방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형태이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두 지역 투구가 너무 흡사해서 중국 북부 초원지역에서 파급된 것으로 보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당시 청동투구는 중국 북방 초원전사의 상징이었다. 1981년 산시(陝西·섬서)성 하무자에서 발견된 청동솥(鼎·정)에는 오랑캐(戎·융)를 포로로 삼고 투구 30점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청동솥은 당시 주나라 종실이 골칫거리였던 초원지역 오랑캐(戎)을 무찌른 제후에게 상을 내리면서 기념으로 준 것이다. 또 베이징 근처에 위치한 서주 시대 연나라 무덤인 유리하(琉璃河) 무덤 유적에서는 얼굴을 덮는 청동가면도 등장했으니, 동두철액은 단순히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나라가 건국될 당시 탁록 근처인 베이징에는 연나라가 있었다. 베이징 근처의 오랑캐들은 발달된 전차와 무기로 연나라에 맞섰다. 주나라 왕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북방의 적들에 맞서기 위해서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소공석을 연나라에 봉해서 그들을 막아내도록 했다. 치우에 대한 신화는 북방에서 초원의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내려오던 세력을 대적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의 역동성 밝히는 진정한 연구 필요


치우 신화는 상-주나라 대에 현재의 허베이성을 둘러싸고 중원세력과 초원의 발달된 무기를 받아들인 이민족간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중국에서는 황제를 포함하여 삼황오제를 고고학과 역사학에 결부시키며 대중교육을 강화시킨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도 최근까지 만세일계의 천황과 탄생신화를 교과서에서 가르치며 국민교육을 해왔다. 영토가 수시로 바뀌고 민족들도 다양하게 섞여 있는 서구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신화와 고대사를 자신들 정당성의 근거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땅에 근거하여 생계를 꾸리는 동아시아의 정착문명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자국 중심의 서술 속에서 진정한 역사의 역동성은 빛을 잃고 있다. 지난 수 천년간 '악의 축'으로 폄훼되고 괴수화되었던 치우는 이제 중국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지난 1998년 허베이성에 있는 회래현 탁록에 세워진 '중국삼조당'에 치우는 황제, 염제와 함께 당당히(?) 중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시조로 같이 봉안되었고, 심지어 중국 남방의 묘족 수 천명이 참배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힘과 무기를 가졌던 치우를 시조로 모심으로써 최근 급격히 주변지역으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칭기즈칸과 흉노와 함께 치우마저 중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면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를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 신화를 역사로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신화에는 사람들의 수천 년 역사적 기억이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없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와는 다를 것이다. 치우와 황제신화 속에 숨겨진 초원과 정착민족 간의 교류와 전쟁이 제대로 연구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