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수도 이전


출처 :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2>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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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원문 : http://tadream.tistory.com/296

발해의 五京 천도과정
신 형 식 (이화여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학술자문위원)

발해는 존속기간 229년간(698∼926)에 서울을 여러 번 옮겼다. 수도의 빈번한 이동은 강력한 국가행정 수행에 있어서 막대한 지장(정치적 공백)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토착세력의 기반을 억제시켜 효과적인 왕권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발해를 구성하는 여러 이민족과 그 문화적 전통을 배려한 구체적 타협은 결국 국가적 구심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천도배경에는 정치·군사·외교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달리 사전계획이나 수도보완시설의 고려 없이 추진한 결과 허약한 방어시설(산성)로 인한 수도 기능의 한계 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더구나 절대왕권을 지지하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의 부재로 정치적 불안은 가중되 었다. 무엇보다도 방위성(산성)이 철저하지 못한 것을 평지성으로 보완하기 위해 광대한 외성(外城)을 축조 해 이를 극복하려 했으나, 그것은 외형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첫 번째 천도는 제3대 문왕 때(742년) 중경 현덕부로 옮긴 것이다. 고조(대조영)과 무왕(대무예)이 어느 정도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기 때문에 문왕은 무치시대(武治時代)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었다. 동시에 토착 의 백산 말갈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란강 유역의 경제개발은 문치시대를 뒷받침해 줄 수 있기 때문이 다. 두 번째는 755년 상경 용천부로 옮긴 것이다. 문왕은 중경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과 문치정치의 기틀 을 확립하였다. 한편 흑수말갈을 제압해야 했고 안록산의 난 이후 만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중국과 관계 를 멀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상경 일대는 넓은 목단강 평야의 경제적 가능성도 크게 작용하였 을 것이다. 세 번째는 상경에서 30년만에 동경 용원부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신라와의 정치 군사적 대치상황과 일 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네 번째는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성왕이 들어서면서(794) 장기집권을 한 문왕 이후 새로운 통치질서 확립이 필요했다. 기대했던 일본과의 정치 경제적 이익도 수준이하였기 때문에 서울이 귀 퉁이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794년 두 번째로 상경으로 천도한 뒤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발해의 중심수 도가 되었다.

발해의 수도이전 과정

서 울
위 치
기 간
동모산
돈 화
698∼(10)
구국시대
구 국
영 승
?∼742
중 경
서고성
742∼755
중경시대
상 경
발해진
755∼785
1차 상경
동 경
혼 춘
785∼794
동경시대
상 경
발해진
794∼926
2차 상경



출처 : 
발해 문왕 - 위키
http://ko.wikipedia.org/wiki/%EB%B0%9C%ED%95%B4_%EB%AC%B8%EC%99%95#.EC.88.98.EB.8F.84.EC.9D.98_.EC.9D.B4.EB.8F.99


발해 수도의 이동

발해가 처음 건국된 곳은 동모산(東牟山)이었다. 이곳은 구국(舊國)이라 불렸다. 그런데 문왕은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중경현덕부는 현재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 서고성자성이다. 이 주변은 철과 베(布),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755년 무렵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다.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문왕은 785년 무렵 또 다시 수도를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 이곳은 해양 교통의 요지로 현재 연변자치추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지역으로 추정된다. 문왕은 3차례 수도를 옮김으로써, 발해의 여러 곳을 개발하는 효과를 얻었다. 발해에는 이들 3곳의 수도 외에 남경남해부(함경북도 북청군으로 추정), 서경압록부(길림성 임강시로 추정)가 더 설치되어 5경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 또한 문왕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경을 통해 문왕은 발해의 넓은 영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균형 발전을 이루려고 했던 듯하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으로, 이곳은 793년 5대 성왕(成王, ?~794)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 멸망까지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출처 : 발해의 영토 및 기후 - 관유  http://tadream.tistory.com/295


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 서경압록부와 동경용천부를 제외한 나머지 3경의 위치는 어느정도 윤곽이 잡힌 상태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으로 알려졌으며, 남경남해부는 함경남도 북청, 중경현덕부는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자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2경중 하나인 서경압록부의 경우 대체적으로 임강진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발견되는 유물, 유적이 적어서 이 곳에 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서 집안 지역을 서경으로 보기도 하며, 집안에서 임강진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동경용천부의 경우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주장하고 있다.  북한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기에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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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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