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2.htm

발해 5경의 이동배경과 그 의미
신형식(이화여대 교수)

Ⅰ. 발해사의 의미

발해사(698∼926)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중국이 비록 그들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나 종족적으로나 고구려를 계승한 당당한 강국이였다.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이외에도 문왕(737∼793)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한 천손의식이나 당시 주변국가에서 외신지국(畏臣之國)이라는 사실에도 발해의 국가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732년의 등주(당) 공격은 당시 그 나라의 국력을 짐작케 한다.

발해는 목가적인 평화애호의 농목국가로서 현무암(玄武岩)을 활용하는 지혜를 갖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동방의 전통을 간직한 문화대국으로서 문과 무를 조화시킨 나라였다. 상경 위주의 5경제와 묘탑(墓塔)을 세운 독자적인 문화와 당과는 다른 정치제도를 운영하여 민족의 전통성 유지에 노력한 나라이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 유민·거란(李盡忠)·돌궐(乞四比雨)등 복잡한 민족적 갈등과 건국 초(698∼742)의 공백은 발해 초기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것이며, 멸망후 흩어진 소국(정안국/定安國·흥요국/興遼國·대발해국/大渤海國)의 분열과 고려 정부의 무관심(냉대)으로 결국 민족재통합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이원화된 민족구성과 마찰은 하나의 통합체 형성에 문제점을 가져와 국난극복에 한계를 보여 주었다.

〔표 1〕 발해의 수도이전과정
서울
위치
기간
동모산
돈화
698∼(10)
구국시대
구국
영승
?∼742
중경
서고성
742∼755
중경시대
상경
발해진
755∼785
1차 상경
동경
훈춘
785∼794
동경시대
상경
발해진
794∼926
2차 상경

다만, 발해사는 상경성(上京城) 내성의 금원(禁苑)에서 보여지듯 낙천적인 여유와 멋을 간직함으로서 외족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한 결과 빈번한 천도과정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출혈을 강요 받게 되었다. 다만 풍부한 농산물(쌀·명주·베·콩과 메주), 수산물(붕어·미역·소금), 그리고 축산물(소·말·돼지·사슴·범)과 광산물(철·금·은)을 통한 수준 높은 산업발달이 발해문화의 기반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바다 건너 일본과는 빈번한 교섭을 꾀했으나, 신라와는 거의 관계를 외면함으로서 신라 진골귀족의 배타적인 폐쇄성을 타파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빈번한 천도와 일본과의 교섭으로는 민족적 갈등과 외침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민족재통합에 노력을 외면한 민족적 비난을 면치 어려웠다.

발해는 신라의 5소경과 달리, 서울을 4번 바꿨다. 따라서 5경을 따로 둔 것이 아니라, 필요시에 서울을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심 서울은 상경이며, 대평원의 중앙에 자리하여 개방된 정치와 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5경은 각기 그 역사적 전통을 배려한 것으로서 숙신·예맥·옥저 등 민족적 고지와 연결시켰으며 각기 소속의 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통일적 민족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소 경
명 칭
관 할 지 역
고 지
상 경
龍泉府 龍·湖·渤 숙 신
중 경
顯德府 盧·顯·鐵·湯·英·興 숙신남부
동 경
龍原府·柵城府 慶·鹽·穆·賀 예 맥
남 경
南海府 沃·晴·椒 옥 저
서 경
鴨綠府 神·桓·豊·正 고구려
〔표 2〕발해 5경의 관할지역


Ⅱ.발해의 5京의 천도과정

발해는 존속기간 229년간(698∼926)에 서울을 여러번 옮겼다. 수도의 빈번한 이동은 강력한 국가행정 수행에 있어서 막대한 지장(정치적 공백)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반대로 토착세력의 기반을 억제시켜 효과적인 왕권강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발해를 구성하는 여러 이민족과 그 문화적 전통을 배려한 구체적 타협은 결국 국가적 구심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천도배경에는 정치·군사·외교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고구려·백제의 경우와 달리 사전계획이나 수도보완시설의 고려없이 추진한 결과 허약한 방어시설(산성)로 인한 수도 기능의 한계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더구나 절대왕권을 지지하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의 부재로 정치적 불안은 가중되었다. 무엇보다도 방위성(산성)의 불철저에 따른 평지성의 보완조치라는 광대한 외성의 축조로 이를 극복하려 했으나, 그것은 외형적인 조치에 불과하였다.

발해는 고구려병력의 ⅓도 못된다는 {신당서}(권 219. 발해전)의 기록으로 볼때, 수도나 국가기관의 보호차원에서도 부족한 입장이다. 더구나 토착민(말갈)에 대한 통제강화와 모병제(募兵制)에 따른 충원의 어려움은 과중한 수역(水役)과 병역의 부담을 가중시켜 기층민의 불만요소로 작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1) 동모산/성산자산 (東牟山/城山子山) 

발해시조인 大祚榮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많은 유민과 함께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朝陽)에서 고구려 유민을 규합시켰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압록강 이북지방에는 안시성 등 11성은 당에 항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은 고덕무(高德武,보장왕자)를 추대하여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을 세우는 등 분열책이 추진되었으나, 여러 곳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주일대는 거란족의 주거지로서 여러민족(거란·말갈·고구려·돌궐)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이진충(李盡忠,거란족), 동쪽에서는 대조영(말갈인 걸사비우와 협조)이 웅거하였으며, 이진충난(696)을 계기로 광범한 민족이동이 전개되었다. 대조영은 이해고존군(李楷固尊軍)을 격파하고(천문령/天門嶺 전투) 요하와 송화강을 건너 당의 영향이 적은 목단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 祚榮遂率其衆 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구당서} 권 199 <하> 열전 149. 발해말갈)
㉯ 聖歷中(698∼699) 自立爲振國王 遣使通于突厥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與新羅相接(상동)

이 기록은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웅거하여 振國(震國:발해)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동모산이 영주에서 2천리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지만, 이곳을 서울로 삼았다는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천보말(天寶末,742∼756)에 흠무(欽茂,문왕)가 서울을 상경으로 옮겼는 바, 그곳은 구국(舊國)으로부터 300리 밖의 홀한하(忽汗河,목단강)의 동쪽'이라는 사실에서 구국의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동모산과 구국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가 남는다.

그러나 주몽의 경우(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遂欲都焉而未遑作宮室 但結盧於沸流水上居之)와 같이 대조영의 임시거처(山城)는 가능하지만 이곳에서 40여년을 지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라를 세운 후 몇년이 흘렀을 때는 인근의 평지성(오녀산성/五女山城과 하고성/下古城,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산성/丸都山城과 같은)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동모산성에 대한 평지성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동모산성은 대석하(大石河,목단강지류)를 낀 야산(600m)으로 국초의 정치적 불안과 당군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임시거점이 되었다. 산중턱에 성벽을 쌓고 목단강 유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반을 다져갔다. 동모산은 돈화시(敦化市) 서남쪽 22.5㎞ 지점의 넓은 들판에 우뚝 솟은 야산이다. 산성은 산 중턱을 시루처럼 둘러싼 퇴뫼식 산성으로 남아있는 성벽은 기초너비 5∼7m의 (남아 있는 성벽은 1.5∼2.5m) 돌과 흙으로 다져져 전체 둘레가 2㎞나 된다. 북쪽은 40m의 험한 절벽으로 오루하(대석하)에 면하고 있어 '阻奧婁河樹壁自固'(『신당서』권129)라는 기록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서문지를 들어서면 자연석을 이용한 옹성이 남아 있으며, 동문지쪽을 따라 가면 우선 저수지 (길이 4.6m, 깊이 1m)가 있어 산성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성내 중앙에는 길이가 100m(너비 30m)정도의 연병장지가 있으며, 동문쪽 남록에는 넓은 평지가 있어 50여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이 창·칼·화살 등과 개원통보(開元通寶,당) 등으로 보아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도 이 일대는 목마장(牧馬場)으로 활용되고 있다.

(2) 구국/영승유적 (舊國/永勝遺蹟)

발해의 건국자들은 이 답답한 산정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당으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되고, 기동력이 뛰어난 속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에 따라 '天寶末 欽茂徙上京 直舊國三百里 忽汗河之東'(『신당서』)에서 보듯이 목단강 대평원을 경영하려는 의도에서 평지성을 축조해야 했다. 이곳이 구국이다. 그러나 동모산에서 구국으로 옮겼다는 구체적 기록은 없으나, 동모산이 곧 구국일 수는 없다.

종래 구국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며, 『한국사강좌(韓國史講座)』(고대 편, 이기백·이기동, 1982, p.349)에도 구국·중경·동모산을 혼동하고 있다. 더구나 일부 견해는 돈화시내의 오동성(敖東城)을 구국의 터로 생각하고 있으며, 오동성과 동모산을 포함한 돈화 일대를 범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근자에는 돈화시 강동향영승촌(江東鄕 永勝村)의 「영승유적」을 구국의 터로 간주하고 있다.

영승유적은 목단강을 끼고 그 서쪽 5㎞ 지점에 동모산이 있고, 동쪽 4㎞ 지점에「육정산 고분군」이 있으며, 북방 10㎞ 지점에 오동성이 있다. 이 유적지는 남북이 1000m, 동서가 700m의 크기로 장방형의 평지성터로 그 안에 5개의 건물지가 있어 上京址를 방불케 한다. 제 1 건물지(동서 30m, 남북 20m)에서는 기와·벽돌·동전(개원통보) 등이 출토되었는바 거의가 발해 것들이다. 특히 막새기와는 육정산 고분군의 것과 같다. 이 유지를 구국의 터로 보는 이유는 그 크기의 장엄성(오동성은 동서 400m, 남북 200m), 동모산성(산성)과의 거리(5㎞ : 오동성은 15㎞), 매장지<묘지>로서 육정산의 위치(동북향), 그리고 長方形으로서 중경이나 상경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모산(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은 하나의 도성체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인다. 다만, 문헌이나 유물의 출토에 따라 이곳(영승유적)을 구국이라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발해사의 한계라 하겠다.

(3) 중경(현덕부,顯德府)

중경은 제 3 대왕 문왕(대흠무:737∼793) 천보년간(742∼756)의 수도였다가 천보말(755)에 상경으로 옮긴 공식적으로는 두번째 수도였고 제 2차 수도이전으로 서울이 된 곳이다. 그런데 이 중경에 대해서는 소밀성(김육발)·돈화시(츠다/津田, 이케노우치/池內宏)·서고성(화룡) 등 이설이 분분했으나, 현재의 학계 견해는 후자로 일치를 하고 있다.

중경 현덕부는 화룡의 해란강유역인 두도평야 가운데 위치하는 바, 이곳은 구국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중심지였다. 구국에서 고조(대조영)와 무왕(대무예)이 어느 정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건국과정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민족적 갈등을 수습함에 따라, 보다 효과적인 통치책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대조영·무왕으로 이어진 무치시대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동시에 토착의 백산말갈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란강 유역의 경제개발은 새로운 문치시대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돈화 일대보다 온도가 2∼4℃가 높으며, 보다 비옥하여 '노주(盧州)의 벼', '현주(顯州)의 철'과 같은 풍부한 산물이 생산되고 있었다. 결국 중경은 협소한 구국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통·군사상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라의 중심지로서 전국 교통망인 5도(道)의 교량적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서고성 부근에는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를 비롯한 발해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으며, 용해사(龍海寺)·고산사(高産寺) 등 사지(寺址)가 모여있어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여준다. 장방형의 외성은 남북이 730m, 동서가 630m로 성벽은 토축(두께 0.1m)으로 밑면은 13∼17m(현재는 1.8∼2.5m)의 높이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연길에서 용정으로 뻗어가는 대로변과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다만 외성의 남쪽과 동쪽끝에는 해자가 남아있어 현재 수로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쪽외성은 인도로 사용된다.

내성은 외성의 중부의 북쪽으로 70m정도 안에 있는바, 크기는 남북 310m, 동서 190m정도로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 1∼5궁전지가 있는바 크기는 36m×4m(1·2궁전)정도로 궁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다만, 북쪽의 외성과 내성사이의 민가와 내성 밖의 가산(假山) 및 연못의 흔적은 잃어버린 왕궁터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4) 상경(龍泉府)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위치한 발해의 중심 서울로 동경성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목단강(홀한강,忽汗水)이 가로지르고 그 남쪽에는 경박호(忽汗海)가 있어 풍부한 농산·어산물이 있으며, 주변에 장광(張廣),재령과 노예령 등이 감싸주는 천혜의 요충이다. 상경은 천보말(755)에 중경으로부터 천도하여 30년간 수도였다가 785년(대흥 48년, 문왕 49)에 동경으로 옮긴 후, 794년(성왕 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발해가 망할 때까지 132년간 서울로 자리하였다. 그러므로 상경은 2차에 걸쳐 162년간(⅔이상) 발해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이곳을 천복성(天福城)으로 하고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耶律倍)를 그 왕으로 삼아 지배하게 하였다. 그 후 태조(야율아보기)가 죽은 뒤 두 아들(야율배·야율덕광)간의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야율덕광(耶律德光)은 수도를 동평(요양 : 928)으로 옮진 후 동경성을 불살라버려 발해유적을 파괴하였다. 더구나 이곳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폐허화시켰다.

문왕은 중경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과 문치정치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특히 말갈족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서 북방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한 정치·군사적 공세가 필요하였다. 서쪽의 거란(契丹)의 세력이 강화되어 安祿山의 대군을 격파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안록산의 난(755)은 요서지방에서 뿐아니라 만주일대까지 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발해의 안록산에 대한 견제는 안록산이 파견한 사신을 감금하는 등 독자적 행동을 나타내는데에서 보여진다. 따라서 문왕은 보다 실질적인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과 관계를 멀리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다음으로 상경 일대는 넓은 목단강 평야의 경제력을 지닌 곳이다. 경박호 화산의 용암이 강상(江床)을 덮어 온도를 조절시켜 주었으며, 그 위에 쌓인 부식토는 농사에 적절한 바탕이 되었다. 1963년 상경용천부 발굴시에 다량의 철제농구(보습)의 출토가 이를 뒷받침할 수 있으며, 경박호의 풍부한 어획물은 수도로서의 역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용주의 紬(명주) 역시 당대 대표적인 수공업의 발달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문왕은 785년에 다시 서울을 동경(용원부)으로 옮겼다. 그것은 신라와의 정치·군사적 대치상황과 일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다만, 문왕 말년의 정치적 혼란으로 서울이 다시 바뀐다. 발해가 수도를 다시 옮긴 이유는 문왕(739-793)의 장기 집권후 새로운 통치질서 확립을 위한 조치이다. 기대했던 일본과의 정치·경제적 이익도 수준이하였으므로 서울이 나라 귀퉁이에 편재할 필요는 없었다. 문왕이 죽은 후 왕통은 원의(元義,문왕의 族弟)가 이어졌으나, 그는 곧 국인에 의해서 피살되고 성왕(成王)이 등장하였으나, 그 역시 반년만에 병사한 후, 강왕(康王,숭린)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적통자로서 성왕은 민심을 수렴하고 새로운 발해왕통을 확립함으로서 동경지역의 세력(원의)을 타도하려는 조치가 필요하였다. 더구나 일본과의 외교적 이익에 한계가 다가왔으며, 동방에 치우친 동경의 지리적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1차 수도 경영과정에서 문제가 된 왕성으로서의 미비한 점이나 궁정시설을 어느 정도 보완함으로서 발해의 중심수도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왕권의 재확립과 말갈인에 대한 복속이 가능한 8세기 이후, 신라와의 정치적 대립〔공존〕이 나타날 수 있었다. 따라서 2차에 걸친 신라사신의 파견(790, 812)도 경색된 남북관계의 조정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상경성은 외성,내성,궁성 등의 3중으로 된 장방형의 평지성이다. 외성은 동서가 길고(동벽 3358.5m, 서벽3406m), 남북은 짧은(남벽 4585m, 북벽 4946m) 16,300m가 넘는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곁에 흙을 씌웠으며 현재 3m정도의 높이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동서에 2개, 남북에 3개씩 10개의 성문이 있다. 성은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되었으며, 그 안에 동서·남북의 도로에 따라 82개의 방(坊)으로 되어있다.

내성(皇城·王城)은 외성의 중부 북쪽에 치우쳐 있는바, 동(900)·서(940)·남(1050)·북(1096)의 총 길이 3986m의 장방형이다. 이 내성의 특징은 북쪽 성벽이 외성밖으로 나간 것이며, 발해의 중앙관청(3성 6부)이 있던 곳이다. 동쪽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높이는 1m정도이다. 내성 벽에는 문이 3개 있고 남문이 정문으로 궁성남문과 외성남문(중앙)과 일직선상에 있다. 특히 동쪽 구역의 남부에는 금원/禁苑(어화원/御花園, 둘레 537.6m)이 있으며, 현재 호수와 두개의 호심도(湖心島,정자)와 가산(假山)이 있어 안압지의 멋을 능가한다. 특히 남부구역이 중앙관청지로서 자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궁성은 왕실의 거주지로서 현무암 궁성벽으로 쌓여있는바 남북 720m, 동서 620m, 남쪽의 성벽(2.5m)은 웅장하게 남아있다. 두개의 문으로 연결된 길은 제 1 궁전까지 직선으로 170m나 된다. 남문(午門)은 오봉루(五鳳樓,청대지칭)로 현무암으로 되어있으며 여기저기 석회흔적이 남아있다. 궁성은 1∼5 궁전이 중심부이다. 제 1 궁전은 3m가 넘는 기단 위에 동서 55.5m, 남북 24m의 장방형으로 대궁전(금난전,金鑾殿)이 있었다. 현재는 동서 12줄, 남북 5줄로 된 둥근 모양의 현무암 주춧돌이 잡초속에 남아있다. 기단 위에는 여러개의 ?首로 장식된 것도 있다. 제 2 궁전지는 가장 큰 규모(80×30m)였으며, 제 3 ·4·5 궁전지도 각기 회랑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5개의 궁전은 북쪽으로 이어졌으며, 제 2 궁전지 동쪽(27m)에는 八寶琉璃井이 있다. 이러한 5궁전은 전체 회랑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을 연상케 한다. 문왕은 오봉루 남쪽에 永興殿이란 전청을 지어 정사를 총괄하였을 것이며, 그 동서쪽에 3성 6부의 중앙관부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표4〕발해 5 궁전의 규모(m)

궁 전
크기(동서×남북)
사용목적
제 1 궁전
55.5×24
정청
제 2 궁전
80×30 
제 3 궁전
45×25
휴식
제 4 궁전
21.6×15
침실
제 5 궁전
37×20
연회

이들 궁전과 회랑의 주춧돌은 모두 현무암을 사용하였으며, 궁전 건물은 단층식·2층 처마식·누각식 등 다양한 형태를 보였으리라 여긴다. 지붕에는 주로 푸른 기와를 덮었고, 궁전은 북쪽으로 가면서 낮아질 듯하다. 

(5) 東京(龍原府·柵城府)

동경은 현재 琿春市 서북쪽 국영농장의 넓은 들판에 위치한 八連城을 뜻한다. 785년(문왕 49)에 上京에서 이곳으로 옮긴 후, 9년간 수도였다가 794년에 다시 상경으로 돌아갔다. 동경성은 현재 러시아·중국·북한의 접경지라는 사실과 같이 당시도 흑수말갈에 대응하고 동해와 면한 정치·외교상의 요지였다.

문치정치의 기반을 확립한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위 '魚父之利'를 위한 해상이득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정치·경제적 성장이 서쪽으로 당과 거란, 남쪽으로 신라의 견제에 부디쳤다. 결국 바다로의 진출이 필요하였으며, 대일관계의 새로운 모색이 요구되었다. 재위 57년간 11차례의 대일교섭사를 파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대일외교는 동물의 가죽·인삼·꿀 등의 대일 무역품으로 등장하였으며, 일본의 비단·명주·구슬이 발해 귀족의 수요품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훈춘평야의 경제력에 대한 관심이다. 이곳은 비옥한 '충적평야'로 쌀이 생산되었고 '영주의 소금·책성의 된장(?)', 그리고 다양한 생산품으로 그 경제적 중요성이 높았으며, 빈번한 일본과의 교섭으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元義로 대표되는 세력은 막강한 부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왕은 이를 제압하려고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元義는 문왕을 계승하였으나 바로 축출되었다. 끝으로 동경천도는 당시 북방경영을 추진하던 宣德王(780∼785)에 대항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수 있다.

동경성 유지는 현재 배추밭으로 바뀌었다. 외성 크기는 동벽 746m, 서벽735m, 남벽 701m, 그리고 북벽 712m로 그 둘레가 2894m나 된다. 백양나무의 숲으로 변한 외성지는 일부 토성의 흔적이 있을 뿐 성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외성 북편쪽으로 처진 내성은 남북 218m, 동서 318m의 크기로 잡초에 묻혀있으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앙에 2m 높이의 둔덕(45m×30m)에 여러개의 초석이 줄지어 있는 제 1 궁전지가 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둔덕(14m×9m)이 있어 침전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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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연구』(1994. 신서원)

<논문>
방학봉, 발해의 5경에 대하여. (『역사교육』53. 1993)
______, 발해수도의 변화발전과정에 대한 연구. (『발해사연구』3. 1993)
______, 발해상경성의 궁성 건축에 대하여. (『발해사연구』6. 1995)
박용연, 발해국 중경고. (『발해사연구』1. 1990)
임상선, 발해의 천도에 대한 고찰. (『청계사학』5.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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