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00330.22022200905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8> 초원의 보검, 세형동검에 내려앉다

스키타이·흉노족 백전노장의 낡은 칼엔 고조선 세형동검의 상징 `군신`이 깃들어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3-29 20:17:34 |  본지 22면


- 기원전 1000년께 동아시아 각 지역 청동검 널리 사용

- 동물장식 손잡이 초원지역에 등장

- 전사와 동일시로 숭배의 대상 돼…단순한 무기 그 이상의 의미

- 한반도 출현 조형검파두도 군사적 지도자 탈바꿈 과정 방증


예부터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인 동시에 권력과 신성을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기원전 1000년께가 되면서 동아시아 각 지역은 초원이건 온대지방 할 것 없이 청동검을 널리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동검이 비파형동검이라면, 초원지역에서는 동물장식을 손잡이에 새긴 독특한 검이 등장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의 동검은 '아키나케스' 또는 '아키낙'이라고 불렸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흉노의 보검인 '경로도'가 등장한다. 초원민족에게 동검은 단순한 무기 그 이상의 것이었다. 전사를 상징하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흉노의 동검은 군신(軍神)이었다


초원문화권인 몽골 오르도스 지역에서 나온 새머리장식 동검.


스키타이인들에게 칼은 군신인 아레스(Ares)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스키타이인들이 있던 곳에는 반드시 아레스의 신전이 있는데, 그 앞에는 나무 다발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오래된 철로 만든 칼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포로나 희생동물을 다룰 때 반드시 그 칼을 썼는데, 특히 포로의 목을 쳐 그 피를 받아 칼에 뿌렸다 한다. 스키타이인들은 비록 기원전 6~7세기에 그리스 근처인 흑해연안에서 활동했지만, 원래는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에서 기원한 사람들이다. 즉, 스키타이인들의 칼 숭배는 원래 시베리아 초원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의 일환인 것이다.


비슷한 풍습이 중국 북방 흉노들 사이에서도 보인다. 흉노족 동검을 한자로 경로(徑路)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하면 '경로'는 지름길이라는 뜻이지만,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는 이 단어가 투르크 계통 언어로 스키타이족의 전쟁용 칼인 '아키나크'와 같은 어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스키타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경로'와 아키나크의 어원이 같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아마도 칼을 숭배하는 풍습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베리아 초원지역에서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경로'라는 칼은 스키타이보다도 훨씬 전인 기원전 11세기께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역사서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달기라는 미인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며 주지육림으로 표현되는 극도의 환락에 빠졌다 한다. 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일으켜서 상나라의 주왕을 처단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상나라 주왕이 저질렀다는 악행은 하나라의 폭군인 걸왕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 같은 기록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격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주의 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시신을 향해 수레 위에서 화살을 세 발 쏜 뒤 수레에서 내려와 경려(輕呂)라는 보검으로 시신을 내리쳤다. 그 다음에 황색 도끼로 주왕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서 사방에 그 죽음을 알렸다. 그런데 이 의식에서 쓴 보검의 이름이 '경려(輕呂)'이니 흉노의 '경로'와 발음이 비슷하다. 주(周)나라는 원래 중국의 서북지방에서 초원민족인 융(戎)족과 잡거하면서 그들의 강력한 무기를 받아들여서 강성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초원지역에서 신성한 칼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던 듯 하다.


한반도 고인돌인들의 칼 숭배 흔적


여수 오림동의 고인돌 암각화. 석검(오른쪽)을 거꾸로 꽂아놓고 사람들이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흉노의 보검인 '경로'는 흉노의 왕인 선우가 중요한 맹세를 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즉 약속을 한 후에 선우는 경로로 백마를 죽여 그 피를 술에 섞어서 마시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경로는 스키타이의 아레스신처럼 신으로 숭상받았다. 흉노는 두 신을 믿었는데, 그 중 하나는 휴도금인(休屠金人)이라고 하는 불상과 닮은 금제 인물상이고, 또 하나는 바로 경로였다.


중국 기록에는 옹주(雍州) 운양(雲陽)에 흉노가 경로를 모신 제당이 있었는데, 후에 진(秦)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흉노의 보검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황금으로 도금하고 보석이 군데군데 박힌 화려한 칼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키타이인들의 보검도 낡아빠진 철검이었으니 흉노도 비슷했던 것 아닐까. 실제 전쟁에서 수많은 적을 죽인 백전노장의 낡은 칼이 조금 더 군신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칼에 특별한 의미와 힘을 부여한 것은 초원민족뿐 아니라 고인돌을 축조했던 한국의 청동기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8세기께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커다란 변환기를 맞이했다. 바로 논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지도계급을 위한 고인돌이 생겨나고, 배산임수의 지세에 대규모 마을이 들어서는 등 지금의 농경사회 기반이 형성되었다. 논농사가 확대되면서 각 집단 간의 충돌이 심해지고, 때로는 서로 목숨을 빼앗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숭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새머리모양 칼끝장식의 조형검파두. 세형동검 끝에 부착돼 있던 것으로 한반도 유물이다.


농사란 사냥과 달라서 가을의 수확을 위해서 1년을 투자해야한다. 하지만 흉작이어서 보릿고개를 넘길 수 없거나 불이라도 나서 곡물창고가 타버린다면 곧 집단의 종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 인구가 증가하면서 농사에 유리한 지역을 두고 집단 간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돌칼 또는 청동검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칼은 지도계급을 상징하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같은 시기 중원이나 초원지역처럼 거대한 군사집단이 충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단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무기는 소수의 지배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무기는 곧 그것을 지닌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실제로 고인돌 사회에서 검을 숭배했던 자료가 있다. 전남 여수 오림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에는 당시 사람들이 그린 암각화가 새겨져있는데, 석검이 거꾸로 꽂혀있고 그 옆으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숭배하는 광경이 묘사되어있다. 또 경북 김천 송죽리 고인돌에서는 고인돌 바로 앞에 비파형동검이 꽂혀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귀하면서도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을 동검이 무덤 주변에 거꾸로 꽂혀있었으니, 이는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둔 것 같다.


초원의 동검이 한반도로 전파되다


한국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무렵 초원지역과의 관계는 거의 단절됐다. 따라서 흉노의 경로가 한반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검을 숭배하는 사상은 중국 북방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12세기부터 존재했다. 또 칼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꼭 '어디에서 어디로 전파'되었음을 따지기 이전에, 원래부터 어느 지역이나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초원과 한반도 사이에서 검을 숭배하는 데 차이가 있다. 스키타이나 흉노와 같은 초원민족은 검 자체를 전사(戰士)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무속인이나 시베리아 퉁구스계통 민족들의 샤먼들은 칼을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쓸 뿐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아마 초원지역은 집단 간의 전쟁이 빈번해서 전사라는 집단이 존재했던 반면,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상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검을 칼집에 꽂으면 손잡이부분만 보이기 때문에 손잡이의 끝 장식은 각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초원의 동검은 주로 전사를 상징하는 새(그리핀)나 동물의 머리를 조각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기원전 3세기께 초원 동검의 장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북방 초원계 문화의 요소 중 대표로 꼽히는 세형동검의 '조형검파두(새머리형 칼끝장식)'를 말한다. 당시 한국은 다양한 샤먼의 무구와 함께 세형동검을 썼던 세형동검 문화가 널리 분포했다.


조형검파두가 유행하던 기원전 3~1세기는 초원지역에 흉노 세력이 발흥하던 시점이다. 세형동검의 조형검파두가 출현하는 것도 흉노의 동검이 주변으로 확산된 것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동검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의 길림성 일대, 남쪽으로는 중국 운남성, 또 일본에서도 널리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조형검파두를 부착한 세형동검이 등장하면서 이전에 등장하던 다양한 샤먼의 무구가 사라졌다. 즉 한반도 고대 사회의 지도자가 제사만을 주재하는 데서 탈피해 군사적인 지도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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