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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1> 오랑캐를 경멸하는 자, 중원을 얻을 수 없다

용비어천가 속 조선 개국에 비유된 주나라는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4-19 19:50:30 |  본지 22면


- 주나라 유물은 중원계통 문화에 서북지방 토착문화

- 초원 전차·무기가 더해진 조화의 산물

- 타 문화 배타성보다 다양한 문화 조화를 강조했던 세종의 실리적 태도 엿보여


중국 산시(陝西)성 함양에서 출토된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뒤 처음으로 만든 한글 문헌이다. 조선의 개국을 칭송하는 125장의 악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1절은 중국 고사를 적고 2절은 1절의 내용에 대응되는 조선 건국의 다양한 일들을 기록했다.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임을 중국의 역사에 빗대어 강조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많다.


사실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 내막은 조금 다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여러 학자들과 같이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에 기초한 것인데, 여기에서 든 중국 역사의 여러 이야기는 중국 서쪽의 오랑캐와 같이 살았던 주나라를 비롯하여 요, 금, 원 등 초원민족에 의해 세워진 정권의 사례가 다수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 용비어천가와 주나라


주나라와 접촉했던 융적이 썼던 다양한 유물.


용비어천가의 시작은 태조 이성계 이전의 4대조 할아버지와 태조, 태종을 함께 '해동육룡'이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 중 왕으로 첫 번째로 추존된 목조(?~1274년)는 고향인 전주를 떠나 강원도와 함경도에 살기 시작했다. 용비어천가의 3~6장에서는 목조의 치적을 주나라의 건국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1, 2장은 전체 이야기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사실상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개국을 주나라 건국에 빗댄 셈이다. 도대체 조선의 시작과 주나라의 개국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세종대왕이 조선을 주나라의 개국에 비유한 내용은 주나라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전설적인 시조 후직(后稷)에서 기원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후직의 3대손인 공유(公劉)가 빈곡이라는 곳에서 융적과 같이 살면서 시작된다. 이후 공유의 9대손인 고공단보(古公亶夫)가 험윤과 융적을 피해 기산(岐山)에 살면서 주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돼 있다.


뒤에 주나라의 태왕(太王)이 된 고공단보가 실질적인 주나라의 선조인 셈이다. 여기에서 험윤과 융적은 바로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북지방의 유목민족을 의미한다. '사기'에 따르면 고공단보는 인의로 주변 사람들을 포섭하고 험윤과 융적을 잘 막아냈기 때문에 세력이 커졌다고 돼 있다. 주나라가 인의로 오랑캐를 눌렀다는 것은 중국사에 흔히 있는 상투적 서술이라고 보면, 결국 중원에서 초원지역으로 건너간 일파들이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공단보가 자신들의 일파를 데리고 정착한 곳은 대체로 현재의 중국 산시(陝西)성 기산현과 보치시 부근이다. 실제로 기산현의 주원(周原) 유적은 주나라가 기틀을 잡은 주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 고공단보가 도읍한 기산을 찾아라


주나라 시대 중 서주 (西周) 시기 금제장식과 귀걸이. 초원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공단보가 도읍해 주 문왕대까지 기산에 세운 기읍(岐邑)은 지난 수십 년간 중국 고고학자의 주요한 관심거리였다. 실제로 수년 전 주나라 초기의 도읍지 유적인 주원 유적보다 서쪽에 위치한 주공묘(周公廟)가 고공단보가 도읍한 기산이라는 주장이 나와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 발굴 결과를 보니 대부분 고분은 도굴됐고, 남아있는 유물도 고공단보가 살았던 때보다도 늦은 것이어서 이 문제는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고공단보의 기읍은 현재의 기산보다 더 서쪽으로 치우친 곳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기록에서는 고공단보가 융적과 같이 살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보면 주나라가 강성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북방민족의 강력한 전차와 무기의 덕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나라 유물은 중원계통의 문화에 서북지방 토착문화, 그리고 여기에 초원지역의 강력한 전차와 무기가 더해진 것이다. 주나라가 기틀을 잡은 기원전 12~11세기께 초원과 중앙아시아는 카라숙문화라 하는, 전차와 강력한 무기를 겸비한 세력들이 변방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초원민족들은 실제로 주나라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금석문에 서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융(戎)은 주로 중국을 침략할 뿐 중국이 정벌한 기사는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고공단보도 기산으로 이주할 때 융의 침략을 받아 땅과 재물을 모두 내어주고 간 것으로 돼 있다.


 

고공단보와 이웃했던 융적이라는 집단은 중국 서북~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 상 산시, 간쑤(甘肅), 칭하이(靑海)성 등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토착문화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초원지대에서 유입된 문화가 발달된 지역이다. 고공단보가 주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던 것은 중원의 문화를 이러한 중국 서북지역의 융적문화와 조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이 고공단보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기원전 12~11세기 주나라 시대 중국 금장식. 중국 북방 초원문화권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 서북지역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어서 고고학적 발굴도 아주 적다. 특히 며칠 전 지진으로 수 천 명이 희생된 칭하이성의 경우 융족의 후손인 장족이 다수 거주하는 곳인데, 아주 낙후된 지역이라 더 피해가 크다.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조사가 이어진다면 중국 북방 초원 역사의 잊혀진 한 페이지가 드러날 것이다.


조선의 시조인 '해동육룡'은 고향인 전주에서 변방인 함경도로 이주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에서 근무하며 여진족과 같이 살았다. 실제로 홍건족이 개경을 위협하자 이성계는 여진족과 고려인으로 구성된 친병으로 막아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성계의 몽골어 이름은 아기바토르였는데 그런 이성계의 오른팔인 이지란 장군은 여진족으로 뒤에 조선인으로 동화되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원나라의 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여진족도 고려국의 일부로 다양하게 활동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한국인' '여진인'이라는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하여튼 문치를 이룩하고 유교에 입각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시대에 왕족과 그 선조들이 동북 지역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여진, 몽골족과 다양한 교류를 했음은 조선왕조에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었다.


중국의 고문에 밝았던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의 첫머리에 고공단보의 일화를 들어서 초원의 이민족과 같이 살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던 주나라에서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찾았다. 다른 문화에 대한 배타성보다는, 겉으로 대의명분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조화를 강조했던 세종의 지혜가 용비어천가에 숨어있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쓴 것처럼 한글 창제에는 초원민족의 지혜가 숨겨 있고, 또 한글로 만든 첫 작품인 용비어천가의 첫 대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교류와 다문화의 저력을 주목하라


초원 이민족들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은 이중적이었다. 그들을 야만과 미개로 규정하며 멸시했지만, 그 모든 유목민족이 사실은 중원에서 갈려나간 사람들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흉노, 견융(서북지방의 오랑캐)은 중국 황제에서 기원하여 하나라와 같은 뿌리라고 보았다. 왜 중국사람들은 그렇게 멸시하고 천대한 이민족을 자신들의 족보와 연결시키려 했을까. 오랑캐가 그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며 또 오랑캐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오랑캐를 이용하는 자가 결국 중원을 지배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표시는 아닐까. 최근 삼황오제와 초원민족을 잇는 기록을 들어서 한족이 중국 주변의 소수민족을 통치하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하기도 한다.


분명한 점은 진정한 중원의 패자는 오랑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오랑캐의 문화와 교류로 태생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서북지방에서 융적과 교류했던 주나라와 진시황의 진나라는 모두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초원민족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원을 지배할 수 있었다. 또 한나라 이후 다양한 초원민족의 제국이 중원에서 웅거했다. 결국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은 주변민족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국 역사는 오랑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장점을 얻은 자가 중원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도 결국 북방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실리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단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점이다.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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