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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역사적 배경
산성이 위치한 북한산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방어처로서 매우 적절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지역으로 당시에도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132년(백제 개루왕 6)에 백제가 북한산에 성을 쌓았고,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에는 나ㆍ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하류를 점령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포함한 죽령 이북 10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고, 555년에는 북한산의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603년(신라 진평왕 25)에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61년(신라 무열왕 8)에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성을 수축하였고, 고려 8대 현종(顯宗)은 거란족 침입시에 북한산성의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232년 몽고 2차 침입때에는 북한산의 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태조의 재궁(梓宮: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이곳에 옮긴 일도 있었다. 고려말인 1388년에는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중흥성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는 등 북한산성 일대의 군사적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 방위에 문제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북한산성의 본격적인 축성에 대한 논의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산성 축성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르던 1595년(선조 29)부터 병자호란 때 청(淸)에 인질로 끌려갔었던 효종조, 1675년(숙종 원년)과 1702년(숙종 28), 1703년(숙종 29), 1710년(숙종 36) 등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북한산성 성벽 및 성문 전경
본격적인 북한산성 축성 논의는 숙종 초기부터 계속되어왔으나 본격적인 논의는 숙종 중후기부터 시작된다. 먼저 초기의 기록인 『숙종실록』29년
1월20일(병인)에 의하면, 1703년 논의 당시 우의정 신완(申琬)은 왕에게 만언차(萬言箚)를 올려 강도(江都: 강화도)는 수세(水勢)가 예전과 같지 않고 남한산성은 고절(孤絶)하여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외적 침입시 오랫동안 항전할 수 있는 북한산성 축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나 축성에 대한 청의 오해 소지, 국가 재정의 궁핍, 그리고 도성의 지맥을 훼손한다는 풍수지리적 이유 등으로 축성 반대론에 부딪혀 결국 실행단계에서 중단되게 되었다. 대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먼저 1704년(숙종 30) 도성의 수축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 또한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1710년(숙종 36)에 완료되었다.
도성의 수축이 일단락 되면서 북한산성의 축성론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청(淸)이 해적의 출몰에 대비하라는 자문(咨文)을 보내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명시된 성지수축금지조항 사문화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청(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710년에 축성론이 또다시 제기된 이유는 도성수비에 대한 불안감 증대, 바다(倭)와 육지(淸)의 적으로 부터의 침입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 성곽의 축조에 대한 청의 견제책 미비, 노론(老論)이 소론(小論)을 압도하고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상황, 그리고 상인세력의 신장과 농업생산력의 향상 등에 의한 경제적 성장 및 실학사상의 태동 등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와 대내외적인 환경은 북한산성의 축성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710년 9월부터 활기를 띠어 판부사 이이명이 강력히 축성을 주장하고, 10월에는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가 북한산의 형세를 답사하고 북한산의 지리적 합리성을 극찬하며 축성을 주장하게 된다. 12월에는 어영대장 김석연 등이 다시 주장하고, 우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북한산을 답사하였다.
축성반대론을 펼친 부제학 조태로(趙泰老)와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 등은 종묘사직과 백성이 있는 도성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새로이 축성하는 것 보다 상책이라며 극력 반대하였지만, 대신들의 축성론이 우세하고 숙종의 축성 의지가 명확해지면서 1711년(숙종 37) 2월에 북한산성의 축성 결정이 내려지고 4월에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축성은 4월 3일에 시작하여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이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함으로써 6개월 후인 10월 19일에 공사를 마쳤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를 비롯하여 도성의 주민과 모역군(募役軍), 그리고 각종 공장(工匠)과 승군(僧軍)이 동원되었다. 축성 기간은 그 규모에 비하여 매우 짧은 기간인데, 이는 도성의 수축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군(軍) 중심의 일사불란한 계획수립과 시행, 그리고 국방상의 시급성과 청(淸)에 이의제기 내지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매우 서둘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숙종대의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는 산성내 행궁의 영건이 마무리되던 1712년(숙종 38) 4월 10일에 북한산성 시찰을 한 이후 관리운영상의 부작용으로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도성방어 중심으로 국방정책이 변경되면서 북한산성의 폐지 요구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산성은 고종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심에서 멀어져 승군제도가 폐지되고, 의병전쟁과 군대 해산,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등의 변혁기를 맞아 몰락의 길을 맞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 이야기
인수봉
위 치 : 서울 종로구 신영동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경계 북한산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162호 (1968년 12월 05일 지정)
시 대 : 조선시대
성 격 : 석축산성 (포곡식)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맥이며, 진산(鎭山)인 북한산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포곡식의 석축산성으로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다. 북한산(836.5m)은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시와 경기도 의정부시ㆍ고양시ㆍ양주군에 걸쳐 있으며, 우이령을 중심에 두고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하여 약 78.5㎢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은 원래 『삼국사기』,『고려사』,『세종왕조실록』의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에서 한산ㆍ화산ㆍ삼각산ㆍ부아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졌는데, 지금의 명칭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칭
북한산(北漢山) : 한강 남쪽 광주시ㆍ성남시에 솟은 남한산에 대응한 호칭
삼각산(三角山) : 고려 성종 이후부터 불렸으며, 삼각산으로 불리는데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인수봉(810m)ㆍ백운대(836m)ㆍ만경대(800m)의 높은 암봉이 깍아 세운듯이 날카롭게 우뚝 솟아올라 삼각형을 이루는 뿔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
부아악(負兒嶽) : 인수봉의 형태가 큰 암봉 뒤에 어린아이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어 어린아이를 엎은 형태의 산모양이라는 데서 유래
산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봉우리는
백운봉(836.5m: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 등이 백제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산봉우리로 추정),
인수봉(810.5m: 북한지를 쓴 고승 성능이 백제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 산봉우리),
만경봉(799.5m: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한양을 조망하고 국도를 정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일명 국망봉이라 불림)과
염초봉, 노적봉(716m), 원효봉(565m),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565), 증취봉(773), 나월봉, 나한봉, 영봉(604m),
비봉(560m: 진흥왕순수비가 있어 붙여진 이름),
문수봉(715.7m), 보현봉(700m), 형제봉(462m)
등이 있다
해동지도 경도 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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