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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 문화콘텐츠닷컴 http://bit.ly/2NRVEv2" 글 중 뒷부분만 가져오고 시설 관련 사진 순서를 내용에 맞게 바꿨습니다.


북한산성내 시설물


복원된 성곽


북한산성의 규모는 1711년 축성 당시와 현재가 거의 차이가 없다. 현재 성곽의 전체 둘레는 12.7km, 성벽을 둘린 체성 연장은 약 8.4km이며, 축성당시의 체성(體城) 규모는 지금의 북한산성 터 그대로를 연결하는 7620보, 즉 21리 60보(현재 圖上 11,541m) 였는데, 백운봉ㆍ만경봉ㆍ용암봉ㆍ문수봉ㆍ의상봉ㆍ원효봉ㆍ영취봉 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북한산성은 체성과 여장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14개소의 성문과 각각 1개의 수문과 시구문, 그리고 장대로 이루어져 있고, 기타 성내에 행궁ㆍ창고ㆍ성랑과 사찰 및 암자 등이 있다. 축성 초기의 상황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17년)과 북한지[北漢誌: 1745년(영조 21)에 북한지를 편찬한 성능(聖能)은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에 승려들을 총 관리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었음]에 기록된 내용으로 살펴보면, 축성공사는 각 군문별로 영역을 분담하여 수행되었는데, 체성의 길이는 7,620보, 여장은 2,807첩, 성문 12개[대문 5(북한지에는 7)ㆍ암문 7ㆍ], 수문 1개, 장대 3개소, 성랑 143개소의 규모였고, 기타 성내의 시설물로는 행궁 1개소, 누각 3개소, 창고 5개소, 사찰 18개소, 암자 3개소, 교량 7개, 저수지 26개소, 우물 99개소 등이 위치하거나 새롭게 설치되었다.


성벽


북한산성의 성벽은 방비에 유리한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조건을 적절히 살려서 고축, 반축, 반반축, 지축여장으로 나누어 쌓았다. 즉 편탄한 평지부분은 비교적 높게 쌓았으나 산지의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높이를 낮추거나 자연암반에 그랭이질만 하여 성벽을 쌓기도 하고 아예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성곽을 쌓지 않기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여장만 설치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전반적인 규모는 고축(高築: 10척~14척) 2,746보, 반축(半築: 6척~7척) 2,906보, 반축의 반인 반반축(半半築: 3~4척) 511보, 그리고 체성을 쌓지 않고 직접 성가퀴(城堞)를 축조한 형태의 지축여장(只築女墻)이 1,457보의 형태였으며, 여장(높이 4척, 너비 3척)은 2,807첩에 이르렀다.


당시 공사를 담당하였던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은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하였는데, 각각의 구간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訓練都監)은 수문 북변에서 용암봉까지의 2,292보(체성형태는 고축 1,052보, 반축 771보, 지축 여장 469보)로 수문ㆍ북문(홍예식)ㆍ서암문ㆍ백운봉 암문 등의 성문과 704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은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281보(체성형태는 고축 474보, 반축 1,836보, 반반축 511보)로 용암 암문ㆍ소동문(홍예식)ㆍ동암문ㆍ대동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1,107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은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체성형태는 고축 1,220보, 반축 299보, 지축 여장 908보)로 대서문(홍예식)ㆍ청수문 암문ㆍ부왕동 암문ㆍ가사당 암문ㆍ소남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986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복원전 여장모습


체성(體城)의 형태는 산성축성 직전의 도성 수축 경험을 토대로 보다 높은 수준의 축성기술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전에 축성된 여타의 산성과는 달리 체성을 축조하는 석재를 크고 반듯하게 하여 각 면과 모서리를 세밀하게 다듬은 정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하여 지세에 관계없이 평축(平築)으로 하였고, 매 단은 들여쌓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그리고 성문이 연결부나 일부 지역에서만 협축방식을 이용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지세를 이용하여 능선의 외벽만 석축으로 하고 내벽은 작은 석재와 진흙 등으로 채워서 붕괴를 막거나 지반 보강을 위한 보축(補築)을 쌓아 올리는 편축식(片築式)을 채택하였다.


여장과 총안


여장(女墻: 城堞ㆍ여담ㆍ성가퀴)은 규격화된 견고한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체성 위에 자연석에 약간의 치석만을 가한 얇은 판석재를 진흙이나 회를 발라 쌓아 올렸다. 미석(楣石)을 두지 않고 약간 들여서 축조하였는데 평균 여장 폭은 3척, 높이는 4척, 길이는 10~12척 내외이다. 타( )의 길이는 3.3.m 내외로 한 타에 1개의 총안을 둔 곳도 있지만 3개의 총안(銃眼)을 둔 것이 일반적이며, 중앙에 근총안을 두고 양편에 원총안을 두었다. 총안의 규모는 15~18x18~22cm 정도이며, 규모가 큰 것은 포혈일 가능성도 있다.


치(雉)


용암문


북한산성의 경우 지형의 굴곡이 심하고 험난하여 별도로 의도하여 치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성곽의 형태상 치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 몇몇 있을 뿐이다. 대체로 10 여 개소 정도인데, 북문에서 시구문 사이에 2개소, 시구문에서 수구문 사이에 1개소, 부왕동암문에서 청수동암문 사이에 1개소, 대남문에서 대성문 사이에 1개소, 대성문에서 보국문 사이에 1개소, 보국문에서 대동문 사이에 1개소, 대동문에서 동장대 사이에 1개소,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에 2개소 등이다.


이중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의 반용봉에 있는 치는 가장 규모가 크며, 숙종년간에 제작된 북한도(北漢圖)에서도 곡성(曲城)이라는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성문


산성의 성문은 1717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의하면 12개, 1745년의 북한지(北漢誌: 1745년)에 의하면 14개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북한지에는 기록된 대성문과 중성문이 비변사등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 대남문


북한지에 의하면, 14개 성문의 구조는 북문(北門)ㆍ대동문(大東門)ㆍ대서문(大西門)ㆍ대성문(大成門)ㆍ중성문(中城門) 등 5개는 홍예식(虹 式) 구조로 상부에 초루( 樓)가 설치된 형태로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 규모이며, 소동문(小東門: 일명 輔國門)ㆍ소남문(小南門: 일명 大南門)ㆍ서암문(西暗門: 성내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고도 불림)ㆍ위문(衛門: 읾명 白雲洞暗門)ㆍ용암문(龍岩門: 일명 龍岩峰暗門)ㆍ동암문(東暗門)ㆍ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일명 國寧門)ㆍ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ㆍ가사당암문(架娑堂暗門) 등 9개는 문의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예형에 상부 건축물을 가지고 있었던 성문의 경우 건물 초석의 형태가 각각 다른 점은 독특한 현상인데, 대성문과 중성문은 원형(圓形), 북문과 대성문은 단주형(短柱形), 대동문과 대남문은 팔각주형(八角柱形)의 형태이다. 그리고 초석은 모두 10개로 구성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단층 문루가 있었으며, 지붕은 대체로 우진각형으로 하였다. 기록상의 각 성문 규모는 북문 높이 11척 넓이 10척, 대동문 높이 9척 넓이 10척, 대성문 높이 13척 넓이 14척, 소동문 높이 6척 6촌 넓이 6척 5촌, 소남문 높이 11척 넓이 11척, 서암문 높이 7척 넓이 7척, 위문 높이 6척 3촌, 용암문 높이 6척 5분 넓이 7척 5분, 부왕동암문 높이 9척 넓이 8척, 가사당암문 높이 7척 넓이 7척 이다. 이외의 성문으로는 수문(水門) 1개소가 있다. 수문은 서암문에서 대서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 16척에 너비 50척에 이른다. 수문 그림이 남아있는 북한지에 의하면, 수문을 성벽을 잘라 놓은 개방형으로 되어 있다.


성문의 출입구는 대문이나 암문 모두 안쪽이 바깥쪽 보다 높고 넓게 하여 외부로부터 문짝의 고정부나 틈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하였으며, 문은 모두 철엽(鐵葉)을 대어 화공에 대비한 형태의 나무문 2개로 구성된 여닫이 형태였다.


암문은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특별한 시설 없이 설치되었다.


장대(將臺)


북한산성에는 동,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봉성암(奉聖庵) 뒤의 시단봉(柴丹峰)에 위치한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의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의 북장대(北將臺) 등 3개의 장대가 있다. 이중 최고 지휘관이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장대는 동장대이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으로서 1712년(숙종 38)에 총융청(摠戎廳)에서 완성하였다. 이 장대는 숙종이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와 함께 올라 살피기도 하였던 곳이며, 이후 1915년 8월의 집중호후 때 유실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성랑(城廊)


성랑


성랑은 성곽을 지키는 일반 병사들의 초소이자 숙소건물이다. 성랑의 건립은 행궁이나 창고 보다 먼저 착수되어 1712년(숙종 38)까지 훈련도감 구역에 42개소, 금위영 구역에 60개소, 어영청 구역에 41개소가 설치되었다. 성문의 주변이나 성벽이 돌출된 곳, 그리고 성벽 중 봉우리에 있는 지역 등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두 143개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성내의 주요 시설물 주변에도 설치하였는데, 주로 행궁이나 창고, 그리고 삼군문의 유영지에 설치되었다. 규모는 성벽에 있는 것은 대체로 1~2칸 정도의 34평, 그리고 성내에 있는 것들은 10~20평 정도이다.



사진으로 보는 북한산성


시 대 : 조선

면 적 : 543,795㎡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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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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