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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9> 부산 `제5의 문명`을 만들자
21세기 부산, 대륙~해양 잇는 동북아 중심도시로 나아가야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0-06-14 20:53:41 | 본지 22면
- 서구 기독교관에 입각, '4대 문명' 주관적 설정
- 중국도 '중화'에 치우쳐 초원문명을 야만 취급
- 이동의 초원 유목민족… 문물·기술교류 역할로 세계사 발전 한 축 담당
- '5대 문명'이라 불러야
- 부산 역사·문화·지형적, 초원·해양문화 공존
- 동북아 바닷길 중심지… 대륙가는 출발점 돼야
러시아 유학 시절 필자는 거의 해마다 여름을 시베리아의 발굴현장에서 보냈다. 9월로 접어들면 너른 시베리아의 평원에서는 밀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러시아에 물자가 귀했던 1990년대였던지라 발굴 틈틈이 들에 팬 밀 이삭을 손으로 베어먹거나, 지도교수가 사냥해오는 오리와 너구리 고기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초원, 그 냉혹한 현실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눈 덮인 산맥 아래 초원에서 스키타이 유적을 바라보고 있는 필자.
특히나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10월까지 발굴이 이어질 때면 고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침낭을 몇 개씩 덮고 자도 아침에 깨면 손이 곱아서 침낭끈을 제대로 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아침 식사당번을 위해 새벽에 일어났는데 곱은 손가락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보드카 한 컵을 들이켜 몸을 녹일 정도였다. 지도교수가 사냥해온 오리, 너구리의 고기로 발굴 도중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한편, 흉노족이 중원과 맞서면서 살아갔던 중국 북방의 내몽고 지역은 최근 사막화가 심해진데다 한화(漢化)된 도시들이 들어서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초원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다. 실제 내몽고 자치주 북방 초원지역은 광활한 초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는 가축이나 목축인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초원 하면 막연한 낭만 아니면 먼 나라의 이색적인 모습을 상상했던 필자에게 그 모든 것은 충격이었다. 아니,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고고학에 입문한 필자에게 초원은 박사 과정 동안의 화두였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 막연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한민족의 기원이 북방지대에서 비롯됐다는 북방민족 기원설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초원 하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초원에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초원의 민족들뿐이었다.
도대체 이런 척박한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한 축이었던 초원의 발달된 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또 그들의 유물들은 까마득히 먼 한반도까지 어떻게 유입될 수 있었을까. 필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만과 오랑캐 이미지로 덧칠된 초원역사
필자(맨 오른쪽)가 서부 시베리아에 있는 안드로노보문화 유적을 발굴하던 중 연구진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계 4대 문명'은 19세기 이래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서구세계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장된 결과다. 특히 18세기 이후 사막의 한가운데서 꽃피었던 메소포타미아문명권은 바로 성서의 고향이었기에 집중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와 인더스 문명 역시 서구에 의한 식민지화에 따라 그 연구가 진행됐다.
서양이 성서고고학의 발달에 근거한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동양에서는 중국의 중화 중심 역사관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사서에서 초원의 여러 민족은 중국(중화)을 위협하고 침략하는 무뢰한의 이미지로 채색됐다. 이렇듯 동·서양은 오랜 세월 '세계 4대 문명'이 세계사를 대표하는 가장 선진적이며 우수한 문명이라는 인식 속에 그 외 지역의 중요성은 간과했다. 특히 초원지역의 민족들은 옛날에는 자신들의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도 않았고, 정착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 탓에 야만의 대명사이자 오랑캐로 치부됐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일궈놓은 세계사적 문화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초원지역을 바라보면서 막연히 한민족의 기원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민족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초원민족들이 초원에서 일구었던 문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라시아의 초원문명은 정착민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정착해 살면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세계사의 한 축을 이루며 마치 피를 받고 뿜어올리는 심장처럼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차 목축 야금술을 비롯해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이집트와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더스·중국문명의 북방에 접해 4대 문명과 다양한 교류 속에서 세계사를 구성해왔다.
■"초원문명은 세계 제5대 문명이다"
초원문명을 상징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알타이의 황금사슴상.
필자는 기존 세계 주요 문명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초원의 문명이 4대 문명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에 주목해 '제5의 문명'이라 하고 싶다. 세계에 4대 문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온대지역에서는 정착생활에 기반한 '4대 문명'이 성장했다면, 그와는 다른 환경과 지역에서 태동한 초원의 문명은 그에 걸맞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이를 제 5의 문명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원의 문명에서는 각 민족을 초월한 다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또 자연에서 자라는 풀을 이용해 목축과 유목을 했던 것은 오늘날 보면 친환경적인 특징이다. 또한 이들은 물자의 빠른 교류와 지역간 이동과 활발한 교류를 전제로 했다. 이 외에도 많은 특징이 있지만, 어쨌든 정착에 근거한 다른 4대문명과는 이질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초원민족의 문명은 유라시아 4대문명의 북쪽에서 기원전 3500년께 시작돼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세운 몽골제국 시절에 절정을 이뤘다. 근 5000년간 초원문명은 4대문명의 북쪽에서 새로운 문물과 기술이 교류되는 고속도로 역할을 하며 각 문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체의 기관으로 비유한다면 피를 받고 다시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
알타이 주민의 오두막.
초원과 해양. 얼핏 들으면 서로 전혀 관계 없는 주제 같이 보인다. 하지만 바닷가 도시 중에서도 부산은 지형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 북방과 해양의 심성과 특징이 공존한다. 필자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낯선 부산에 왔을 때 왠지 모를 친밀감과 익숙함을 느꼈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가 만나본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부산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부산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유로 흔히 6·25때 전국의 피란민들이 몰려든 임시수도였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은 고대 이래로 북방계를 비롯해 주변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교역을 근거로 살아왔다.
완만한 산 사이의 너른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지역과 달리, 경남과 부산은 대체로 험한 산, 너른 바다를 낀 땅에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예부터 교역에 적극적이었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잘 받아들이면서 나라를 발전시켰다. 좋은 예가 바로 가야다. 너른 바다를 끼고 있고 판세도 넓지 못했던 가야는 당시의 최신 소재였던 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발굴하여 교역품으로 만들어 사방과 교역했다. 또 다양한 북방계 유물도 적극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역사를 봐도 부산은 해양·초원문화 결절점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초원의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교역에 힘썼기 때문이다. 가야는 해양과 초원이 맞닿은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북방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섬나라 일본과 교역하면서 진정으로 국제적인 국가를 이뤘다. 21세기 부산이 진정한 국제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타산지석이 아닐까.
20세기 초엽 이래 부산은 한국의 제 2도시이자 선진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최근 그런 매력을 조금씩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모든 국가적 역량이 서울로 집중되는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할 길은 한국의 제 2 도시가 아니라 '동북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가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제1회(2009년 9월 22일 자)에서 밝힌 것처럼 '유라시아 지도를 거꾸로 놓으면 부산은 바닷길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위해 21세기 부산은 해양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포용력을 갖추어야한다. 사실 필자의 연재는 이러한 '현실적인' 부산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원의 여러 문화가 번성했던 원인에서 부산이 나아가야할 바에 대한 타산지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필자의 부족한 연재가 담백솔직하며 야성적인 부산이 초원과 해양을 아울러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지난 9개월간 매주 머릿 속에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고 마침표를 찍는 지금, 필자의 머리 속은 텅 비고 속도 허전해지는 것 같다. 조방 앞 식당에서 말아주는, 초원 유목문화의 냄새가 물씬 나는 뜨거운 돼지국밥 한 숟갈(2009년 11월 3일 자 제7회 '가야의 청동솥과 돼지국밥' 편 참조)이 그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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