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216/1/BBSMSTR_000000010227/view.do


<6>당의 북중국 석권

기사입력 2011. 02. 16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6:31


이세민 `만만디-스피드 작전' 군웅할거 조기 수습 `쌍끌이'

현재 장안성(시안성)의 모습. 618년 고구려 사절이 전란의 땅을 뚫고 장안성에 도착했다. 장안성에는 지방의 호적, 지방지가 보관돼 있어 중국 전체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필자 제공


중국 시안성의 성벽.


영류왕은 형 영양왕이 돌아가기 직전인 617년 중국의 군웅 가운데 하나인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이 장안에 무혈 입성했다는 소식을 돌궐을 통해 접했다. ‘구당서’는 영류왕 재위 이듬해인 619년 2월에 고구려 사절단이 당나라 장안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사절이 전란의 땅을 뚫고 장안에 도착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장으로서 전쟁에 단련된 사람들로 사절단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들은 중국의 지형지세는 물론 군웅들의 대립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근에 전란까지 겹친 지옥을 2000㎞ 이상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치통감’은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란과 기근으로 해골이 들판에 가득해 사람의 눈과 마음을 다치게 한다.”


장안으로의 여정은 모험이요 사투였으며, 영류왕이 당나라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궁금증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안에 도착한 고구려 사절들은 618년 11월에 설거ㆍ설인과의 세력이 당에 의해 붕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국한 사절들은 영류왕에게 중국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 가운데 이세민의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과 그의 아버지 이연이 점령한 장안의 상황 두 가지는 빠지지 않았으리라.


이세민의 전략과 전술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였다. 그의 전쟁은 명인급 장기로 처음에는 장기판에 충분히 말을 벌려놓아 진형을 가다듬고, 우선 싸우지 않을 때부터 적을 압박해, 불리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결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때까지는 소극적인 전쟁을 해 전력소모를 피한다. 그래서 충분히 우위에 선 상태에서 결전전을 개시하는데, 그때에는 자잘한 장기 알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일거에 종반전으로 들어가 적의 본거를 뒤집어엎는 스피드한 작전을 구사한다.


장안의 상황은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장안에 근거지를 둔 무천진 군벌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장안을 상처 하나 없이 점령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장안은 서위에서 북주, 수나라로 이어지는 3 왕조의 수도였다. 여기에는 유형무형의 귀중한 축적이 있었다. 관청의 창고에는 재화 ㆍ식량 ㆍ무기가 저장돼 있고, 조정에는 거의 완전한 관료진과 전투부대가 갖춰져 있었으며, 그들을 곧바로 동원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방의 호적, 지방지와 같은 것에 의해 전국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관료들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과의 연락이 용이하고 정보 수집에 편리하며, 나아가서는 상대편 진영 속에서 내응자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있었다.


‘구당서’는 621년에도 고구려 사절단이 장안에 도착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영류왕이 급변하는 중국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5월 사절단이 낙양을 지날 무렵 중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투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유무주와 송금강을 개휴(介休)에서 격파한 이세민은 왕세충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왕세충은 서역 출신 외국인으로 지략이 뛰어나고 아첨을 잘해 양제의 눈에 들어 졸지에 출세한 자였다. 이밀을 격파한 뒤 그가 사기충천해 곧바로 낙양의 관료들에게 수황제에 옹립된 양동을 폐하고 스스로 천자의 제위에 올라 국호를 정(鄭)이라고 했다. 양동은 곧 살해됐다. 아무리 무기력한 낙양의 관료라고 해도 젊은 외국인에게 황제의 자리가 찬탈당한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일찍이 왕세충 정권 장래에 대해 희망을 버리고 당에 내응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전투가 벌어졌다. 이세민에게 패한 왕세충은 낙양성에 숨었고, 하북(河北)에 근거지를 둔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제까지 왕세충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당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두건덕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향했다. 기회가 있으면 낙양을 손에 넣고 확고한 근거지로 삼으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이세민과 왕세충이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어부지리를 얻고 싶었다.


처음 두건덕은 수나라의 하급장교 출신으로 반란군에 가담했지만 무익한 살생을 싫어하고 지식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상당한 세력이 되자 초심을 잃고 오로지 현상유지에 급급했다.


두건덕이 멀리 하북에서 낙양으로 온다는 것은 이세민에게 원치도 않은 행운이었다. 낙양에서 일거에 하남과 하북을 평정할 수 있다. 그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해 낙양성을 둘러싼 빽빽한 보루들을 쌓아 철저히 포위하고 본대를 이끌고 두건덕을 맞이하러 갔다.


이세민은 단단히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는 적으로부터 도발을 여러 번 받고도 결전을 피했다. 참을성 있는 대치상태가 두 달 동안 유지되는 가운데 멀리서 온 두건덕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갔다. 이렇게 되면 운명을 하늘에 걸고 결전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다. 두건덕은 전군을 투입해 이세민 진영을 육박했다. 이세민은 조급히 서두르는 여러 장군들을 억제하며 출전시키지 않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계속 도전한 두건덕은 힘이 빠졌다. 그리고 군대를 돌려 퇴군을 시작했다.


바로 이점이 이세민이 노리는 바였다. 전군에 총출동을 명했다. 당군은 충분히 휴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백배하고 적병은 아침부터 출진명령에 피로했으므로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었다. 이세민은 기병의 선두에 서서 적진을 돌파해 배후에 나타나 앞뒤에서 공격을 가했으므로 두건덕은 패하고 말았고, 낙마해 그의 군대 5만과 함께 포로가 됐다.


이세민은 왕세충이 보라는 듯이 두건덕을 밧줄로 묶어 낙양성 아래를 끌고 다녔다. 압도된 왕세충은 단념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7월 9일 이세민은 당당하게 장안으로 들어왔다. 화려한 승전 개선식은 장안에 온 고구려 사신들에게 목격됐다. ‘자치통감’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갑자일(9일)에 이세민은 황금갑옷을 입고, 제왕(齊王) 이원길과 이세적 등 25명의 장군들과 철기(鐵騎) 1만 필이 그 뒤를 따랐다. (행렬의) 앞뒤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었다. 포로로 끌려온 왕세충과 두건덕 그리고 수나라의 승여(乘輿)와 왕실 기물을 태묘에 바치고, 병사들에게 연회를 극진히 베풀었다. 을축일(10일)에 고구려왕 건무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하남과 하북이 일거에 평정돼 당의 영토로 귀속됐다. 귀국한 사신들을 통해 소식을 접한 고구려 영류왕은 고민에 잠겼다. 북중국은 통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여세라면 양자강 유역과 사천 ㆍ광동도 차례로 평정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은 아니었다. 북방 초원에 돌궐이 버티고 있었다.


618년 영류왕이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했다. 평원왕 후처 소생의 아들이고 전왕 영양왕의 배다른 아우였다. 그도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주역의 하나였다. 즉위 후 고구려에 패해 내란으로 무너져 가는 수나라의 모습을 지켜봤다. 중국의 군웅할거시대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했다.


중국이 후한 말 분열된 이래 근 400년에 걸쳐 고구려는 성장했고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전란에 휩싸였고, 영류왕 그는 그 속에서 청춘을 모두 보내야 했다. 중국의 재통일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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