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00420/1/BBSMSTR_000000010417/view.do


<66>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기후와 역사 전쟁과 기상

기사입력 2010.04.20 00:00 최종수정 2013.01.05 05:31


백성은 `도주' 가뭄과 기근 과중한 세금 황실은 `안주'


북경의 창핑공원에 있는 이자성의 동상.



“역사 속 가지 않았던 길들. 기회를 놓쳐서 파국을 맞았던 사례들,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 레이황이 지은 책 `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에서 던져주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글을 시작한다. “회의를 한다는 소식에 궁궐로 달려온 명나라 대신들은 잘못된 전갈이라는 말을 듣고 허탈해하며 돌아갔다.” 너무나 사소한 듯 보이는 이 사건에서 그는 명나라의 몰락을 본다. 황제와 대신과 인민들 모두가 무력한 시스템 속에 안주하면서 서서히 멸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해에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16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의 위력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지구 표면의 평균기온이 3℃ 내려가면 대기 중의 수분이 20% 감소돼 심한 한재(旱災)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기후가 한랭해지면서 심한 한재가 몰아닥쳤다. 거의 매년 발생한 극심한 한파와 가뭄으로 기근이 계속됐다.


1622년부터 8년간 한파·가뭄 지속


“희종 천계 2년에서 사종 숭정 2년 사이(1622~1629), 8년간 내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았다. 숭정 6년(1633), 서안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다. 몹시 가물어 한 말의 쌀값이 1000전이나 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섬서통지) 여기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군사비와, 청나라와의 계속되는 싸움에도 엄청난 군비가 들어갔다. 명나라는 군사비를 염출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가혹하게 물렸다. 기근으로 세금을 도저히 낼 수 없었던 백성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기근과 함께 농사짓는 백성이 줄다 보니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더 많은 농민들이 반란 집단에 가세하게 됐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반란은 1627~1628년, 섬서성 북부 지방에서 2년 동안 극심하게 발생한 한해로 시작됐다. 먹고 살 길이 없었던 백성들이 기아 폭동을 일으켰다.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정부 군사들에게도 군량이 공급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정부 군사들까지 반란에 가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반란 세력 중 가장 강했던 집단은 고영상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그의 부장으로 반란군을 지휘했다. 1636년 고영상이 죽으면서 이자성은 반란군의 수령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기세 등등 명나라와 맞섰지만 곧 정부군의 진압에 밀려 패퇴를 거듭했다. 이자성이 다시 힘을 되찾은 것은 한발과 폭풍으로 민심이 다시 흉흉해지면서다.


이자성 50기만 거느리고 하남 진출


1640년 9월, 이자성은 겨우 50기만을 거느리고 출진해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진출했다. 하남을 반란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매우 현명했다. 당시 하남 지방은 수년 동안 한발과 폭풍 등 자연 재해로 농토가 황폐하고 곡가가 치솟아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금을 과중하게 매겼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백성들 앞에 이자성이 나타나자 농민들은 다투어 이자성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이자성은 우선 백성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는 일에 진력했다. “농토를 고루 나눠 주고 세금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말을 논밭에 놓아 농작물을 짓밟거나 쓰러뜨리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살인을 한 자는 죽인다.” “부녀자를 겁탈한 자는 중형에 처한다.” 짓밟히고 무시당했던 농민들은 환호했다.


또한 점령하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눠 줬다.


이자성은 남양을 함락시킨 후 개봉 공략에 나섰다. 개봉은 명나라의 상징적인 도시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병부시랑(국방차관)이 사령관이 되어 수비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몇 달을 힘을 다해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자 이자성은 수공작전을 사용하기로 한다. 여름철 장마 때 내린 비를 가둬 뒀다가 일거에 무너뜨려 개봉을 물에 잠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황하 지역의 둑을 높이 쌓아 놓았다가 1642년 9월에 둑을 무너뜨렸다. 무너진 둑 물은 노도처럼 들이닥쳐 개봉의 북문을 무너뜨렸다. 1644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스스로 대순왕이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승승장구하던 이자성의 반란군은 1644년 3월 19일 북경을 함락시켰다. 명나라는 16제 277년 만에 멸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587년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해였을까? 도대체 명나라 황제는 무엇을 놓쳐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을 휩쓸던 한재와 기근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기근으로 민심이 명나라에서 떠난 것이 결정타였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TIP] ‘하인리히 법칙’과 명나라의 멸망-작은 시그널도 정확한 캐치와 대응 필요


‘하인리히 법칙’은 1930년대 초 미국의 한 보험회사 사원으로 일하던 H. W. 하인리히가 사고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1 대 29 대 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노동 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 중상자 한 명이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또 운 좋게 재난은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했던 잠재적 상해자가 300명에 달한다는 이론이다. 우리네 속담에 “방귀 잦으면 똥 싼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큰 사고가 있기 전에는 반드시 전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10년간 교통사고 통계를 분석해 보니 1회의 사망사고에 35~40회 정도의 중ㆍ경상 사고가 발생했으며, 수백 건의 위험한 교통법규 위반사례가 적발됐다고 한다. 폭행 강도 살인 등 강력사건에서도 전형적인 하인리히 법칙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기업이든 군대든 국가든 조직을 이끄는 리더들의 책임은 무엇일까? 작아 보이는 시그널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캐치해 대응하고, 이상 징후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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