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01217/1/BBSMSTR_000000010417/view.do
<99>누르하치, 바람으로 나라를 세우다
기후와 역사 전쟁과 기상
기사입력 2010.12.17 00:00 최종수정 2013.01.05 06:12
변방의 오랑캐, 중원의 새로운 패자(覇者)로 `우뚝'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어느 것을 봐도 정말 재미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탄탄한 연출, 해리슨 포드의 명품 연기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2편 인디아나 존스에서 비행기의 추락 장면, 바퀴 달린 탄광차를 타고 벌이는 액션,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존스 박사 일행을 신으로 생각하는 티베트족, 신비의 돌을 찾아 벌이는 액션어드벤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존스 박사가 악당인 라오 일당과 협상을 벌이는 물품이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유골과 보물이다. 누르하치의 유골과 보물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를 세운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누르하치가 자랑했던 팔기군의 팔기.
살이호 전투 요도.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초상화.
명나라와 조선의 국경을 잇는 요동지역에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다. 건주 여진족의 족장이었던 누르하치는 1588년 대부분의 여진족을 통일했다. 통일된 여진에 두려움을 느낀 명나라는 1590년 여진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곧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는 22만 명이 넘는 군대와 전쟁 물자를 조선에 투입했고 이로 인해 국력이 더욱 쇠약해졌다.
이때 눈엣가시 같은 여진족이 나라를 세워 후금이라 칭하자 명나라는 사사건건 후금을 들들 볶게 됐다.
교역 문제와 국경 문제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면서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요동의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무순(撫順)을 공격했다. 무순성을 함락시킨 누르하치는 무순성의 성벽을 허물고 일단 철수했다.
무순성의 함락 소식을 접한 명나라 장수 장승음 등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누르하치를 맹추격해 왔다. 명나라의 추격 소식을 들은 누르하치는 병력을 급히 남쪽을 바라보는 지형으로 옮겨 진을 쳤다.
명나라 군사들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엄청난 모래바람이 명나라 진쪽으로 불었다. 명나라 군사는 모래 바람의 공격을 받고 대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이 틈을 노려 명나라군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명나라 장군 이하 모든 병사들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패배 소식을 들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누르하치 대토벌 작전을 지시했다. 동원령이 내려지고 병부 시랑 양호가 총사령관으로 심양(봉천)에 주둔하게 됐다.
명나라는 4개의 부대로 나뉘어 누르하치를 공격할 작전을 세웠다. 산해관 총병 두송, 보정 총병 왕선, 개원 총병 마림, 요양 총병 유정 등 쟁쟁한 장수들이 이번 작전에 대거 기용됐다. 조선은 강홍립을 지휘관으로 하는 1만2000명의 화승총 부대를 보내 누르하치와 싸우도록 했다.
누르하치에 대한 공격 예정일은 2월 21일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누르하치의 편이었다. 폭설이 내리면서 명나라의 공격은 늦춰졌다.
4개의 부대가 합동해 공격하기로 돼 있었지만 명나라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산해관 총병 두송은 전공을 탐내 독단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강을 건너 누르하치를 급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건너야 했던 혼강은 물이 불어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강을 도하하면서 두송은 많은 병력을 잃었다. 간신히 강을 건넌 두송은 2만 명의 군사를 살이호에 포전시키고 자신은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계번성으로 향했다.
누르하치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는데, 계번에는 1만5000명의 인부가 성을 쌓고 있었고 이를 호위하는 군사는 4000명에 불과하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만 죽이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누르하치는 한 수 위였다. 누르하치의 정보망은 명나라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아들에게 일부 군사를 줘 계번성을 구원토록 하고 자신은 4만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살이호에 포진하고 있는 명나라의 본진을 직접 공격했다.
이때도 모래 바람이 부는 시각에 맞춰 공격해 들어갔다. 해질 무렵, 갑자기 폭풍이 일면서 강한 모래 바람이 불어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강한 모래 바람을 맞바람으로 맞고 싸워야 했다. 명나라 군사들이 쏘는 화살은 모두 빗나갔으나, 모래 바람을 등지고 누르하치의 군사가 쏘아대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사기가 꺾인 명나라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누르하치의 병사들은 따라가면서 목을 베 넘기기만 하면 됐다.
계번성으로 향했던 두송의 1만 명의 병력도 누르하치의 아들이 이끄는 병력에게 고전하던 중 살이호에서 승리한 누르하치의 병력이 합세하자 장군 두송 이하 전 병력이 전사하고 말았다. 명나라의 참패였다.
살이호에서 주력군인 두송의 병력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나머지 3군도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 장수만 314명, 군사는 4만5870명이 전사했다고 명나라 전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 군사도 8000명이 사망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살이호전투(薩爾滸之戰)’로서 이 전투는 명나라가 쇠망하고 청나라가 일어나는 커다란 분수령이 됐다.
[TIP]변방민족을 이끌고 대륙을 통치한 리더십-만주어 발명…부족들 하나로 통합시켜
17세기 중국의 역사를 열었던 것은 청나라였다. 그때까지 한족으로부터 오랑캐라고 멸시당하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청나라다. 어떻게 하등 민족으로 취급받던 여진족이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중국 전체를 지배하게 됐을까? 그것도 중국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 국가로 300년간 존재했던 나라를 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의 등장 때문이었다. 여진족은 인구로나 국력으로나 무기로나 명나라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강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누르하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먼저 여진족을 통합시켰다. 다음에 여진문자인 만주어를 발명했다. 언어의 통일이야말로 여진족이 하나로 되는 지름길이었다.
둘째, 청나라가 자랑하는 팔기군 제도를 만들어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셋째, 무역을 활성화시켜 경제력을 탄탄하게 다졌다.
1616년 남은 인근 부족들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이라 했다.
이런 중에 벌어진 살이호의 승리는 누르하치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수많은 병력을 흡수했고, 인구가 증가됨으로써 후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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