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17273.html?_fr=mt2


“조선을 방공지대로 구상”…미국 ‘동아시아 전략’ 간파한 시대의 지성

등록 :2019-11-16 16:32 수정 :2019-11-16 16:57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 현대사 

(23) 해방기 지성 오기영의 통찰


“미, 조선민족 생명 아닌 이 땅의 군사적 가치 고려”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공개편지

실제 미 특사 최종 보고서엔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 담겨

미·소 점령당국과 양국 인민에

“조선의 자주독립” 호소하고 조선 지도자와 인민에게는 “전쟁위기 이길 평화운동” 역설


1947년 8월 중국과 남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웨더마이어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 현지 조사를 벌였다. 웨더마이어 특사는 남한에 대해서는 단독정부 수립에 대비한 여러 정책을 건의했다. 사진은 동북아 방문을 마친 웨더마이어 특사(왼쪽 셋째)가 1947년 9월15일 보고서 작성을 위해 하와이 오아후섬의 미공군기지에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기자 사회는 물론 독서계에서 남다른 필력을 인정받았던 평론가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이 1947년 8월26일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일부분이 9월2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렸지만 전문은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공개서한 형식으로 1948년 6월에 출간한 그의 평론집 <자유조국을 위하여>에 실렸다. 그의 핵심적 주장을 드러낸 서두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편지의 주요 논지를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38선은 조선반도의 교수선”


“트루먼 대통령이 극동사태를 새로이 파악하기 위하여 중장을 조선에 파견한다고 들었을 때,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미국으로서 ‘과연 조선민족은 원조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다시 한번 감정하는 것’이라는 유력한 정보에 접하고 있었다. 이 유력한 정보가 근거 없는 허구가 아니요 또 이 정보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과오가 없는 한, 이것은 태평양에 돌출한 이 조선반도의 군사적 요해성(要害性)을 미국으로서 고수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감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략)


아직 미국이 극동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아니할 때에 일본과 러시아가 이 땅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였으나 미국은 다만 방관하였고 결국에는 러일전쟁의 승리자에게 조선 침략을 허용하는 포츠머스 조약을 승인한 그것이다. 이 아픈 기억 때문에 우리를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이 땅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회의하는 것이 부당한 오해라면 불행히도 이 오해를 더욱 깊게 한 것은 저 얄타 협정의 38선 획정과 여기에 의한 미소 양강의 분할점령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군사적 이유 이상으로 한 민족의 생명이 중시되었던들 이러한 교수선(絞首線)의 획정은 그 구상부터 천만부당하였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 38선 획정은 아직도 과오로 인정되지 아니하였고 한 민족의 생명을 위하여, 그 민족의 통일자주독립을 위하여 너무나 시급한 이 과오의 시정이 아직도 미지수에 속해 있다. (중략)


미국은 과연 조선을 원조할 의도가 있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조선의 경제 원조안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소리만 컸을 뿐으로 공위 재개를 소련이 수락하는 그것에 의하여 보류되었는가. 이러한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은 조선민족에게 원조할 가치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이 땅의 군사적 가치와 대소 견제 정책을 연결시키고 있지 않은가 의아한 것이다.


이제야 중장의, 조선과 중국의 실태 감정은 미국이 조선과 만주를 포함한 중국을 서구민주주의 이념에 합치하는 방공지대(防共地帶)로서 구상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는 중대 사실로써 인식할 수 있거니와 그렇다 하면 조선에 있어서 유혈의 폭력혁명을 회피하며 또 소련식 독재정치를 방어하는 방략은 무엇인가. 중장은 중국 국민정부에 대하여 ‘군사력 자체로는 공산주의를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하였다. 하물며 자기 수정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그냥 모략만으로써 내 편이 아니면 모두 공산주의자요 민족의 적이라고 몰아치는 이성의 경련 상태하에서 무지에 연결된 폭력 행동이나 체포 투옥만으로써 공산주의는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이념에 대하여는 이념의 투쟁이 필요하며 진보적이라 호칭하는 사상에 대항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현 사태를 개혁하는 진보적 정책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 남조선에 있어서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 사회정책이며 경제정책이며 그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많은 지식인, 문화인,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심 없는 애국자를 협력자로 불러 모으는 일이다.”


그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 평가에 의해 좌우됨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우려로 편지를 시작한다. 편지는 남한의 상황을 시정하고 개혁하기 위한 방책들을 제시하는 데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미국 대한정책의 결정 요인이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에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주선한 포츠머스 조약이 일제의 조선 강점을 용인했고, 38선 획정과 한반도 분할점령이 조선의 군사전략적 중요성과 미국의 대소 견제 정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민족에게는 교수대의 오랏줄이 되었음을 논리 정연하게 제시한다.


편지가 웨더마이어 사절단의 임무가 조선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방공지대’ 설치를 구상한 것이 아닌지 짚어낸 것은 매우 예리하고 특기할 만하다. 왜냐하면 웨더마이어 사절단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웨더마이어 장군은 만주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주 지역만이라도 유엔의 신탁통치하에 둘 것을 촉구했기 때문이다. 만주를 특정한 것은 오기영이 당시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을 포착했음을 보여주고, 이는 다른 어느 저널리스트도 가질 수 없었던 그만의 탁월한 감각과 혜안을 증명한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의 오기영은 해방 공간에서 예리하고 냉철한 정세 분석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웨더마이어 특사에게도 신문 지상을 통해 공개편지를 썼다. 오기영(가운데 화살표)이 참석한 1947년 흥사단 제2차 국내 대회 기념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1947년 8월 웨더마이어 특사에게 보낸 오기영의 공개서한은 이듬해 발간된 <자유조국을 위하여>(오기영 저)에도 그대로 실렸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미 특사, 만주 신탁통치안 건의


웨더마이어 특사와 그의 사절단은 한국을 떠난 뒤 하와이에서 2주간 머물며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것을 1947년 9월9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웨더마이어 사절단이 미국의 중국, 한국 정책과 관련하여 가지는 중요성 때문에 그 보고서에 실린 내용과 건의사항이 미국 정가는 물론 중국과 한국 사회의 중대한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보고서가 제출되자 미국 정부는 바로 그것을 기밀로 분류하여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무부는 보고서에 민감한 사항들이 있어서 공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오히려 보고서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웨더마이어 장군 보고서의 ‘중국’ 부분은 중국의 공산화가 눈앞에 닥친 1949년 8월에야 미국 국무부가 공간한 <중국백서>(China White Paper)에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공개되었다. 백서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당시의 정세로 미루어 웨더마이어 장군이 권고한 만주 신탁통치 실시안의 공개는 중국 주권에 대한 침해로 오해되어 중국 인민의 격렬한 반발을 유발하거나 중국 정부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에 비공개를 결정했다고 했지만, 그것을 포함하여 소련을 향해 노골적으로 미국의 속셈을 드러냈다는 점도 중요하게 비공개 결정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웨더마이어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권한 남한에 대한 처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들어간 1947년 8월 중순 이후 미국은 공위 결렬을 예상하면서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고서는 그러한 사태 발전 속에서 작성되었으며 조선에서 미국의 철수 대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효과적인 실행을 위한 건의사항을 제시했다. 그는 이 선택으로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조선의 절반을 소련의 수중에서 떼어냄으로써, ‘한반도의 군사적 중립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편지가 우려한 중국의 일부 지역과 조선을 잇는 ‘방공지대’ 구상이 보고서 작성의 전제가 된 것이다.


웨더마이어 장군 보고서의 ‘조선’ 부분도 1951년에 가서야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삭제된 채 공개되었다. 삭제된 내용은 주로 이승만 등 극우세력의 테러활동, 군정관리 경찰의 친일 행적과 부정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 부분이었다.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남조선 단정 수립에 대비해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내부적 개혁을 촉구했으며, 이는 보고서의 중국 관련 내용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원조를 위한 사전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조직, 훈련, 장비를 제공하여 강력한 남한 군대를 육성할 것을 건의했고, 경제적으로는 적절한 구호 계획하에 원조를 확대할 것을 건의했다. 웨더마이어 장군의 보고서가 대중국 정책으로 만주 신탁통치안을 건의했던 것에 비해 대조선 정책은 오히려 신탁통치안의 폐기를 전제로 남조선 단정 수립에 대비한 군사력의 강화를 요청한 것이다.


편지 인용 중 마지막 부분의 ‘군사력으로 공산주의를 말살할 수 없다’는 언급은 웨더마이어 중장이 8월24일 중국을 떠나며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당시 신문 기사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그 성명서는 국민당 정부의 근본적이고 광범한 정치·경제 개혁을 촉구했다. 편지는 그 성명서에 빗대어 미국을 향해 남조선의 근본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촉구하고, 미군정이 좌익과 중도파에 대한 공격과 탄압을 멈추게 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사회부 기자 출신의 지식인


오기영은 일제강점기에 사회부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신문계의 일재(逸才)’라는 평가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자주적인 경제건설 없이 완전한 자주독립 없다는 평이한 진리를 믿고 정치에의 관심 또는 신문인으로서의 경험을 내던지고 산업계의 일졸(一卒)로 나서서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총무부장 등을 지냈으나 끝내 투필(投筆)에 실패하고 기회가 허락할 때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변과 경제적 혼란, 사회적 난맥상,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그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정리하는 평론들을 집필했다.


그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내는 서한을 비롯하여 편지 형식의 평론을 네차례나 집필했다. 첫번째 편지를 ‘민족의 비원’이라는 제목으로 잡지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실었고, 두번째 편지를 ‘속 민족의 비원’이라는 제목으로 <신천지> 1946년 11월호에 실었다. 전자는 ‘하지 중장과 치스티아코프 중장을 통하여 미소 양 국민에 호소함’, 후자는 ‘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세번째 편지가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낸 서한이었다.


1946년 <신천지> 11월호에 ‘속 민족의 비원’이라는 제목으로 오기영이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한 평론. 국회도서관 소장


오기영의 가족사진. 뒷줄 중앙이 오기영, 왼편은 부인 김정순, 오른편이 장녀 오경수. 오기영 후손 제공


제목과 부제에서 보듯이 그의 편지들은 미소 점령군 사령관과 미국 대통령 특사, 미소 양국의 인민, 조선인 좌우 지도자들과 인민을 각각 수신자로 했다. 수신자에 따라 내용들이 다르지만 ‘비원’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 나타나듯이 편지들은 그의 비장한 염원을 드러내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편지들은 ‘사상은 두 가지나 조국은 하나뿐’이라는 그의 신조하에 미소 분점하 조선의 기구한 운명과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의 비원을 점령군 당국자, 점령국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했고, 조선인 지도자들과 인민에게는 ‘외적에게 무력하고 내쟁(內爭)에는 용감한 백성’이 되지 말고 ‘친미반소나 반미친소나 또는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는 사대주의’를 극복할 것을 호소했다.


네번째 편지는 ‘미소 인민에게 보내는 공개장 제1부 미 인민에게 보내는 글월’이라는 제목으로 1949년 6월10일 발행된 <새한민보>에 실었다. 편지는 ‘지배의 탐욕에 집착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심정을 호소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용의 노력인가’를 깨달은 그의 실망감과 허탈감을 솔직히 내비치며,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고 인간성의 존엄을 승인하는 인민’에게 조선을 엄습하는 전쟁의 위기의식을 피력하며 반전평화운동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펜으로 조선의 독립에 일조하려 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전쟁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점령국의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민초들이었고, 그곳에서 그의 펜이 멈췄다.


▶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