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1123/1/BBSMSTR_000000010227/view.do
<45>唐 태자 쿠데타 음모
기사입력 2011.11.23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24
반란의 거친 쓰나미 642~643년 동아시아를 휩쓸다
당나라의 황제 자리를 향후 누가 계승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모든 주변 나라들의 관심사였다. 전부터 여러 채널을 통해 당 태종의 아들들에 대해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태자가 되고 이어 천자가 되느냐에 따라 당 군부의 핵심인사의 운명도 결정된다.
당과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정보에 밝았다. 당에서 돌아온 고구려의 사신들과 첩자들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제왕 이우는 장안의 궁궐로 끌려와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직후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당 태종의 다섯째 아들 제왕 이우의 모반은 한 편의 코미디 같았다. 이우와 그의 측근들은 기획력도 지적 능력도 없었다. 놀고먹는 건달패에 불과했다. 전투능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제대로 된 이우의 부하들은 반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우의 반란으로 장안 궁 내부에서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게 됐다는 것이다. 반란의 전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건달들과 당 태종의 큰아들인 태자 이승건 부하들의 관계가 드러났다. 이때 태자가 가장 신임하던 측근 흘간승기(紇干承基)의 부하가 적발됐다. 643년 4월 1일 흘간승기의 자백으로 태자가 준비 중인 반란 모의의 전모가 드러났다.
당나라 의덕태자묘의 벽화. 당시 왕자 경호요원들의 모습이 생생히 나와 있다. 필자제공
하지만 음모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태자 이승건은 626년 아버지 이세민이 집권한 직후 8살의 나이에 태자가 되었다. 어릴 때 총명했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10여 년이 흘렀다. 그의 황위 계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구당서’의 평가는 이렇다. “태종이 양암(諒闇)에 머무는 동안 태자가 정사를 보았다. 신중히 듣고 과감하게 판단했으며, 대세를 정확히 꿰뚫었다.”
635년 5월부터 12월까지 7개월 동안 태자는 동궁에서 일반적인 정무를 처리했다. 태종은 태자의 실무능력을 키워주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태자는 이후 태종이 장안을 비울 때마다 국정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태자의 지위는 알게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생 위왕(魏王) 이태가 수면 위로 오르고 있었다. 총명하고 글 솜씨가 뛰어난 이태는 사회 여론에 큰 영향력을 가진 문인들의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637년부터 643년까지 역사의 기록은 태종이 이태를 점점 편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태종은 왕자들을 관직을 주어 지방에 내보냈는데 이태만 장안에 머물게 했다. 이태를 위해 문학관을 설치하고 전혀 새로운 형식의 지리서인 ‘괄지지(括地志)’를 편찬하게 했다. 비만한 그를 위해 가마를 타고 조정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대신들이 이태에게 무례하게 군다고 태종이 역정을 내기도 했으며, 태자보다 이태가 있는 위왕부에 더많은 용품을 하사하고 이태의 수하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태종은 이태와 천문지리, 문학에 대해 논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궁중 무덕전으로 옮겨오도록 했다.
정치에 민감한 후각을 가지고 있던 문무 대신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 준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꼼짝 없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동을 개시하자 조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태자 이승건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로 많은 신하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대신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했고,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디에 줄을 서느냐? 그것은 거대한 도박이었다. 참여하지 않으면 전부를 잃을 수 있고, 참여하더라도 승리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위왕 이태가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되지 못하면 결말은 뻔했고, 동생에게 밀려난 형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위왕과 태자 모두 후퇴할 수 없었다. 태종도 문제를 발견하고 고쳐보려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황자는 물론 모든 대신들의 이해가 얽혀 있었다. 한번 선 줄은 바꿀 수도 없었다. 둘 가운데 하나가 황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태자당과 위왕당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모든 것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암투가 한창인 장안의 궁정에서 선방을 날린 것은 위왕당이었다. 태자는 동성애자였다. 그는 칭심(稱心)이란 자를 좋아해 매일 끼고 잤다. ‘자치통감’에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태상시(太常寺)의 악동(樂童) 칭심을 아껴 그와 더불어 같이 눕고 일어났다.”
위왕당이 이 사실을 태종의 측근에게 흘렸고, 사실을 안 태종은 진노했다. 태종은 칭심과 그 주변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죽였다. 그리고 태자를 불러 크게 나무랐다. 동생 이태에 대한 태자의 증오심이 극에 달했고, 자신의 남자 애인을 죽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깊어졌다.
태자는 동궁에 칭심의 사당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차려 놓고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또한 궁원 안에 무덤을 만들고 사사롭게 관직을 추증하고 비석을 세웠다. 소식을 들은 태종은 불쾌한 생각이 마음에 스며들었고, 태자 역시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문안을 가지 않았다.
태자는 비밀리에 흘간승기가 이끄는 장사 100여 명을 양성하고 위왕 이태를 암살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유력한 인사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모았다. 그들 가운데 고창국 정벌 이후 약탈사건에 연루되어 재상 진급이 좌절된 후군집이 있었고, 당태종의 동생 한왕 이원창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어느 날 함께 모였다. 윗옷을 모두 벗고 마주보고 앉았다. 모든 사람의 어깨에 예리한 칼이 스쳤다. 선혈이 흘러내리자 하얀 비단 조각 하나를 돌려가며 닦았다. 모두의 피가 묻은 그 조각을 태웠다. 그리고 그 재를 술에 섞어서 함께 마셨다. 함께 살고 죽는다는 비밀결사의 의례였다.
부마인 두하가 태종을 암살할 계획안을 세워 놓았다. “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위독하다고 말하면 황제께서 반드시 우리 태자궁으로 친히 오실 것이고 그때 일을 처리하면 됩니다.”
하지만 제왕 이우의 반란이 먼저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그 과정에서 흘간승기가 수사기관인 대리시(大理寺)에 호출됐다. 취조 과정에서 그가 제왕 이우와도 모종의 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태자가 동생 이태를 죽이기 위해 그를 자객으로 보냈지만 실패한 사실도 밝혀졌다. 법에 따르면 그는 사형감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던 흘간승기는 살기 위해 태자를 배신하기로 했다.
‘자치통감’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우의 반란을 처리하는 데 흘간승기가 연관돼 대리시의 감옥에 갇혔고 사형으로 판결되었다. (643년) 4월 초하루 경진일에 흘간승기는 변고가 있음을 올리면서 태자가 모반했다고 고했다.”
태자의 반란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태종은 놀랐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던 태종은 사건의 재수사를 장손무기·방현령·소우·이세적에게 맡겼다. 기존 수사담당 대리시는 물론이고 중서성과 문화성이 모두 동원되었다. 수사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명백하게 사실로 밝혀졌다.
태종은 현무문의 쿠데타로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하여 황권을 손에 넣었다. 대물림되어 같은 비극이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과응보도 아니요 사필귀정도 아닌 군주제도의 고질병이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반란(叛亂)의 계절이었다. 한 해 전인 642년 백제에서 대규모 숙청이 있었고,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집권했다. 장안에서 태자의 반란이 발각되고 7개월 후인 643년 11월에 왜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아버지를 감금하고 권력을 스스로 차지해 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소가이루가(蘇阿入鹿)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아들이자 유력한 태자 후보였던 야마시로노오에 왕(山背大兄王)을 습격해 끝내 자살하게 했다. 성덕태자 집안의 멸문을 목격한 추고천황의 아들 나카노 오오에노(中大兄 : 훗날의 천지천황)와 그 신하 나카도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소가 씨에 대한 일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에서도 대야성 함락 이후 미래의 쿠데타 주체들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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