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824/1/BBSMSTR_000000010227/view.do


<33>당과 설연타의 결전

 기사입력 2011.08.24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07

     

唐 기병 `장창 보병전술<長槍 步兵戰術>'로 승기 잡아


말에서 활을 쏘는 기사(騎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예다. 움직이는 말 위에서 살아서 뛰는 목표를 적중시키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생활화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사진은 최형국 무예24기 연구소 소장이 몽골 초원에서 기사 시범을 보이는 장면이다. 필자제공


몽골 초원의 말은 야생성이 강해 악조건에서도 잘 견딘다. 돌궐인과 설연타인들은 모두 이런 말을 탔다.


당과 설연타의 대결에서 먼저 도발을 한 것은 이적 휘하의 돌궐 기병이었다. 보전(보병전투)을 훈련받은 설연타군은 땅에 내려 진을 치고 돌궐군을 막았다. 돌궐 기병이 설연타군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다. 돌궐군이 후퇴하자 땅 위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설연타군은 말을 타고 추격을 시작했다. 이것을 막아선 것이 이적의 당나라 기병이었다.


하지만 이적의 당 기병은 설연타군의 화살 공격을 받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많은 말을 상실했다. 그러자 이적이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려(下馬) 보병의 진을 치라고 명했고, 장창을 든 기병들이 땅 위에서 대오를 만들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려 자루가 긴 장창(長槍)을 들고 싸우는 장창 보병으로 전환했다. 이적의 병사들을 향해서 설연타의 기병들이 돌진하는 와중에 이뤄진 순간적인 기보(騎步) 전환이었다.


땅에 내려 보병이 된 이적의 기병들은 일제히 장창을 가지런하게 했고, 창의 아래 끝을 땅에 고정시켰다. 육중한 말이 빠른 속도로 달려올 때 창을 땅에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그 힘에 밀려날 뿐만 아니라 치명상을 줄 수도 없다. 창이 겨냥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말의 가슴이나 목이었다.


질주하던 설연타 기병들이 가까이 다가 왔을 때 이적의 병사들은 갑자기 장창을 들어올렸다. 탄력을 받은 설연타의 기병들이 멈추지 못하고 고슴도치 같은 장창의 밭에 충돌했다. 장창으로 적을 찌른 것이 아니다. 적 기병이 달려오는 가속도로 인해 이적이 벌여놓은 고슴도치 같은 장창 밭에 부딪친 것이다.


장창에 걸려 충격을 받은 설연타의 군대가 무너지면서 흩어졌다. 하마장창보병(下馬長槍步兵)에게 설연타 군대가 모두 당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설연타군 전체 진에 균열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이적의 이러한 선전은 부장군 설만철과 그의 기병들의 반격 발판이 됐다. 설만철의 수천 기병들이 설연타의 말잡이들을 공격했다. 설만철은 설연타의 말을 대부분 거둬들였다. 말을 잃은 설연타군은 혼란에 빠졌다. 당군은 흩어진 설연타 군대를 공격해 그 자리에서 적의 수급 3000을 베었으며, 많은 포로를 잡았다.


기동성 있는 기병이 갑자기 장창 보병으로 전환했고, 적이 무너지면 다시 돌격기병으로 전환했다. 이적 기병의 하마 장창보전은 멀티 기능을 습득한 결과였고, 그것은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에 순간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했다. 물처럼 흐르는 유연함이 돋보이는 체제였다. 이는 당군이 설연타 군대와 격돌하기 이전에 하마기병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나라의 장군들도 설연타가 보전을 해 연전연승을 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그들의 훈련 내용을 알아냈다. 초원의 유목민과 중국의 농경민 사이의 전쟁은 지속됐고 둘은 싸우면서 서로의 전술을 배웠다.


‘통전(通典)’(권157, 병전10)이라는 책에는 이정(李靖 : 571∼649)이 집필한 ‘병법(兵法)’이 실려 있다. 여기에 하마기병 훈련에 관한 교범기록이 있다. 이정의 교범은 설연타가 그 기병들에게 훈련시킨 보전의 내용과 상당히 비슷하다. 이정은 이렇게 적고 있다. “도탕, 기병(奇兵), 마군 등의 기병 부대는 하마해 전투할 수 있는 인력을 헤아려 먼저 선발해 놓을 필요성이 있다.”


기병이 하마한 다음 주인 없이 남겨진 빈 말에 대한 관리가 문제가 된다. 말이 도망가 버리면 제대로 된 반격이 불가능하다. 하마해 싸울 때 각 대(隊)별로 빈 말을 잡고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집마(執馬)다. 집마자는 이름이 기록된다.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말을 잃어버리면 가혹한 군율을 적용했다. 만일 전투 때 말잡이가 순서를 잃고 우왕좌왕해 말안장과 말을 놓치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한다. 지옥과 같은 전장에서 말을 놓치지 않고 관리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것은 엄격한 군율 아래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이정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이 후퇴할 때 하마기병(下馬騎兵)은 도보로 30보 이상 따라가면 안 되고, 역시 말을 타고 즉시 따라가는 것도 금한다. 다만 적의 후퇴가 확실히 감지되고 요란스럽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면 그들을 추격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도 여러 부대가 대열을 가지런히 해 전진하라. 전투 시 갑자기 하마한다고 하더라도 적이 패퇴한 이후에 말을 타고 추격하라.”


싸움에서 기병이 말만 탄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유연성이 필요했다. 유연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역할이 고정적이고, 전쟁에서 생존율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에는 일정한 형태가 없듯이 전투에도 정해진 것이 없다. 전투에서는 같은 상황을 두 번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적군의 형세에 따라 작전을 변화시키는 물 같은 유연성이 필요하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저 병형은 물을 본받아야 한다(夫兵形象水).


하지만 유연하기 위해서는 전사로서 고도의 기예가 있어야 한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정확히 활을 쏘거나 창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땅 위에서 그것과 완전히 별개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계획적으로 훈련을 받아야 효과적인 기사(騎射)ㆍ기창(騎槍)이 가능하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기념비에서 자신이 습득한 복수 기능의 무예를 자랑했다. “짐은 승마자로서 손색이 없고, 궁사로서도 서서 쏘거나 말 위에서 쏘거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며, 창잡이로서의 솜씨 또한 서 있을 때나 말 위에 있을 때나 나무랄 데가 없다.”


설연타와의 실전에서 휘하 수백의 병사들을 말에서 내려 장창 보병으로 변신하게 한 이적도, 설연타의 집마자들을 공격해 말을 거둬들인 설만철도, 상관인 이정의 전술 내용을 훈련을 통해 숙지하고 있었다. 이적이 적절한 시점에 말에서 내려 보병 방식의 전투로 역전을 이뤄 냈고, 기병의 명수 설만철은 허를 찔러 설연타의 말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들은 설연타에게 배운 전술을 설연타와의 싸움에 적용했다.


장창의 전법은 지극히 보병적인 것이었다. 한(漢)대에 유목민 흉노와 대결했던 중국인 보병들이 장창으로 적 기병을 제압하기 위해 개발한 대기병 전술이었다. 한무제(漢武帝) 시기 5000명의 장창 보병으로 수만의 흉노(匈奴)기병을 살상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거세당한 사마천(司馬遷)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적은 장창보병전술을 기병전술에 창조적으로 접목시켰고, 이정의 교범을 실전(實戰)에서 성공적으로 구현해 냈다.


당나라 초기의 중국 기병이 보병과 기병 복수 기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대의 인적 토양 때문이었다. 북중국은 수세기 동안 선비족 유목민 정복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다. 중국인들의 ‘야만화(barbarization)’ 과정이 진행됐다. 그들의 가치관, 습관, 행동, 그리고 정책은 모두 초원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초원의 풍속이 당의 조정 엘리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됐고, 군사(軍事)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서북의 귀족들은 상무정신을 강조했고, 유목 돌궐문화를 반영한 전투와 사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 태종 이세민은 전략적 후퇴의 달인으로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린 후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전장에서 친히 수하를 이끌었고 그가 탔던 말 4마리는 적의 활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이세민은 이 말들의 체형과 화살의 상처 등을 정확히 묘사한 석상을 사원에 안치했다. 군마와 전투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관심은 초원 지도자들에게 보이는 특징이지만 중원 한족 왕조의 설립자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세민과 그의 부하들은 뛰어난 승마 기술과 활 솜씨를 지닌 전사로서 초원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유목민들의 기병 공격에 중국인들은 특화된 보병전술을 개발해 맞섰고, 유목민은 중국인의 보병 전술을 배워 자신의 기병전술에 접목시켰다. 다시 중국인들은 유목민의 하마보투 전술을 배워 유목기병과 대결했던 것이다. 당 왕조 초기의 초원 세계로의 대발전은 북중국 중국인들에게 뿌리내린 선비족의 문화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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