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727/1/BBSMSTR_000000010227/view.do
<29>고창국 멸망
기사입력 2011. 07.27 00:00 최종수정 2013.01.05 07:02
사막 돌파한 당(唐)군에 패해 역사속으로…
638년 7월 당 태종이 토번왕 승첸깐포의 무력 시위에 눌려 억지로 국혼을 약속하게 됐다. 소문은 전 세계에 퍼졌다. 북쪽으로 고비사막 너머 초원의 설연타칸의 천막 궁정에도, 서북쪽으로 하서회랑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고창국에도, 동쪽으로 요하를 지나 고구려에도, 남쪽으로 주강 너머 명주(현 베트남)에도 추문이 들려왔다. 강력한 조연 토번의 등장은 당 제국의 독보적 위치를 흔들어 놓았다. 당 수뇌부도 이를 직감했다. 제국을 지켜내는 어려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자치통감'은 위징과 태종의 대화를 이렇게 전한다. “예로부터 제왕은 간난(艱難) 가운데 천하를 얻었고 안일(安逸) 가운데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렇다,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다, 수성의 어려움이 이제 시작됐다.”
고창국의 옛터에 위치한 교하 성터의 모습.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킨 당 제국은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하성은 당 점령 아래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필자제공
당 제국에 반기를 든 소요와 전쟁이 남쪽에서 시작돼 서북쪽으로 번졌다. 그해 11월 명주(베트남) 하정현에서 요족(瑤族)이 반란을 일으켰고, 12월 토번군이 다녀간 사천성에서도 요족이 들고 일어나 이듬해 4월에 가서야 진압됐다. 그 달에 돌라가한의 동생인 아사나결사솔이 무리 40명과 함께 당 태종이 머물고 있는 행궁(구성궁)을 급습해 미수에 그친 사건도 있었다.
당 태종이 한풀 꺾였다고 생각한 고창(高昌)국왕 국문태(麴文泰)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서돌궐과 손을 잡고 타클라마칸 사막 동북 언기(焉耆)의 5개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했다. 나아가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천산북로를 거쳐 장안으로 가는 실크로드 대상들의 흐름을 끊었고, 이듬해인 639년 2월 당 제국에 붙은 실크로드의 이오(伊吾:신강 합밀 소재 왕국)를 서돌궐과 함께 공격했다.
물론 전쟁의 주동자는 지리상으로 동서 문화의 접촉점에 위치한 고창국이라기보다 그 배후의 서돌궐이었다. 고창국은 천산북로의 출발점이면서 초원의 유목민이 타림분지로 침입해 오는 입구에 해당된다. 고창국은 실크로드 요충지에 근거하면서 유목세력인 돌궐과 중원제국 사이에 시세에 따라 양자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취하며 국가의 독립을 유지했다. 돌궐이 강해지면 그들에게 붙었고, 중원이 세력을 얻으면 그들에게 그러했다. 국문태는 그러한 고창국의 타고난 지정학적 운명을 느끼면서 자랐다.
과거 중원이 분열되고 돌궐이 강성할 때 고창국은 돌궐칸에게 신속해 있었다. 그러다 수나라가 돌궐을 격파하고 주도권을 잡자 반대가 됐다. 610년 고창국의 태자였던 국문태는 국왕인 아버지 국백아(麴伯雅)를 따라 하서회랑 중부에 위치한 장액(張掖:감숙성 중부)에서 수양제를 만났다. 그 길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양제를 따라 장안으로 갔다.
4년 중국 체류 기간에 수양제와 함께 낙양과 수나라 곳곳을 다녔고, 612년에는 세상의 끝 요동까지 나아갔다. 대(對)고구려 전선에서 국문태는 전쟁 공포를 느꼈다. 요하를 건너 고구려에 들어간 수제국의 병사 30만 명이 소리 없이 사라졌고, 고구려 노이로제 속에서 수제국은 침몰했다.
아무리 강력한 중원제국이라도 ‘한 방’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그는 토번의 등장이 변수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너무나 손과 입이 빨랐다. 서돌궐과 함께 이오와 언기를 공략한 그는 초원의 강자 설연타의 진주가한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당신도 초원의 천자인데 중원의 천자인 당 태종에게 왜 고개를 숙입니까?” 국문태가 떠벌린 말이 초원에서 장안으로 흘러 들어갔고 당 태종이 발끈했다.
당 태종은 국문태를 장안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국문태는 끝내 병을 핑계 삼아 오지 않았다. 고창국은 당 제국의 수도 장안에서 7000리 행군 거리였다. 그 가운데 2000리는 사막을 지나야 했다. 사막의 찬바람은 마치 칼과 같고, 뜨거운 바람은 마치 불과 같았다.
결코 많은 군사가 식량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병력을 3만 이상 동원하기 어려웠고, 사막의 여정에 지친 그 숫자의 병사들은 고창국의 병력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고창국 도성에 도달한다고 해도 사막을 통해 옮겨온 식량으로는 2주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더구나 서돌궐이 고창국을 원조할 태세였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국문태와 서돌궐의 아사나욕곡설은 서로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고창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표리가 될 것을 약속했다.”
당의 고창국 침공은 만만치 않은 작전이었다. 위징과 여러 신하가 당 태종을 만류했다. 사막을 지나 이역만리 그곳에서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뜻을 이루기 어렵고, 절역인 그곳을 얻더라고 지킬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당 태종은 듣지 않았다. 시범 케이스로 고창국을 때려잡아야 다른 나라들이 당제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당 태종은 후군집(侯君集)을 총사령관으로 고창국 침공부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 도달하기 어려운 사막 행군에 성공했다. 당군은 고창국 입구에 도착했다. 국문태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고창국을 돕기 위해 부근에 주둔해 있던 서돌궐 군대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도주해 버렸다. 국문태는 놀라 당황했고, 640년 9월 혈압이 치솟아 심장 혈관이 막혀 죽었다. 아들 국지성(麴智盛)이 뒤를 이었다.
후군집이 고창국의 전지성(田地城)을 함락시켰고, 남녀 7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창국 도성에 임박한 후군집에게 국지성이 서신을 보내 용서를 빌었다. “당 태종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선왕인데 이미 죽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에게 당 제국을 배반한 고창을 잔인하게 짓밟으라고 명령을 받은 후군집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고창의 도성은 포위된 가운데 포차에서 발사된 수없이 많은 돌덩이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국지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후군집이 군대를 풀어 그 땅을 약탈하고, 그 나라의 3군 5현 22성을 함락했다. 호는 8000, 인구는 3만7700명, 말은 4300필이었다.”
640년 9월 고창국의 멸망소식은 하서회랑을 지나 초원을 넘어 만주까지 흘러 들어갔다. 토번의 등장으로 기가 꺾이기를 바랐던 고구려 영류왕은 당 제국의 위력을 다시 실감했다. 나쁜 일은 겹치는 법이다. 최악의 소식이 또 들려왔다. 그해 10월 23일 토번의 국혼 사절단이 장안에 도착해 당 제국과 토번제국 사이에 결혼동맹이 성립됐다. 고구려 영류왕은 당 제국과 전쟁이 임박했음을 실감했다.
그해 말 마침 당 제국의 정보부 국장에 해당하는 직방랑중 진대덕이 고구려에 와 있었다. 이듬해 8월 장안으로 돌아온 그가 당 태종에게 한 보고를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 고창이 (당 제국에)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고 (진대덕이 묵은) 여관의 관리들이 부지런한 것이 보통 때보다 배나 됐습니다.” 고구려는 서역 실크로드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에게는 호재였다. 고구려 군대의 주력이 요동에 지속적으로 집중될 것이 너무나 명확해졌고,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압박이 감소될 것이다. 서역의 소식을 신라여왕이 접했다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리라. 고창국과 신라가 아주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1926년 9월 신라왕릉 발굴을 참관하기 위해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경주에 도착했다. 아돌프를 기념해 서봉총(瑞鳳塚)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그 왕릉에서 금관과 은합(銀盒)을 비롯한 귀중한 물품들이 나왔다. 뚜껑과 몸체 조립식인 은합의 몸체 겉면 바닥과 덮개 안쪽에 `延壽元年(연수원년)…’이란 명문이 있었다. 연수(延壽)라는 연호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ㆍ왜ㆍ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어느 왕조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고창국왕 국문태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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