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504/1/BBSMSTR_000000010227/view.do


<17>무장들의 내분과 당태종의 봉합

 기사입력 2011.05.04 00:00 최종수정 2013.01.05 06:46

 

당군(唐軍)에 편입된 돌궐족이 토욕혼 정복 이끌다 


청해호 부근의 초원에 무지개가 떠 있다. 이곳은 향후 실크로드 경영권을 놓고 당과 토번이 벌인 150년 전쟁의 주요 무대였다. 이 전쟁이 동방의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발목을 잡았다. 필자 제공


635년 7월 22일 청해호와 멀지 않은 대두발곡(大斗拔谷).


토욕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장들이 모여 있었다. 당태종이 사신을 보내 토욕혼을 점령한 그들을 치하하는 연회가 베풀어졌다. 황제가 내린 술과 악사들 그리고 무희(舞姬)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술이 오갔고,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무희들의 춤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설만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에 품었던 말을 할 심산이었다. “오랑캐 놈들이 뭐 잘났다고 여기에 있어! 공은 내가 다 세웠어.” 돌궐인 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력과 그 휘하의 돌궐기병들이 토욕혼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하력은 욱하는 마음에 칼을 뽑았고, 무장들이 말렸다. 모든 무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로 몰려들었다.


승전의 술자리가 험악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사건은 무장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질투와 균열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앞서 있었던 토욕혼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설만균은 기병전의 명수인 설만철의 형이다. 형제는 청해지방의 적수(赤水 : 청해성 흥해현)에서 토욕혼의 하마장창보병(下馬長槍步兵)에 포위돼 휘하 병력 70% 정도를 잃었다. 하력이 돌궐기병을 이끌고 돌진해 토욕혼의 포위망을 뚫었고, 형제를 말에 태워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적수에서 설만균과 설만철이 경무장을 한 기병으로 전진했다가 토욕혼에 포위됐고, 형제가 모두 창에 맞아 말을 잃고 걸으면서 싸웠다. 따르던 기병으로 죽은 자는 열에 예닐곱 명이었다. 계필하력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구원, 힘을 다하여 분발해 공격하니 향하는 곳에서 적이 쓰러졌고 설만균과 설만철은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면했다.”


형제는 목숨을 구해 줄 당시에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살아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설만철은 그동안 쌓아 온 군사적 명성을 다 까먹다시피했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형인 설만균도 동생의 이러한 불운에 기분이 우울했다.


이때 이대량이 촉혼산에서 토욕혼군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명왕(名王) 20명을 사로잡았으며, 돌궐인 장군 집실사력(執失思力)이 컬무강에서 승리했다. 반전의 상황이었다. 토욕혼의 왕 모용 복윤이 돌륜천에 있는데 그가 장차 우전(于田 : 신강성 화전시)으로 도망할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황하(黃河)의 발원지 가까운 차말(且末 :신강성 차말현)에서 작전회의가 열렸다. 하력은 지금 당장 그를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설만균이 이를 말렸다. “나도 동생과 토욕혼군을 급히 추격하다가 당했습니다. 지금 곧바로 추격하다가 적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안 됩니다.”


하력이 반박했다. “토욕혼은 성곽을 갖고 있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는 유목민입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습격을 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구름처럼 흩어집니다. 지금 습격을 해야 합니다.”


설만균은 용감했지만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총사령관 이정은 하력의 의견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회의장을 나선 계필하력은 곧바로 정예기병 1000명을 모집했다. 곧바로 토욕혼 왕과 그의 수하들이 모여 있는 돌륜천으로 향했다. 그러자 설만균이 마지못해 휘하의 기병을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물이 떨어져 병사들이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면서 사막을 건넜다. 마침내 토욕혼 왕과 그의 무리들을 따라잡았다.


하력은 휘하의 기병에 명령을 내려 주변을 포위했고, 자신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복윤의 아장(牙帳 :이동식 천막 궁정)을 습격했다. 그 자리에서 수천 명의 목이 달아났고 복윤의 처자와 가축 20만이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복윤은 부하들과 함께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그는 사막을 향해 도망쳤다. 행군하는 10일 동안 부하들이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수하 몇 명만 남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수하들의 충성심은 사욕으로 바뀌었다. 현상금이 걸려 있는 복윤의 목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황막한 사막에서 복윤의 머리가 사라지고 몸만 남겨졌다.


635년 5월 18일 토욕혼 원정군 총사령관 이정이 토욕혼을 평정했다고 당태종에게 서신으로 보고했다. 5년 전 항복한 10만 돌궐인들을 당의 군대로 편입한 효과가 최초로 나타났다.


중국인 장군으로 기병전의 명수라고 불렸던 설만철이 퇴장하고 돌궐인 하력이 기병전의 대명사로 등장했다. 향후 당의 군부에서 중국인들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감소될 것이 뻔했다. 중국인 장군들은 변화된 이러한 상황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7월 22일 승리의 술판이 벌여졌고, 하력의 설만균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당태종이 하력을 불러 나무랐다.“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소?” 하력은 당태종에게 그동안 있었던 사건의 전말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무식한 돌궐인이라 문자를 알지 못하기에 그의 구술은 더욱 진솔하고 생생했다.


이야기를 들은 당태종은 설만균을 파직하려 했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렇게 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파직돼 공석이 될 설만균의 장군직을 하력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하력이 반대했다. 당나라 군대 내부에는 돌궐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그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었다. 자신이 설만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키울 뿐이라고 말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폐하께서 신 하력으로 인해 설만균을 해직시키면 호족(胡族)들은 뜻을 제대로 모르고 폐하가 호족을 중히 여기고 한족(漢族)을 경시한다고 생각해 무고(誣告)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고, 또 호족들은 중국인 여러 장수들이 설만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알게 돼 한족들을 가벼이 보게 될 것입니다.”


술판의 사건은 단순히 두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인과 돌궐인의 인종 문제였다.


당태종이 하력이 칼을 뽑은 사건을 보란 듯이 나무란 것은 중국인 장군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돌궐인들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커지면 호한(胡漢) 이중구조의 당나라군 전력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동시에 하력의 진솔한 사건의 전말을 듣고 설만균을 파직하겠다고 말한 것은 하력의 억울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중국인에 대한 돌궐 병사들의 거부감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당태종의 말 한마디에 하력은 모든 앙금을 씻어 냈고 충심 어린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는 당태종이 마음에 품고 있는 정답을 말했을 뿐이었다.


시험에서 100점을 맞은 계필하력은 당태종의 마음이 담겨 있는 선물을 받았다. 황실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고 장안성의 북문을 지키는 검교둔영사(檢校屯營事)의 막중한 관직에 임명했다.


당태종의 배려에 감복한 하력은 당제국의 팽창전쟁에 일생을 바쳤다.


632년 그는 부중(部衆) 1000가를 이끌고 당 조정에 투항한 이래 677년 사망할 때까지 북쪽으로 몽골고원의 설연타, 동쪽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천산을 넘어 중가리아 분지의 서돌궐에 이르는 지역을 수없이 오갔고, 과로사했다.


당태종이 판단을 잘못해 돌궐인과 중국인들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면 당은 유라시아를 호령하는 강대국이 될 수 없었다. 당태종은 정치적 봉합의 명수였으며 부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줄 아는 사령관이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